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4
#1023화
후욱, 훅.
말도 버린 채 험준한 비탈길을 오르는 발걸음과 함께, 곳곳에서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입김.
사시사철 한겨울처럼 춥고 산소가 희박한 대설산(大雪山)의 환경은 이 땅을 지키려는 이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악조건들은 아군에게 더욱 혹독하게 적용될 수도 있었다.
“쿨럭. 흐읍.”
고지대(高地帶)에 진입한 탓일까.
아니면 늙어 버린 육신 때문일까.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가쁘게 호흡하는 남호의 모습에 내가 막 지시를 내리려던 그때, 한발 앞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몸의 긴장을 푸시오.”
툭.
침착한 음성과 함께 명문혈(命門穴)을 짚은 손. 동시에 남호를 중심으로 미약한 기운이 들끓었다.
화아악.
조금씩 창백해져 가던 남호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진다.
명문혈을 통해 주입된 공력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혈색을 되찾은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늙은 게 죄지. 여하튼 도와줘서 고맙…….”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채 흩어지는 음성.
감사를 표하며 막 돌아선 남호가 무심코 말꼬리를 흐리자,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마표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하지만 당황은 찰나였고, 늙은 은영각 요원의 대처는 신속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응? 아니, 문제는 무슨. 그냥 저쪽에서 뭐가 움직인 것 같길래.”
“저쪽?”
남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마표가 고개를 돌린 그때, 때마침 메마른 나무 뒤에 웅크리고 있던 자그마한 그림자가 후다닥 튀어나와 눈밭을 가로질렀다.
“산토끼였군. 걱정할 필요 없소.”
“그런가? 하긴, 여기까지 놈들이 숨어들어왔을 리 없지. 늙으니 걱정만 많아져서 문제라니까.”
능청스럽게 대꾸한 남호가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겨우 이 정도로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걸 보니 늙긴 한 모양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십 년만 젊었어도 선봉에 섰을 텐데. 안 그런가?”
아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반응이 도드라지는 법.
그럼에도 유연하게 감정을 숨긴 남호를 향해, 나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노망나셨어요? 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을 회춘해도 어림없습니다.”
단순히 지금의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해서 한 대답은 아니다.
당장 주위만 둘러봐도 헐떡거리며 대설산을 오르는 이들이 한 무더기였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질보다는 양을 우선시했으니.’
감숙성의 면적이 제아무리 넓다고는 하나 결국은 일개 성.
그럼에도 삼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머릿수를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집 과정에서 수많은 어중이떠중이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코밑이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한 애송이부터, 평생토록 뒷골목만을 전전하다 늙어 버린 삼류 칼잡이까지.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죽여 본 적이나 있을까 싶은 이들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림이라는 이 거대한 바다에서 여타 포식자들의 먹잇감이나 다름없는 잡어(雜語)와 같은 자들.
물론 나는 저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럴 자격도, 생각도 없다.
나도 한때 약자였으니까. 더불어 지금 이 순간조차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약자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는 점은, 머릿수만 부풀려진 이 병력으로 암천의 전력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들 중 과반수는 사파인이지.’
누군가가 그랬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고.
나 역시 그 발언 자체에는 동의한다.
이미 역사가 증명해 주었으니까.
정마대전은 천하 무림이 대통합되는 결정적인 계기였고, 과거 현대의 대격변 당시에는 악명 높던 멕시코 마약 카르텔조차 정부군에 합류하여 몬스터들과 싸웠다.
이렇듯 외적(外敵)의 등장은 어제의 적을 오늘의 아군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저 검은 고양이들의 목에 방울을 단 이가 누구이며 그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흑야왕 사마공.’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은 가장 크고 힘 있는 검은 고양이이자, 작금의 사파 무림을 지배하는 또 한 명의 맹주(盟主).
만약 그가 이미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돈황에서의 대패와 공동파의 몰락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던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 끝에는, 암천(暗天)이라는 새로운 하늘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속으로 뇌까린 나는 힐끗 등 뒤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사마표가 그 찰나의 시선을 느끼고 작게 눈인사를 건네 보였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그 모습에, 커다란 바위가 가슴 한구석을 빠듯하게 짓누르는 듯하던 그때였다.
파스스슥.
수십여 장 밖, 잎사귀 하나 붙어있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이 동시에 몸을 떨더니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뭇가지 사이로 번뜩이는 수백여 개의 은빛 화살촉과 함께.
하지만 찰나의 경계심은, 이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한결 수그러들었다.
“활을 거둬라. 감숙 무림의 형제들이다!”
물론, 그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기. 내 명이 떨어질 때까지 결코 경계를 늦춰선 안 될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는 투박한 갑옷.
투구까지 깊게 눌러쓴 채 중무장을 갖춘 사내의 모습을 본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두 글자가 있었다.
‘군문(軍門).’
사박, 사박.
육중한 갑옷을 걸쳤음에도 표횰한 움직임.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십여 장의 거리를 좁혀온 사내에게 선봉을 맡고 있던 사마공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마공을 스쳐 지나간 사내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물었으니까.
“혹,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허, 무엄하오! 대관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감히 대답을 요구하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내가 한 대답이 아니다.
내가 미처 뭐라 하기도 전, 앞으로 나선 혁무진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손에 든 은패(銀牌)를 번쩍 치켜들었…… 아니, 잠깐만. 저건 언제 또 가져갔지?
“이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산서성의 패자인 대태원진가의 삼공자이며, 대국 황실을 수호하는 금의위 정천호이자,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친히 임명하신…….”
“소관, 감숙성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 부천호(副千戶) 홍표!”
흡사 포효와도 같은 외침이 혁무진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철탑과도 같던 무릎이 굽혀졌다.
쿵.
둔중한 소음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 아니 홍표가 나를 향해 힘찬 군례를 올렸다.
“상산후(上山后)를 배알하나이다!”
“상산후를 배알하나이다!”
서늘한 눈밭을 가로지르는 수백의 외침.
그제야 활과 병장기를 거두고 홍표를 따라 일제히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관군들의 모습에, 혁무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으으. 으읏. 아아아.”
“……뭐냐, 그 이상한 소리는.”
“조장님. 저 쌀 것 같습니다.”
“…….”
싸긴 뭘 싸, 미친놈아.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때,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사마공과 눈이 마주친 나는 작게 입맛을 다셨다.
“무진아.”
“예?”
“그냥 싸라. 시원하게.”
그 순간, 혁무진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싸긴 뭘 싸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
“앞으로는 아랫사람 앞에서 그런 깨는 말 쓰지 마십쇼. 열후로서의 위엄을 유지하셔야지. 안 그러면 천박해 보여요.”
죽이고 싶다, 진짜로.
* * *
감숙성 위지휘사사 부천호라는 긴 직함을 가진 사내, 홍표는 곰 같은 사내였다.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빠꾸가 없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언럭키 정호군이라고 해야 하나.’
한시가 급했던 사정상 뒤에 남겨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금의위 천호 정호군을 떠올려 봤을 때, 홍표는 그와 닮았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된 홍표의 성격을 이토록 단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다름 아닌 사마공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네가 바로 그 소문의 부천호로군. 공무(公務)를 집행함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의 누구보다 철두철미하다는.”
앞서 한 차례 무시당했음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걸어오는 사마공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홍표가 입을 열었다.
“호패.”
“응?”
“호패를 제시하시오. 절차에 따라 신분부터 확인하겠소.”
“……호패를 제시하라니, 설마 내게 하는 말인가?”
순수한 의문이 가득한 물음에, 홍표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혹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인가?”
“재작년 성주님 회갑연 때 먼발치에서 한번 봤소. 내 상관이신 위지휘사 나리께 여쭈어보니, 흑룡마문의 문주라고 하시더군.”
“그렇군. 알면 됐네.”
“되긴 뭐가 된다는 거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본관이 맡은 임무는 이 일대 삼백여 장을 지키고 통행하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 단지 그뿐이오. 상산후께서는 이미 그 절차를 거치셨고.”
별 희한한 사람 보겠다는 듯이 사마공을 응시한 홍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 척 봐도 연배가 있어 보이니 혀가 반 토막 난 것은 이해해 주겠지만, 계속 불응할 시에는 노인장도 재미없을 거요.”
“……!”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고 느낀 것은, 비단 이곳이 만년설로 뒤덮인 대설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마공이 누구인가.
감숙 무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흑룡마문의 문주고, 그가 차지하는 입지와 권세를 따지자면 성주(城主)와 겸상을 하고도 남는다.
한마디로 무림과 관부 양측에 끈끈한 연줄이 닿아 있는 감숙성의 실력자.
한데 그런 그에게 호패 요구에, 노인장 운운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인데, 홍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슥.
“분명히 말했소. 두 번은 없다고.”
나직한 덧붙임과 함께 허리춤에 매어둔 철곤(鐵棍)을 떡하니 꺼내 드는 홍표의 모습에, 사마공은 물론 주위 사람 전부가 할 말을 잃은 그때였다.
“으하, 으하하하! 그렇지, 암, 그게 맞지!”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배꼽까지 붙잡으며 껄껄 웃던 적천강이 홍표를 바라보았다.
“사내라면 응당 본인이 맡은 소임에 충실해야 하는 법. 그래, 네놈의 이름이 뭐라고?”
호의로 가득한 적천강의 물음에, 홍표가 대답했다.
“호패.”
“……으응?”
“그쪽도 호패 준비하시오. 이 노인장 다음은 당신이니까.”
“……!”
“아, 통행증도 같이. 머리카락부터 온통 시뻘건 게 영 수상하기 짝이 없군.”
당장이라도 모두를 질식시킬 것만 같은 침묵 속, 몸을 부르르 떤 혁무진이 개미 울음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장님. 저 진짜 쌀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저 멀리 펼쳐진 새하얀 산등성이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둥, 두둥, 두우웅!
급박함이 담긴 북소리.
전고(戰鼓)의 울림이, 눈 덮인 산맥을 떨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