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89
제89화 – 너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일말이라도 기대한 내 잘못이었다.
두루마기에 든 여인은 아무리 후하게 쳐주어도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솔직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추녀에 가까웠다. 눈과 귀와 입술은 그럭저럭 보아줄 만했으나 코가 살짝 들려있었다. 그림이라 보정을 했을 터이니 실제로는 완벽한 들창코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나마 나이는 스물 언저리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이삼십 년 전 모습일 수 있었다. 아니면 화공이 알아서 주름을 지워줬거나.
아무튼 이런 여자를 도봉에 견주다니 어불성설을 넘어 망발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신음성의 의미를 곡해한 용왕은 의기양양했다.
“크하하핫, 놀랐더냐? 하긴 천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절대미녀를 보고도 심장이 펄떡거리지 않으면 목석이나 진배없을 테지.”
진심일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용왕의 진지한 표정은 그가 진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미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어떻게 이다지도 무지막지한 인식 차이를 드러낼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자기한테 더 가까이 있다고 반딧불이 월광보다 밝다고 우기는 격이었다.
내 본능이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맥없이 용궁에 끌려가면 속절없이 당하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막돼먹은 용왕의 성정을 고려할 시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간 경을 치를 수도 있을 터이기에 차근차근 구워삶기로 했다.
“귀한 영애를 나와 맺어줄 작정이오?”
“그렇다. 너는 내 딸아이와 혼례를 치르게 될 게다.”
“나에겐 이미 미래를 함께하기로 언약한 여인이 있소.”
“누군지 안다. 그러나 네 말마따나 언약일 뿐이잖으냐? 말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 더 나은 짝을 만나 약속을 파기하겠다는데 그깟 계집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안진과 진즉 부부지연을 맺었다고 할걸. 경솔한 언사를 후회하고 있는데 이어진 용왕의 말에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다만 나도 완벽한 보증을 할 수는 없다. 네가 행운을 거머쥘지 여부는 내 딸아이의 의중에 달려있다. 그러니 그 아이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게다.”
하아,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안전장치가 확실한지 점검했다.
“만약 당신 영애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네겐 안 된 소리지만 그 경우 나로서도 대책이 없다. 최고의 배필을 구해다 주었어도 본인이 싫다는데야 어쩌겠느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용왕이 무시무시한 뒷말을 생략했음을 꿈에도 모른 채.
***
즉각 용궁으로 떠날 것을 독촉하는 용왕에게 나는 두 시진만 말미를 달라고 청했다.
나를 강제로 끌고 갈지를 두고 고민하던 용왕은 어느 정도는 내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못해 허락했다.
나는 한 시진 반은 운공에 쓰고 나머지 반 시진은 양 관주와의 면담에 할애했다.
용왕은 내가 튈 것을 우려해 소운당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항의하자 다실에는 발을 들이지 않고 복도에 대기했다.
나는 용왕의 귀를 의식하며 양 관주와 밀린 대화를 나누었다. 문상에게 들었던 악녀와 십대악인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그녀에게 전한 후 독자적인 조사를 당부하고는 석진의 안부를 물으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석 대인이 걱정이에요.”
“또 무슨 사고라도 쳤소?”
“그런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린 양 관주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도산으로 향한 것 같아요.”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모를 해친 건으로 도제에게 복수하러 말이오?”
다행히도 양 관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관련이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듯싶어요. 석 대인은 간혹 무모한 행동을 일삼긴 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없음을 모를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거기엔 왜 간 거요?”
“아직 확실치는 않아요. 보양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적이 끊겼으니까. 다만 도산으로 갔으리라 짐작하고 있을 뿐이에요.”
답답했다. 양 관주는 왜 이리 변죽만 울리는 걸까.
나는 다실 입구의 주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소.”
그제야 양 관주가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실은 전날 보양으로 돌아와 한월노모의 변고, 정확하게는 변고 가능성을 들은 석 대인이 대성통곡하더니 그녀의 시신이라도 거두겠다며 다시 나갔어요. 그러고는 이틀 후 용케도 흑미백서를 구해 왔어요. 한월노모의 체향이 밴 옷가지를 냄새 맡더니 그 하얀 쥐가 추적을 시작하더군요. 석 대인은 그 영물을 따라갔고요.”
“그러고서 보양을 벗어났단 말이오?”
“그래요. 하지만 추적은 금세 종료되었어요.”
“무슨 소리요?”
“실은 흑미백서가 석 대인을 인도한 곳은 고영산이었어요. 영물답지 않게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거기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만 뱅뱅 돌았대요.”
나는 비로소 양 관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다. 석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도제는 노모를 죽이지 않았군.”
***
내 추론은 이러했다.
도제는 일단 보양에서 한월노모를 납치한 후 내 소재를 캐물었을 터였다. 그리고 내가 자하옥관의 소운당에 없다면 고영산의 협곡 아래에 있을 거라는 답을 듣고서 그리로 향했을 것이었다. 협곡 근처에 이르러서는 나와 안진의 기운을 감지했을 터이기에 더 이상 한월노모를 대동할 필요가 없어졌을 터였다.
그 시점에서 쓸모를 상실한 한월노모의 목을 비틀었다면 그녀의 시체가 그 장소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녀가 살아있거나 최소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반증이었다.
아마도 도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예컨대 나나 안진이 막강한 뒷배를 가지고 있어 제거를 재고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한월노모의 명줄을 붙여놓는 게 이득이라고 주판알을 굴리지 않았을까. 그녀를 살해해 구태여 나와 원수가 될 까닭이 없거니와 훗날 인질로 삼을 수도 있을 터이니.
그래서 나와의 대화를 끝내고 도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중에 버려두었던 그녀를 다시 낚아채서는 하늘로 날아올랐을 것이었다. 그러고서 다음번 착지까지 수십 리는 비행했을 터이니 흑미백서가 추적을 포기한 것도 당연지사였다. 제아무리 영물이라지만 허공에 흩어진 지 오래인 단서를 쫓을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한월노모의 생존 가능성이 생기자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동시에 양 관주처럼 석진에 대한 걱정이 움텄다. 그는 복수가 아니라 구출을 위해 도산으로 갔음이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석 형이 일을 도모하기 전에 찾아내구려. 그리고 내 뜻을 전해주시오. 나도 같이할 터이니 괜한 부스럼 일으키지 말고 기다리라고.”
양 관주가 반색했다.
“그래요. 석 대인은 일단 발동이 걸리면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이지만 오 공자 말이라면 따를 거예요.”
꼭 그럴지는 의문이었으나 나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부터 다실 밖의 용왕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고 있었다.
***
보양의 저자를 빠져나오자마자 예고도 없이 용왕이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무슨 짓이오?”
“제법 빠르긴 하나 그 속도로 갔다가는 날이 저물도록 용궁에 닿지 못할 게다. 그러니 얌전히 있거라. 내가 안고 갈 터이니.”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용궁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지만 무조건 육천 리는 넘을 터였다. 전날 공주에서 용왕은 오천오백 리를 날아왔다고 했다. 공주는 보양보다 훨씬 남쪽에 있으니 보양에서 용궁까지의 거리는 칠천 리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용왕은 그 어마어마한 장도를 오늘 중으로, 아니 일몰 전까지 주파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해 지기 전에 용궁에 당도할 수 있다는 말이오?”
“당연하지 않으냐?”
용왕의 반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노인네도 마음만 먹으면 단 하루 만에 일만 리를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삼스레 개세팔천의 위용을 절감한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핑핑.
너무나 무지막지한 속력 탓에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화살 소리를 냈다. 나는 노골적으로 경이로운 경공을 과시하며 내 기를 죽이려 드는 용왕에게 심술이 났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딸이 둘이오?”
“뭔 소리냐?”
기대와 달리 용왕은 전혀 숨을 헐떡이지 않았다.
“선물이 두 개라고 하지 않았소?”
“아!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보물이다. 하긴 내 딸도 보물이나 다름없지. 환갑에서야 얻은 금지옥엽이니.”
흠, 그렇다면 내 또래군. 그런다고 마음이 동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뻘인 것보단 나았다.
“보물이란 건 뭐요?”
“가서 직접 보려무나. 다만 네가 내 딸아이의 눈에 차지 않으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내 사위의 자격을 갖추어야지만 성구(聖球)에 들일 수 있으니.”
“성구는 또 뭐요?”
“그런 게 있다. 정신 사나우니 이제 그만 물어라.”
“혹시 날면서 대답하는 게 힘이 들어 그러는 거요?”
“뭐라? 나는 십만 리를 쉼 없이 전속력으로 비행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뭐든 물어봐라.”
나는 힐끔 용왕의 면상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눈썹이 왜 나온단 말인가?
“방금 물었잖소? 대체 어떤 보물이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애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거요?”
“…….”
“그러지 말고 말해 보오. 혹시 아오? 내가 그 물건에 탐이 나서라도 당신 영애의 눈에 들기 위해 더욱 분발할지.”
“그건…… 우리 용궁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神物)이다. 궁주의 신물(信物)이기도 하지. 만약 네가 그것을 취한다면 단박에 절대무적의 천왕이 될 게다.”
나는 용왕의 허풍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게 있다면 용왕은 왜 여덟 하늘 중 변방의 구석 자리에 만족했겠는가.
단순하지만 바보는 아닌 듯 용왕은 내 심사를 간파했다.
“농담이 아니다. 전해져오는 바에 따르면 그 보물엔 천하를 지배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비력(秘力)이 깃들어있다. 다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것을 끄집어낼 비법을 찾지 못했다. 용궁 역사상 가장 강한 내가 온 힘을 쥐어짜도 요지부동이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내 딸아이가 골머리를 앓으며 마련한 온갖 수단들도 별무소용이었다.”
그러면 그림의 떡이 아닌가.
“당신 부녀가 용을 써도 얻지 못한 걸 내가 무슨 수로 빼낼 수 있겠소?”
“너는 천외천의 천재가 아니더냐? 여의주(如意珠) 또한 이 세상 밖의 물건이니 어쩌면 둘이 궁합이 잘 맞을지도 모를 터, 너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용왕은 무심코 기물의 명칭을 발설했음을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의주. 여의주라.
나는 조용히 입 속으로 그 단어를 읊조려보았다. 혀에 착 감기는 게 뭔가 느낌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내 초창기 별호 중에도 여의공자가 있지 않았던가.
큰소리는 쳤지만 점점 숨이 차는지 용왕은 문답을 종결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놔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강압적으로 나를 용궁에 데려가는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물어야 할 게 여럿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만이 답을 줄 수 있는 질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