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03
103
“이거 왜 이래. 남녀 간의 운우지락에서 되고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늘이 짝! 하고 운만 붙여준다면. 흐흐흐!”
“쓰잘데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술이나 마셔. 마시는 게 남는 거야. 괜히 헛다리만 긁어대다가는 제 명에 못 죽어.”
“흐흐흐! 제 명에 못 죽어도 좋으니 그런 여자들과 한 번이라도 응응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잖아? 고 야들야들한 것들을 홀딱 벗겨놓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생기고, 빗줄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또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다.
“푸짐한 고기와 술. 정말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구먼.”
“실컷 먹으라고 해. 킥킥! 마지막 식사가 될 텐데 목에 걸리지나 말아야지.”
빗줄기에 별빛마저 가려져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장막에 켜놓은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만 그 정도로는 깊은 밤의 장막을 걷어낼 수 없다.
어둠 한구석, 참나무 몽둥이로 두들기는 것 같은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두 인영이 서 있었다.
“어느 싸움이나 서로 자신있으니까 붙는 거겠지만…… 쯧!”
무척 키가 작아 어린아이가 아닌가 싶은 꼽추노인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히히! 그러니까 대가리를 잘 만나야지. 무인이 돌대가리를 섬긴 죗값은 목숨으로 갚아야 되는 거야.”
“쯧! 어린놈이 모질기는.”
“영감탱이, 말조심해. 저놈들보다 영감탱이부터 요절내는 수가 있으니까.”
“가자, 이놈아. 늙으니까 조금만 한기를 쐐도 삭신이 쑤신다.”
언장은마와 혈유였다.
그들은 장막 사이를 내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몇 명이나 운집해 있는지, 주목할 만한 고수는 누구인지, 싸움은 어떤 식으로 벌이려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왔다 갔다는 인사라도 해야 되는 것 아냐?”
“아서라. 어차피 내일이면 끝날 목숨들, 하룻밤이라도 허리띠 풀러놓고 즐길 수 있게 놔둬야지.”
언장은마와 혈유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어둠을 헤쳐 나갔다.
‘살육…….’
다담선자는 쏟아지는 빗방울에 온몸을 맡겼다.
빗물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아프게 꽂힌다. 매서운 한기는 내장까지 스며들어 피부색을 파랗게 물들였다.
참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우다.
하나 폭우에 몸을 맡겨보아도 답답한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답답해져 먹은 것이 얹힌 것처럼 가슴 한복판이 묵직해졌다.
상조문에 술판이 벌어졌다는 소문은 그녀의 귀에도 들렸다.
사실 확인은 할 필요가 없다.
소문은 마도를 주축으로 한 마야의 벗들이 은밀히 뒤따르며 전해준 전갈이니 확실하다. 비록 소문으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다담선자가 아니다.
마도는 상조문을 척살할 방책까지 세워놓고 있을 게다.
그는 상조문이 마야의 곁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게다.
마야는 여전히 혼수상태이지만 눈을 떴다고 해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죽어 자빠진 시신밖에 없으리라.
마도, 수검, 금연화, 혈유…….
비록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지만 하나같이 독기로 똘똘 뭉쳐진 인간들이다 보니 그들이 터뜨리는 폭발력은 능히 일개 문파와 버금간다 할 수 있다.
상조문은 마야의 얼굴도 보기 전에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사신들, 천멸도의 살수들은 지옥을 갓 빠져나온 상조문도를 또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진정한 지옥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리라.
비무라면 상조문도 강하다. 싸움도 강한 문파다. 하나 이번 겨룸은 비무나 싸움이 아니라 살육전이다.
먼저 보고 먼저 죽이는 쪽이 승자가 될 것이다.
인원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되지 못한다. 몸을 환히 노출시켰다는 단점은 올가미가 되어 목을 감는다. 하물며 천멸도의 살수들에게는 마도나 수검조차도 검을 뽑아보지 못했다.
상조문은 싸움의 절반은 지고 시작하는 것과 진배없다.
상조문의 몰살은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상조문의 몰살이 몰고 올 파장이다.
남도문은 어떤 대응을 할 것이며, 남무림 무인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상조문과의 싸움은 남무림 전체와 싸우게 되는 시발이다.
‘상조문을 살육하면…… 남만까지 무사히 갈 길이 끊겨. 상조문을 죽이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것과 똑같아. 방도를 세운다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이 밤이 새기 전에 세워야 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상조문주란 자는 어떤 자인가.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이토록 태만한가. 싸움이 벌어지기 전날인데 술을 마시게 하다니. 이게 무슨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몰아붙이면 그만인 막무가내 전쟁인 줄 아나.
상조문도에게서 긴장감은 읽을 수 없다.
그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희희낙락거린다. 통구에서 천절수가 사백 명이나 요절났는 데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좋다. 통구의 천절수는 허접이고, 진짜 무인들은 이곳에 몰려 있다고 하자. 싸움에는 이골이 난 백전노장들이며, 삶과 죽음 따위에는 초연한 초범 무인들이라고 치자.
그래도 무방비 상태로 술을 마시며 낄낄거리는 것은 너무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상조문은 물러서야 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필패당한다. 이는 상조문도들의 잘못이 아니라 문주 된 자가 제 몫을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어쩌자고 죽으러 왔단 말인가. 어쩌자고 얌전히 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는단 말인가.
‘방도는 딱 하나뿐이야. 은밀히 빠져나가야 해. 이 싸움에 휘말리면 안 돼. 날이 밝기 전에, 그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마도나 수검 등이 따라오면 안 된다. 그들은 남아서 싸움을 치러줘야 한다. 그럼 곧 남무림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테고, 그들의 생사는 참으로 난감하겠지만 어차피 일이 그쪽으로 진행된다면 마야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야 한다.
천멸도주는 따라와도 좋고 남아도 좋다.
그들은 음지의 인간들이니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남는다면 마도 일행의 안위가 좀 더 보장받을 것이고, 마야를 따라서 움직인다면 마도 등은 당장 내일의 싸움조차도 승패를 점치지 못한다.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혼수상태인 마야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 소리없이 사라진다 해도 싸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마야가 사라지면 군웅들의 시선은?
금연화는 머리가 좋은 여자다. 그녀는 마야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챌 것이고,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싸움을 이끌겠지.
‘상처를 남기는 금선탈각(金蟬脫殼). 어쩌면 영원히 오늘의 일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휴우!”
남은 자에 대한 미안함을 긴 한숨으로 대신했다.
쏴아아! 쏴아아……!
폭우는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야지(野地)에서 맞이하는 비 오는 날의 밤은 눈과 귀를 멀게 한다.
그러나 육신이 없는 혼인 양 유유히 부유하는 인영이 있다. 폭우도, 어둠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처럼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소리없이 움직인다.
스으으읏……!
인영은 나아갔다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몇 개의 덩어리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야를 감시하는 무리는 백여 명 정도였다. 하나 통구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해서 근래에는 거의 천여 명에 이르렀다.
마차 한 대를 포위하고 있는 천여 명.
다담선자는 그들 사이를 뚫고 나가야 한다. 깊은 밤이고, 폭우가 이목을 가려주고 있지만 천여 명의 사이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빙 둘러선 인의 장막.
그들이 쳐놓은 장막의 폭은 삼십여 장을 훌쩍 넘어섰다.
그 속을, 인림(人林)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두는 절혼마녀가 맡았다.
그녀의 귀적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신법이었다.
그녀가 전방을 살피고 돌아와 일행을 이끄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절정고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빠름이다. 단순 비교만 하면 배는 빠른 셈이다.
일령은 만일을 대비해서 진기를 가득 끌어모았다.
혹여 밤잠을 잊은 자가 있어서 우연히라도 발각이 되는 경우에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한다. 망설일 여유가 있을 수 없다. 누군지 살필 여유도 없다. 발각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소리 지르기 전에 불문곡직하고 죽여야 한다.
비조처럼 날아가 염화옥수로 짚으면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고 죽으리라.
제삼의 수는 다담선자의 추명반이다.
가장 빠른 죽임에는 추명반이 단연 독보적이지만, 전체적인 상황 판단을 도맡아야 하기 때문에 제삼의 수를 맡게 되었다.
이것이면 족하다.
세 여인이 순차적으로 공격을 가하면 대여섯 명쯤은 찰나에 죽일 수 있다.
천천히, 천천히…… 속도보다는 은밀함에 치중하여 움직였다. 다행이랄까? 삼십여 장에 이르는 인림을 빠져나올 때까지 염려하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쉬었다 가요.”
다담선자는 인림을 빠져나왔다고 판단하자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시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큰 나무 밑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이라고 장대비가 몰아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으로 맞는 것보다는 나뭇가지에 한 번 걸린 비를 맞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시마는 업고 있던 소립파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소립파는 기식이 엄연했다.
세간에 퍼진 소문처럼 낮이고 밤이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의술 부분이라면 단연 천멸도주를 내세울 수 있다.
누구를 치료하기 위해 배운 의술이 아니다. 본인들 스스로를,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배운 의술이다. 천멸도 사람들은 의술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여기는 부분이지만.
천멸도주도 소립파의 상태를 파악해 내지 못했다.
저주의 자오법신이 혼수까지 일으키는 것일까?
육신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양기와 음기가 원흉이라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혼수상태가 되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마는 맥을 짚어보았다. 일면으로는 코밑에 손가락을 대어 호흡도 살폈다.
“어때요?”
“똑같아. 내가 그랬잖아. 비 좀 맞았다고 찔찔거릴 놈이 아니라고.”
“자시를 넘겼으니……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이놈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낸들 어찌 알아. 업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어.”
저주의 자오법신, 자오변환.
혼수상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끔찍한 자오변환의 고통을 아무런 느낌 없이 감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만 가요. 아무래도 좀 편안한 곳을…….”
다담선자는 말을 뚝 끊었다.
“이런 식으로 할래?”
등 뒤에서 얼음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천멸도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이목까지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건네올 시점은 인의 장막을 벗어날 즈음이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나타난 것이 놀랍지도 않다.
다담선자는 태연히 등을 돌려 천멸도주를 마주 봤다.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저놈이? 네 생각이? 아니면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게? 뭐가 미안하고, 뭐가 어쩔 수 없었니?”
“전부 다. 할 말이 없어. 지금은.”
천멸도주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어디로 갈 건데?”
“몰라. 우선은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남만으로 가.”
“그건 알아.”
모르는 건 멸신구관이 설치된 장소다. 그곳은 오직 마야만이 알고 있다.
“산이 주름 잡힌 곳. 여인의 비궁(秘宮)으로 들어가라.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이것뿐이야.”
“산이 주름 잡힌 곳? 여인의 비궁으로 들어가라?”
낯부끄러운 말을 다담선자와 천멸도주는 태연히 했다. 오히려 듣고 있던 시마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곧 뒤따라갈 테니까 가고 있어. 너라면 안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 당장 코앞에 닥친 위험은 흑조편복이란 놈이 일으킬 거야. 저놈은 그 작자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걸리면 바로 죽여. 두고두고 후환이 될 놈이니까.”
다담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멸도주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다담선자의 성품상 마야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다담선자는 위험을 자초할지언정 마야가 한 말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눈길이 절혼마녀를 향했다.
절혼마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천멸도주는 이번에도 혀를 찼다.
“내가 따라가면 남은 놈들이 죽어. 마도나 수검, 혈유 같은 놈들은 나도 잘 아니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천멸도주는 등을 돌렸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다.
원래 그녀는 오지 않을 사람이었다.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족했다.
그녀가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담선자의 판단, 인의 장막을 벗어나는 순간에 한바탕 패악을 쏟아 부을 것이라고 예견했던 생각.
다담선자는 그것이 미안했다.
그녀가 온 것은 전해줄 말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멸신구관이 설치된 장소에 대해서 몇 마디 말이라도 알고 있기에 전해주고자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