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 시작하세나.
건곤장은 창제가 오고 반각도 지나지 않아 광장에 당도했다.
기다란 호를 그리며 날아온 백염백발의 노인은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무림의 제왕들과 남해의 지배자를 봤을 터임에도 그는 맨 먼저 나한테 인사를 건넸다.
“다시 보니 반갑구먼, 천룡.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노인장도 별고 없었소?”
“나야 늘 죽림에 들어앉아 밥만 축내는 노물인데 별일이 있겠는가? 그보다 이번에도 대단한 일을 해냈더구먼. 참으로 장하이.”
건곤장이 말하는 ‘대단한 일’은 고루시마 포획 건을 의미할 터였다. 닷새 전 원포에서 그 노물을 원수로 여기는 이들에게 그를 던져주며 대대적으로 행사를 벌였으니 지금쯤 온 천하에 알려졌을 터였다.
내가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데 용왕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 건곤장. 대단한 일이라는 게 뭔가?”
건곤장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용왕에게로 돌아섰다.
“며칠 전 여기 이 젊은이가 단지 재미 삼아 수많은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인 악마를 잡았다오. 용왕도 들어보았을 게요. 고루시마라고.”
용왕은 고루시마에겐 관심이 없었다.
“무후는 안 왔는가?”
무후가 언급되자 삼제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먼저 창제.
초창기에 있었던 두 차례 비무를 제외하고도 그는 지난 오십 년 동안 아홉 번이나 그녀와 격돌했다. 공식적으로는 매번 무승부로 끝났지만 실제로는 창제가 우위를 점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과열과 파국을 막기 위해 일백 초로 제한한 승부에서 무후는 전력을 쏟아부으며 안간힘을 쓴 반면 창제는 누가 보더라도 일 푼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그들의 열 번째 대결은 내년 칠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무후가 이 일전을 위해 사 년 전부터 폐관수련에 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녀가 그날 그동안 미뤄왔던 끝장 승부를 볼 작심임은 명약관화했다.
그녀를 의식했는지 창제도 정사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수련에 전념한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그 역시 십차전(十次戰)에서 확실하게 승패를 가리고 싶을 터였다. 그래서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무후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자 할 터였다.
검제는 한 번도 무후와 충돌한 적이 없지만 그녀와 불편한 관계였다. 창제와 친분이 돈독할뿐더러 그와 정기적으로 손을 섞는 탓이었다.
무후는 자신의 극미한 약세가 비무 상대의 결여 때문이라고 여겼다. 만약 자기한테도 대등한 무력을 지닌 연습 상대가 있다면 창제를 누르는 건 일도 아니라고 믿었다. 좀 억지스러웠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여하간 이런 연유로 무후는 창제를 돕는 검제를 못마땅해했고 검제 또한 그녀를 경원시했다.
도제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도산은 무후의 십자무련과 전략적으로 제휴 관계였지만 그 개인적으로는 무후와 껄끄러운 사이였다. 무후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삼십여 년 전 그들이 난세사강(亂世四强)으로 묶였을 무렵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무후는 도제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당시엔 무후가 아주 약간이라도 도제보다 우세했기에 도제는 응징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무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명을 얻고 그에 걸맞은 무위에 도달했으나 도제는 끝내 구원(舊怨)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녀와 붙으면 공멸이 확실시되기 때문이었다.
용왕도 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기실 그야말로 무후를 가장 꺼리는 인물이었다.
첫 만남 때 무심코 여자라서 얕보는 언사를 내뱉은 용왕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는 사생결단을 내려 드는 무후의 투기(鬪氣)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로써 그녀와의 비무를 종결지었다.
강자들과의 승부를 즐기는 용왕이었으나 승부욕의 화신인 무후에겐 두 번째 대결을 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시로 중원을 드나들었지만 혹시라도 무후가 튀어나올까 싶어 그는 십자무련이 자리한 호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후는 대담무쌍한 용왕이 유일하게 겁을 내는 천하여걸이었다.
***
용왕과 삼제를 둘러보며 건곤장이 그들이 바라는 답을 주었다.
“주군은 오시지 않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반응을 음미하며 건곤장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나올 거라고 문상이 언질을 주었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이리들 모습을 보이다니 놀랍구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 폐물을 보러 왔을 리는 만무하니 여기 이 천룡 때문에 발길을 했을 터.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오.”
용왕이 불쑥 물었다.
“문상이라면 면사를 쓴 여자 아닌가? 그 여자가 나도 올 거라고 했다고?”
“용왕이 제일 먼저 도착했을 거라고 합디다.”
“허어, 어떻게 알았지?”
용왕의 질문을 무시하고 건곤장이 모두에게 말했다.
“자, 이제 우리의 행사를 진행해야겠소. 여러분은 저마다 하늘이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이 천룡이 아니오? 그러니…….”
용왕이 건곤장의 말을 잘랐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싸우러 왔으니 어서 싸우란 말이지. 어디 솜씨 좀 보자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평판이 자자한 건곤장이 백미를 찌푸렸다. 그러더니 나에게로 돌아서며 용왕의 부아를 돋우려는 듯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나는 오늘 자네와 싸울 수 없네.”
내가 응답하기도 전에 용왕이 나섰다.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싸울 수 없다니?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이걸 보려고 수천 리를 날아왔거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창제가 역정을 내는 용왕을 제지했다.
“저이의 말을 더 들어봅시다, 용왕.”
검제와 도제에겐 조금도 꿀리지 않지만 창제는 어려워하는 용왕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눈짓으로 창제에게 감사를 표한 건곤장이 나를 돌아보며 비무 거절의 이유를 설명했다.
“고루시마를 잡기 위해 마원에 들어갔다고 들었네. 그리고 그 악귀를 잡는 과정에서 마인들에게 포위공격을 당해 여러 군데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면서? 그로부터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완쾌되었을 리 없을 거라 보네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날짜를 연기하지 않은 건 가상하나, 나는 몸이 온전치 않은 자네를 상대로 손을 쓰고 싶지는 않으이.”
문상의 정보력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용왕의 도래야 그가 월경한 후 동선을 파악해 예측할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상운이나 흑문도 발을 들이지 못하는 마원의 사정을 무슨 수단으로 알아냈단 말인가.
정황만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누군가, 아마도 그날 전투에 참가한 마인들 중 하나가 그녀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었다. 그 마인이 우연히 그랬을 리는 만무하니 문상이 마원에 심어둔 첩자라 보아야 했다.
이는 당연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문상은 마원 전역에 눈과 귀를 깔아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는 내게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건곤장이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자네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상의 초대를 전하기 위함이었네. 자네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데려오라더군. 같이 가주겠는가?”
어찌 마다하겠는가. 그녀가 부르지 않아도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보러 갈 참이었는데.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약속을 실행하는 게 먼저요.”
건곤장의 흰 눈썹들이 햇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이마 위에서 팔(八)자를 그렸다.
“이것 참, 난감하구먼. 아무래도 안 되겠네. 다음에 하세나. 자네가 완쾌된 후에 말일세. 염왕에게 갈 날이 얼마 남지는 않았으나 그날까진 버틸 수 있을 걸세.”
나는 고집을 부렸다. 벼르고 벼른 행사인데 빈손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문상이 과장한 거요. 약간의 부상을 입긴 했으나 피륙의 상처에 불과하니 운신에는 아무 지장도 없소. 그러니 그냥 붙어봅시다.”
용왕이 소리 질렀다.
“옳거니. 갈수록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야 사내대장부지. 어이, 건곤장. 이제 더 구차스러운 핑계 대지 말고 한 판 하게나. 혹시 새카맣게 어린 후배에게 망신을 당할까 봐 몸을 사리는 거 아닌가?”
용왕의 도발적인 언사를 무시하고 건곤장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게 나와의 일전을 원한다면 이렇게 하세나. 나는 공격보다는 방어가 좀 낫네. 저이들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부끄러우나 내 삼순(三盾)은 어디 가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 절기라고 자부하네. 나는 여기 서 있겠네. 나를 쳐보게나. 자네의 지공이 내 방패를 뚫고 내게 닿거나 내가 한 발이라도 물러서면 패배를 인정함세. 아, 초수는 삼초로 하세나. 자네도 나름 자신이 있는듯하니 그 이상은 감당치 못할 것 같으이.”
나는 건곤장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성장했음을 믿어준 것이었다. 한 달 전이었다면 나는 십초를 받았어도 그를 물러서게 만들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잔잔하던 건곤장의 눈빛에 격랑이 일었다.
“일초로 하잔 말인가?”
“그렇소.”
일순지간 얼굴이 굳었지만 건곤장은 바로 뺨을 풀었다.
“허허, 기대함세.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걸세.”
“최선을 다하겠소.”
진심이었다.
기실 지켜보는 호랑이들의 눈을 고려하면 내 진신무력을 감추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 건곤장이 제안한 삼초를 받아들여 낙일쾌검을 쓰러뜨렸을 때의 선력 정도만 지공에 담아 전력을 다하는 시늉을 했다면 삼제와 용왕의 경계심을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얼마간은 안전이 보장될 것이었다.
반면 내가 일수에 건곤장에게 퇴보를 받아낸다면 네 괴물은 나를 당장의 위협으로 간주할 공산이 컸다. 스물하나에 초절정 극상의 무력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강자를 꺾는 건 전례가 전무한 정도를 넘어 상궤를 파괴하는 기변이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호랑이들은 이계에서 넘어온 용이 날개를 달기 전에 처치하려 들 게 뻔했다. 그들이 야비한 악한들이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인세와 짐승의 세계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이치였다.
그러한 위험성을 알면서도 내가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건 승리할 시 취득하게 될 청화 때문이 아니었다.
당혹스럽게도 일천이 넘는 군중이 운집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한 줌의 열기도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삼제와 용왕에게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군중의 절대다수가 나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양가를 비롯한 오대세가의 인사들이라 그런지는 불분명하나 오늘 그들로부터 청화의 불길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설사 내가 멋지게 건곤장을 밀어내더라도 환호성조차 일지 않을 터였다.
이렇듯 아무 실익이 없는 승리의 쟁취에 전력을 쏟기로 작심한 건 건곤장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이 노인은 사람을 보내 통보할 수 있었음에도 수천 리를 달려와서 비무의 보류 내지는 연기 의사를 밝혔다. 그 이유도 자기 사정이 아니라 내 상태에 대한 고려와 배려에 있었다. 그런 이를 어찌 대충 대할 수 있겠는가.
오는 말이 고우면 가는 말도 고와야 한다고 건곤장이 보인 성의에 응당한 대응을 하는 게 도리였다.
***
건곤장이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노인은 삼십 보쯤 나아가다 걸음을 멈추더니 두 팔을 나란히 내뻗었다.
“자, 시작하세나.”
손목을 꺾어 손바닥이 나를 향하도록 한 건곤장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기를 발출해 반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그의 성명절기 중의 하나인 삼순이었다. 세 겹의 방패는 어지간한 강기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철벽으로 유명했다.
나는 지체 없이 좌수의 검지를 건곤장에게 겨냥했다. 기의 방패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공력이 소모될 것이었다. 시간을 끄는 건 공평한 처사가 아니었다.
운용 가능한 최대치의 선력을 담은 지공을 건곤장에게 쏘아내려는 찰나 나는 멈칫했다. 최선의 일환으로 끌어올렸던 선령이 내 공격이 실패할 것임을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두 개는 뚫을 수 있을 듯싶었지만 마지막 방어막까지 무너뜨릴지는 불확실했다.
관통을 노리는 대신 삼순에 부딪치는 지공의 범위를 넓혀 우격다짐으로 건곤장을 밀어내는 방안도 생각해보았으나 그 역시 부정적인 결과가 예상되었다. 충격이 작지 않겠지만 노인은 어떻게든 버텨낼 터였다.
나는 일초를 제시한 게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건곤장이 제안했던 삼초가 적당했다. 그랬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도 뭐했다. 건곤장에게 실망을 안기기는 싫었다. 하여 나는 자문했다.
무슨 수로 이 난국을 타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