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an’s Shooter RAW novel - Chapter 1262
마탄의 사수 (1262)
“몬스터의 강함은 루거 님께서 확인하겠지만, 그 수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아, 안대녀?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지난 기브리드의 서진에서 사이가 제법 돈독해진 루비니가 루거의 곁에 섰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람화연의 곁에 있던 푸른 머리의 소녀가 루거와 루비니 그리고 페르낭을 향해 걸어갔다.
“화정아!”
“언니. 나도.”
람화정은 자신을 붙잡는 람화연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말했다.
람화정의 마나로 움직일 수 있는 소형 쾌속선에, 길잡이는 페르낭. 거기에 루거와 루비니가 함께한다면?
“성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치 빠른 라르크는 람화연이 람화정을 뜯어말리기 전, 교황에게 재가를 구했다.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것으로 방어선을 구축할 순 없다는 걸 교황도 잘 알고 있다.
잠시 후, 〈신성 연합〉의 이름으로 크라벤에 서신 한 통이 전달되었다.
에리카 대륙의 마왕군을 염탐하러 갈 수색팀의 결성이었다.
* * *
“헤에, 하이하 씨는 람화연 씨와 연애 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여성이 취향이신가 봐요. 피부색은 저랑 거의 비슷―.”
“와아아아악! 아뇨! 아닌데요!? 이게 무슨 일인지 제일 궁금한 건 전데요?”
정령계로 들어오기 직전, 프레아가 했던 말에 조금 감동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담은 건 아니었다.
그저 믿을 수 있는 전우로 안심이 들기는 했다만 그것조차도 반영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진짜 무서운 게임…… 뇌파를 읽어 내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그냥―.’
접속기 안에 들어 있는 신체의 모든 반응을 다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이하는 새삼 구플의 기술력에 놀라웠다.
이하의 뇌파가 특별하게 반응할 때 마주쳤던 여성들의 기록을 가공, 합성한 것이라고 해도 엄청난 일임에는 분명했으니까.
“큭큭…… 재미있군. 각인자와 같은 몸을 갖고 서로의 피를 탐할 때도 재미있었지만― 지금도 아주 흥미로워.”
“으으, 블랙 베스. 저기, 너무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런데…….”
“뭐가 그렇다는 거지, 각인자여.”
외형은 분명히 마음에 드는 게 사실이다. 람화연을 베이스로 어떻게 보면 예쁜 여자들의 장점만 조금씩 취합한 결과니까.
‘근데 화연이 얼굴로 저런 중2병스러운 말은 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거부감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블랙 베스는 이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각인자’의 몸이 느껴지는 걸.”
“아. 그러고 보니― 엘리자베스. 헤어 색상이나 스타일은 완전 엘리자베스네.”
람화연과 비슷한 외형에서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역시 헤어스타일이었다.
이하가 마지막까지 뒤를 쫓았던 헤어스타일이자, 끝끝내 자신의 총구가 겨눠야만 했던 헤어스타일.
언데드 엘리자베스가 된 이후에도 피부색이나 의복이 변했을 뿐, 헤어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기에, 이하로서는 어쩐지 아련한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이었다.
[묘옹!]“음? 그러고 보니 젤라퐁은 따로 분리가 안 됐네요?”
“그건 이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몸이 있잖아요.”
“아…….”
정령이지만 정령이 아니고, 생명체이지만 생명체가 아닌 아이템.
젤라퐁은 이곳에서도 특별히 분리되진 않았다.
프레아의 말을 들은 젤라퐁은 오히려 이하의 ‘방탄조끼’를 더욱 강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이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무지개의 정령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하 자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유는 아마도 블랙 베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 속성 정령들이랑 더 친하긴 하지만 일반 정령계 친밀도도 좀 있어서 잘 될 줄 알았는데.’
언젠가 암 속성 정령들조차도 거부했던 게 바로 블랙 베스다.
암暗이 아니라 마魔의 기운이 묻은 블랙 베스는 분노의 정령이나 파괴의 정령조차 거부감을 가질 정도였으니 무지개의 정령이 친근감을 가질 리는 없는 것이다.
“아참, 프레아 씨,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시간도 없으니 빨리빨리 하고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정령들에 대해 생각하던 이하는 재빨리 자신의 목적에 집중했다.
정령계 안에서 시간은 현실과 똑같이 흐른다.
이곳에서 몇 시간만 지체해도, 미들 어스는 이미 하루나 이틀쯤 시간이 지나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프레아는 아리송한 얼굴로 이하와 블랙 베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왜요?”
“우우웅, 잘 모르겠어요. 정령이 아님에도 자아가 있는 것…… 그것을 정령계에서 형상화시킨다면 반드시 〈스무 번째 정령〉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참, 그 스무 번째 정령은 뭐예요? 블랙 베스를 이렇게 불러내면 알렌 스르나가 나타나서 스무 번째 정령에 관해 설명해 주는 건가요? 퀘스트?”
이하의 질문을 들으며 프레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하가 당황하고 말았다.
이하는 프레아에게서 많은 설명을 들었고,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저런 얼굴이라니? 자신이 잘못 이해했다는 건가?
“네? 이힛, 아뇨. 알렌 스르나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죠.”
“음? 그럼 스무 번째 정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찾아요? 둘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관……은 없어요.”
이하는 제대로 이해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설명을 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하 자신이 정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프레아가 궁극적으로 빼먹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레리? 그럼 왜…….”
프레아는 정령계에서 알렌 스르나를 만나려 한다.
프레아는 정령계에서 〈스무 번째 속성의 정령〉과 계약하고 싶어 한다.
이하가 두 가지를 결합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히야아, 이거 신기한데? 현실계에 있을 때에도 에고 웨폰들은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순수한 마魔의 자아는 처음이야. 무엇보다 이렇게 완벽한 인간 형태라니?! 자아의 수준도 상당히 높다는 뜻이잖아?]“우와앗!?”
이하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키가 훤칠한 우드 엘프가 서 있었다.
굳이 그가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프레아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은 지켰어요, 알렌 스르나.”
[크으, 정말 지킬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정령화하지 않는 거였는데! 현실계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잔뜩이었는데 말이지! 좋아, 하지만 나도 약속인 이상 지키겠어.]“알렌 스르나― 당신이…….”
알렌 스르나는 이하의 말을 무시하며 블랙 베스와 프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디딜 게 없는 공간에서도 자연스레 이동하는 그의 움직임.
그는 프레아에게 악수하듯 손을 건네며 말했다.
이하도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렌 스르나는 어째서 정령계에 남았는가.
[프레아, 너에게 나, 알렌 스르나의 이름으로 〈스무 번째〉 정령 속성의 계약을 제안한다.]그 스스로 새로운 속성의 정령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프레아의 몸에서 휘광이 뿜어져 나왔다.
“아…… 아아…….”
언뜻 레벨 업 이펙트처럼 보이는 빛이었으나, 그것이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건 이하도 알 수 있었다.
프레아는 몸을 웅크리며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중력이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공간에서, 그녀는 마치 태아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레아…… 씨?”
이하는 프레아에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프레아는 답하지 않았다.
프레아의 곁으로 무언가 막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어, 어어? 잠깐! 프레아 씨! 잠깐만요!”
[하핫, 괜찮아.]“네?”
이하는 프레아의 겉을 감싸는 막을 없애려 했으나 알렌 스르나는 간단하게 그 동작을 멈춰 세웠다.
특별히 이하의 팔을 붙잡은 것도 아니지만 이하는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뇌와 신체 사이의 신경이 다 끊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것일까.
움직이려 하지만 몸에 아무런 신호도 전달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겨우 움직이는 것은 목 위의 부분뿐.
이하는 곁에 있는 알렌 스르나를 바라보았다.
우드 엘프에서 스스로 정령이 되어 버린 존재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현실계에서도 유명한 말이니 알고 있겠지? 지금 그녀는, 깨어 부수기 위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중이야. 무엇이 나올지 궁금하군.]“무슨…… 말씀이시죠?”
알 것 같긴 하면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는 말.
마치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말을 들으며 이하가 물었으나, 알렌 스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외에도 이 정도 수준의 정령사가 나온 건 처음 보는데? 제법 근접한 정령사 녀석들이 이곳에 온 경우는 몇 번 있었다만― 아니!? 그러고 보니…… 너, 인간!? 정령사도 아니잖아!]알렌 스르나는 갑작스레 이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하는 종잡을 수 없는 전설적인 정령사를 보며 역시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렌 스르나의 말에서 모든 키워드를 끄집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 스르나 정도의 수준, 처음, 깨뜨려야 하는 세계,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2차 전직……? 아니, 그것도 단순한 2차 전직이 아니라…….”
이제 무지개의 정령계에서 프레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형형색색의 배경 사이에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새하얗게 보이는 동그란 알 하나가 떠 있을 뿐이었다.
* * *
알렌 스르나는 계속해서 블랙 베스에게 관심을 가지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블랙 베스는 그런 알렌 스르나가 불쾌하다는 듯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있었다.
“큭큭, 꺼져라, 반푼이 정령. 네까짓 녀석에게 내 근원을 알려 줘야 하는가?”
다만 평소의 까칠하고 냉소적인 말투가 지금은 왠지 좀 다르게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하튼 위압감이 줄어든 것만은 분명했다.
어쩐지 웃음이 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하는 조용히 프레아를 기다렸다.
완전히 하얗게 변해 버렸던 알은 차츰 반투명으로 변하고 있었다.
〈꿰뚫어 보는 눈〉으로 프레아를 둘러싼 막膜의 미묘한 두께 변화까지 알 수 있었기에, 이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정령계의 시간은 어쨌든 미들 어스의 게임 시스템과 다른 속도로 흐르지 않는가.
미들 어스 밖의 세상과 같은 시간으로 흐르는 게임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낭비하는 건 미들 어스 안에서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소모하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로 계속 변한다면 적어도 4시간 이상 걸린다. 미들 어스의 하루가 그냥 날아간다는 뜻인데…….’
그것을 그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프레아의 막에 관한 상태를 확인했으니 이제는 이하 스스로 이곳에서 ‘챙겨갈 것’을 챙겨야 한다.
당연히 그 대상이 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저기, 알렌 스르나 님.”
[오, 오오! 그렇지. 이렇게 수준 높은 자아가 직접 ‘각인자’라고 부르는데, 인간에 대해선 신경을 못 쓰고 있었군.]“네?”
[고마워, 고마워! 크으, 내가 현실계에 있을 때 이런 자아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아참, 심지어 블랙 베스 하나가 아니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이하는 알렌 스르나의 풍부한 표정을 보며 당황스러웠다.
블라우그룬이 해츨링이던 시절에 이미 19개 속성의 정령 왕과 모두 계약하고 정령계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우드 엘프.
웬만한 에인션트 드래곤들도 알렌 스르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미들 어스 역사의 과거에서 사라졌던 NPC가 아닌가.
‘근데 이런 태도는…… 정령사들의 기본 조건 같은 건가?’
프레아도 꼭 이런 모습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이하는 두 정령사의 공통점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순수함.’
프레아가 종족으로 우드 엘프를 골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종족의 동일성을 넘어선 그 특징의 동일성. 이하는 프레아에게 오빠나 아빠가 있다면 알렌 스르나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