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an’s Shooter RAW novel - Chapter 1002
마탄의 사수 (1002)
“고마운 일이죠.”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이하로서는, 오히려 그런 블라우그룬이 있어 주었기에 자신의 능력을 100%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블라우그룬과 함께.
이하의 말에 블라우그룬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이하 님. 여하튼 로드― 바하무트 님께서 제게 부족한 건 육체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젤레자 님께 저를 붙여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핫, 지금에 와서 말씀드리지만 정말 도망가고 싶었을 정도였어요.”
“흐흐, 블라우그룬 씨가 그럴 때도 있나?”
“어쨌든 어린애였으니까요. 그렇게 육체적으로도 성장했음에도― 충분한 마나용량과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지식이 있음에도…… 저는 어덜트가 되지 못하고 있었어요. 쥬브나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음에도 말이죠.”
티아마트와 싸울 즈음, 블라우그룬의 키는 이하의 어깨 수준이었다.
거의 다 컸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떤 벽에 부딪친 것처럼 그는 성장하지 않았다.
이미 드래곤 하트와 마나에 관해서라면 상당수의 어덜트급과 유사한 수준인 블라우그룬이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음, 그렇죠. 사실 〈이스터 에그〉 사용 직후에는 진짜 빨리 어덜트급이 될 줄 알았거든요. 우리, 그, 뭐였냐. 막 한 방에 성장하는 아이템도 있었고.”
“〈성장 촉진제〉 말씀이시죠?”
“맞아, 그거!”
이하가 박수를 치자 블라우그룬도 배시시 웃었다.
람화연은 이 대화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푸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하와 블라우그룬의 정신적 교감 관계에 대해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티아마트전戰 당시의 그 힘겨웠던 싸움……. 선대 바하무트 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그 전투를 치른 후 어덜트급이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직후에도 별로 변화는 없었죠. 어덜트급으로의 성장통을 겪기 시작한 건……. 아마도 선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선물?”
“네. 선대의 로드 바하무트께서 마지막으로 주고 가신 선물.”
“바하무트 님의 선물……? 뭘 받았나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흐뭇하거나 따스한 느낌은 아니었다.
씁쓸한 느낌에 가까운 웃음으로 블라우그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건이었으니까요.”
“사건이라면…….”
“왕의 죽음이죠. 인간들의 왕 개념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가까운― 그러면서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셨던……. 지지대가 부러져 버린 셈이었어요.”
육체적으로, 기능적으로 이미 상당수 어덜트급을 이길 수 있는 블라우그룬이 어덜트급으로 탈피하지 않았던 한 가지 이유, 그것은 바로 정신의 문제였다.
스스로 거만함이 있었다고 말하는 블라우그룬의 말투에서도 이하는 알 수 있었다.
이미 다 컸기 때문에 더 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성장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면.
‘그래서 성장한 거군.’
더 이상 그는 알 속에 있지 않게 된다. 알을 깨고 나와야만 성장할 수 있으니까.
이하는 블라우그룬을 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하무트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서글픈 감정이 이하의 감정선을 다시금 건드릴 때, 블라우그룬은 펑퍼짐한 로브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참,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 뭐죠?”
“컬러 드래곤의 장로를 레드 드래곤 일족으로 삼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건― 음, 이제부터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건데―”
“그거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문제?”
이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하가 알아듣지 못하자 람화연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다니까. 컬러 드래곤만 수장이 없는 게 아니잖아.”
“아, 아아! 메탈! 그, 그럼, 지금 메탈 드래곤도―”
컬러 드래곤에게 장로가 있다면 메탈 드래곤에겐 무엇이 있는가.
블라우그룬이 결연한 눈으로 이하를 쳐다보았다.
“네. 새로운 바하무트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릴 겁니다. 바로 내일요. 오늘 제가 온 건 하이하 님께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의 말을 들으며 이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내일, 새로운 플래티넘 드래곤이 선출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블라우그룬 씨는…….”
“물론. 저도 후보 중 하나입니다. 모든 어덜트급 이상의 메탈 드래곤을 두고 논하니까요.”
자신의 파트너 드래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 *
블라우그룬이 떠난 이후에도 이하는 람화연의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람화연은 이하 와 놀아 주느라(?) 쌓여 버린 일들을 근근이 처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이하에게 수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뭘 그렇게 불안해해?”
“응? 불안? 내가? 내가 뭘 불안해한다는 거야?”
이하는 뜨끔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말했으나 람화연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바하무트 때문에 그런 거지? 평소라면 어덜트급이 된 블라우그룬이랑 어디 사냥이라도 갔을 텐데. 그 총기도 〈신화급〉 됐다면서. 강해진 무기와 강해진 파트너……. 평소의 하이하였다면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있기 힘들지.”
블라우그룬이 떠난 후에도 람화연은 컬러 드래곤들이 침공하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이하의 말을 기어코 캐내어 물었고, 이하는 블랙 베스의 테스트를 위한 환영의 공간에 다녀왔다고 말한 상태였다.
자신의 총기가 신화급이 되었다는 말조차 자랑처럼 하지 못했으니, 람화연이 이하의 현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크큭……. 각인자의 반려자인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어째서 이곳에서 시간 낭비 따위를 하는 거지. 나의 원형을 집어삼키기 위해, 각인자 그대가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다.―
“나도 안다고. 아는데, 그, 뭐랄까……. 싱숭생숭하다고나 할까.”
―컬러 드래곤들을 먹으면 된다. 크크……. 마음이 울적할 땐 무엇이든 먹는 게 최고지. 그중 가장 좋은 건 역시 피다.―
“제발 그런 중2병 소리 좀 그만하고.”
이하가 블랙 베스와 떠들자 람화연은 웃었다.
그녀가 보기엔 영락없이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녀는 서류를 대강 정리하고 이하의 곁으로 왔다.
“걱정돼?”
“걱정? 내가?”
람화연은 이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느린 동작으로 턱을 괴었다.
이하가 그녀에게서 조금 상체를 떨어뜨려 보았으나 람화연은 미끄러지듯 그에게 다가섰다.
람화연의 눈은 이하의 눈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응. 그런 표정하고 있을 때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을 때고……. 블라우그룬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메탈 드래곤과 관련된 생각이 많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한 가지 결론으로 나오는 거잖아.”
생각을 읽는 것처럼.
“무슨……. 결론?”
“블라우그룬이 바하무트가 되는 것.”
“내, 내가 무슨! 내가 무슨 그런 생각을 해?!”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어거지로 반박해 보았지만 람화연을 속일 순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으리라.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 그렇게 될 걸 걱정하고 있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된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는, 그 이후의 일을 걱정하고 있어. 내 말이 틀려?”
더군다나 한 마디도 반박 못 할 근거까지 들이댈 때는 더욱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이하는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런 변명거리도 찾지 못했다.
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이하가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도, 어쩌면 람화연에게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맞아. 그럼 어떡하지? 당연히 좋겠지만……. 뭐랄까. 너무―”
“책임이 크다?”
“응. 플래티넘 드래곤이야! 메탈 드래곤의 수장, 왕, 로드! 모든 메탈 드래곤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길 거라고! 그걸, 그걸 얻으면―”
미들 어스 안에서의 책임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똘망똘망한 눈으로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이하를 람화연은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특별히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이하의 입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물론 최고겠지! 안 될 확률도 높아! 뭐, 알렉산더의 베일리푸스도 있고! 람화정 씨의 아르젠마트도 있고! 그 외에도 에인션트 드래곤들은 빵빵해! 블라우그룬이 되지 못할 수도 있어! 근데 되면? 되어 버리면?”
이하가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람화연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하의 말이었음에도 그녀는 그를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않은 채, 그저 이하를 응시할 뿐이었다.
“역시 오빠야.”
“어, 응?”
“이 게임에, 이렇게까지 몰두해서, 그렇게까지 게임 세계관에 대해 신경 쓰고…… NPC와 공감하는 건 오빠밖에 없을 거라고.”
그녀는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이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느릿한 동작에 이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오빠가 보기엔 내가 모든 일에 다 대비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것 같지?”
“으, 으응……. 그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람롱 그룹의 본부장이 될 수 없었겠지.”
혈통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의 노력을 이하도 알고 있다. 이하는 무언가에 홀린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정작 람화연 본인은 이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응?”
“내 비결이 뭔 줄 알아, 오빠?”
“뭔……데?”
“〈오늘의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일은 하지 않는다〉.”
“……엉? 뭐라고?”
이하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헛웃음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올 정도로 람화연의 말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내일의 일도 오늘로 당겨서 할 뿐만 아니라, 내일모레의 일까지 오늘로 당겨서 처리해 버리는 철혈의 여인이 무슨 소리를?
람화연은 이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다만 그 ‘일’이 뭘 뜻하냐에 따라 다르지.”
“그게 뭔데?”
이하의 머리칼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은 이하의 볼에 다다라 있었다. 아주 가볍게 이하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는 말했다.
“걱정. 그것만큼은 먼저 해서 좋을 게 없어. 대응책을 세우는 것과 걱정을 하는 건 다른 얘기야.”
“으음…….”
대응책을 세우려면 문제에 대해 분석해야 하고,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없거나 대응 방안이 없으면 결국 걱정이 새어 나오는 것 아닐까.
이하는 람화연이 명확하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가락이 따스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오빠는 오빠가 잘하는 것만 해.”
“내가 잘하는 거?”
“응. 걱정할 게 아니라, 오빠가 잘하는 거. 나도 그리 긴 삶을 산 게 아니고, 업계에서 오래 일한 것도 아니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어.”
“……뭔데?”
이제 람화연의 손바닥은 이하의 볼을 완전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얼핏 남녀의 역할 구도가 바뀐 것처럼 보였으나 결코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