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5
#1024화
언제나 죽음의 위기를 넘나드는 무림인에게 청각(聽覺)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감각이다.
소리에는 그만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적과 마주한 상태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나면 그건 상대가 암습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나 진배없고, 목소리의 높낮이와 떨림을 통해 심리 또한 읽어 낼 수 있다.
즉 무림인에게 있어 소리란 곧 정보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도 결코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둥, 두둥, 두우웅!
제대로 된 박자도 지키지 않고, 울림의 크기도 다르다.
눈 덮인 산맥 어딘가에서 반쯤 혼백이 빠져나간 얼굴로 그저 온 힘을 다해 북을 치고 있을 고수(鼓手)의 모습을 떠올린 중년인은 뒷덜미를 긁적였다.
“이거, 시작부터 너무 인사가 과했나?”
그의 말에 곳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진 전, 인근에서 맞닥트린 대설산의 척후조 일백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만이 아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한솥밥 먹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니.”
“수급을 주렁주렁 매단 말들이 돌아오니 벌써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도 모르고.”
“하지만 저희로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화왕, 그 노괴(老怪)의 무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퍼엉!
거대한 파공성이 이어지려던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말을 끝맺기도 전, 가슴을 후려치는 막강한 힘을 느낀 노인은 일순간 포탄처럼 튕겨 나가는 신형을 바로잡으며 지면에 착지했다.
아니, 착지하려 했다.
“우읍, 쿠에에엑!”
촤아아악.
입술 사이로 쏟아지는 핏물과 함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몸뚱어리.
끝끝내 내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노인의 모습에, 조금 전만 하더라도 웃으며 맞장구치던 나머지 두 노인이 경직된 얼굴로 중년인을 응시했다.
단 일 수(一手)만에 초절정 고수 하나를 거꾸러트린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쓰러진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힘이 너무 들어갔군. 이보게 삼노(三老), 괜찮나?”
무릎을 꿇은 채 핏물을 토해 내던 노인, 삼노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괜찮, 괜찮습니다.”
“이거 참,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보다, 어때?”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반문하는 삼노를 향해, 중년인이 빙긋 웃어 보였다.
“화왕, 그 늙은이에 비하면 어떤가 물어본 걸세.”
“……!”
“왜, 영 아닐 것 같은가? 하기사 자네들도 화왕에 대해 잘 모르니 쉽게 답할 수 없겠군. 오래전 먼발치에서 한번 본 것이 전부였다고 했지 아마?”
세 명의 노인을 차례대로 훑어본 중년인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괜한 것을 물었군. 쥐새끼처럼 도망쳤으니 알 도리가 없겠지.”
피와 살 대신,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무림인에게 이처럼 모욕적인 언사가 또 있을까.
그러나 세 노인, 천산삼노(天山三老)는 말없이 신형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
틀렸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찌 삭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늙은 육신과 마음에, 중년인을 향한 분노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세 노인을 쇠사슬처럼 옭아매고 있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심기를 거스르는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살수(殺手)를 내뻗고, 마치 당장이라도 짓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를 대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
눈앞의 중년인에게는 그럴 만한 힘과 자격이 있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 속하들이 부족한 탓입니다.”
“이 멍청한 늙은이가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어찌 감히 화왕 따위가 마군(魔君)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때 마교의 깃발 아래서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천산의 세 악귀는 앞다투어 부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중년인, 혈검마군(血劍魔君)의 손에 당장이라도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는 혈검마군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
‘한심한 것들 같으니. 고작 이런 놈들로 천하를 도모하려 했단 말인가.’
혈검마군의 비웃음은 비단 천산삼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때 그가 따랐던, 그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한 사람을 향한 조소이기도 했다.
‘당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소, 교주(敎主).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가 스스로를 하늘에 빗대었으니.’
천마(天魔).
대대로 내려오는 그 칭호를 물려받아, 십만마도의 하늘이자 왕으로 군림했던 그를 떠올리며 혈검마군은 실소를 흘렸다.
이제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실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그 정도의 인물을 믿고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
천 년에 달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어떤 천마도 이루지 못했던 마도 천하를 꿈꾸었다는 것이.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는 실패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새로운 하늘을 받아들였다.
천주(天主)라 불리는 새로운 하늘을.
진정한 주인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저 대설산의 적들도, 머지않아 자신과 함께 천주를 섬기게 되리라고 혈검마군은 굳게 믿고 있었다.
설령 저들이 격렬히 거부하고, 저항하고, 끝끝내 죽음을 택하더라도 이 결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분의 그늘에 몸을 의탁하게 될 터.’
잔잔한 웃음을 흘린 혈검마군은 문득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드득. 드드득.
서리 낀 초목(草木)을 짓밟으며 대설산을 향해 진군하는 수만의 대군.
그들의 선두에는 칠흑처럼 새카만 흑의를 걸친 일곱 명의 괴인과, 그에 상반되는 수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있었다.
“자네들의 우려가 큰 듯하니, 내 한 가지 알려 주지.”
불현듯 입을 연 혈검마군은 천산삼노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작 화왕 따위로는, 결코 우리를 막을 수는 없어.”
이것은 자신감이 아니다. 확신이다.
옥문관을 넘을 때도, 종남파가 지키던 돈황을 단숨에 즈려밟았을 때조차도 내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전력에 대한 확신.
물론 천산삼노 역시 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일세를 풍미했던 대마두인 그들조차 불길함을 느끼게 만드는 저들의 정체가, 결코 범상치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도대체 뭐지?’
‘저들의 이름도, 별호도 알려 주지 않았다. 한데 어찌 저렇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다. 그저 따르는 수밖에.’
그저 조용히 의문을 삼킬 뿐.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천산삼노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찬 혈검마군은, 이내 대설산에서의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놈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라.”
“사자라고 하신다면.”
“앞서 인사치레는 해 두었으니, 투항을 권유하는 자비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천산삼노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조용히 뒷말을 삼킨 혈검마군은 이내 빙긋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꼭 보고 싶은 얼굴도 있고.’
과거의 적이자, 각기 다른 전장에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싸웠던 화왕 적천강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혈검마군이 마주하고 싶은 것은 구화산의 노괴가 아니라 그의 제자였다.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주인에게 뜻 모를 관심을 받고있는 정파 무림의 젊은 거인.
만약 마주치게 되더라도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는, 필요 이상의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혈검마군의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쏠려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혈검마군의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 * *
일백.
대설산의 척후조 일백 명 중,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두 시진 전,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떠났다는 그들은 한 몸이 되어 돌아왔다.
말안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급(首級)으로.
“사, 사매.”
“안 돼. 안 돼!”
곳곳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진다.
척후조에 포함되어 있던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슬픔과 분노를 토해 냈고, 잔인한 광경에 익숙해져 있던 화룡각 대원들조차 이를 악물었다.
“이건…….”
미처 말을 잇지 못한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수급을 살피던 나는 적천강과 시선을 교환했다.
“보셨어요?”
“그래, 모두 일검(一劍)에 베였다. 게다가 상흔이 전부 일정해.”
“그렇다는 건…….”
“한 사람이 소행이라는 뜻이지. 노부도 지금껏 몇 번 본 적 없는, 실로 무시무시한 검공(劍功)이다.”
죽음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척후조들의 수급에 난 단면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하면서도 예리했다.
적천강조차 저리 평가할 정도라면, 최소 십왕(十王)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고수가 저들을 몰살시켰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건.”
문득 말을 멈춘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모르겠군. 분명 이와 비슷한 상흔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적천강은 고심을 거듭하며 기억을 더듬는 듯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의 정체가 아니다.
저 멀리에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피워올리며 다가오고 있는, 끔찍하리만치 많은 적들이었다.
아직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당장 언덕을 쏟아져 내려오는 숫자만 헤아려보아도 물경 이만.
족히 수백여 장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어마어마한 군세가 일제히 내뿜는 기세와 살기에, 척박한 대설산에서 살아가던 날짐승들조차 황급히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를 정도였다.
“제기랄. 진짜였어. 내가 본 게 진짜였다고. 저 악귀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반 인질이 되어 여기까지 끌려온 백마칠종(白馬七宗) 대형, 마중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벌벌 떨고 있는 그의 손에는 망원경, 아니 무림에서는 십리경(十里鏡)이라 불리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미친. 말로만 듣던 십만마도(十萬魔道)라니. 끝장이야. 이제 전부 다 끝장…….”
“주둥이 닥치쇼. 그쪽부터 끝장나기 싫으면.”
한 마디로 마중걸의 입을 다물게 만든 혁무진이, 그가 들고 있던 십리경을 빼앗으며 내게 속삭였다.
“조장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놈들이 목전까지 치달은 이상, 남아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전투.
아니, 혈투(血鬪).
한번 솟구친 불길은 온 들판을 다 불태우고 나서야 끝난다. 사막으로부터 시작된 암천이라는 불길은 대설산에 다다랐고, 우리는 그것에 맞서 맞불을 놓을 것이다.
‘그렇게 온 사방이 피로 물든 후에야 끝이 나겠지.’
물어본 혁무진도, 그 물음에 대답한 나도, 그리고 목숨을 건 대전투를 준비하는 대설산의 모두도 알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아무도 이 전투의 결말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미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저 멀리서 흑룡마문의 무인들을 진두지휘하는 사마공을 힐끗 바라보았다.
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산맥 아래를 응시하고 있는 사마표 역시도.
그리고 다음 순간 알게 되었다.
사마표의 얼굴이 굳어 있던 이유가, 전투의 긴장감 혹은 녀석이 감추고 있는 어떠한 비밀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온다.”
나직한 그 한마디에 고개를 돌린 나는 볼 수 있었다.
어느덧 언덕을 넘어 산밑을 새카맣게 물든 수만의 대군세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는, 새하얀 백기를 치켜세운 일단의 무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