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98
#197화
벌모세수(伐毛洗髓).
털이 빠지고 근골을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이 수법은 유서 깊은 명문 대파에서나 실행되는 시술이다.
공력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근골을 다듬고, 신체 내부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함으로써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체질로 바꾸는 것이다.
벌모세수는 여러 번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그 조건과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는 데에 있다.
적천강의 설명을 들은 내가 물었다.
“많이 까다롭나요?”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신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일인데 쉽고 간편할 리가 있겠느냐? 그럼 세상천지에 고수 아닌 놈이 없지.”
그건 그렇네.
일반인이 복근에 식스팩 하나 새기려면 몇 달을 이 악물고 운동해야 한다.
아예 근골과 체질을 바꿔 버리는 벌모세수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벌모세수를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엄청 까다롭다더니 겨우 세 가지?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어지는 적천강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첫째. 이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닌 내가고수.”
“……어우.”
시작부터 난이도 빡센 것 보소.
이 갑자면 자그마치 백이십 년이다. 과연 천하에 저 정도의 공력을 지닌 이들이 얼마나 될까?
분명 극소수일 것이고 눈앞의 적천강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가 주름진 손가락을 두 개 들어 올렸다.
“둘째. 금력.”
“금력은 왜요?”
“시전 대상이 흡수할 영약을 구해야 하니까. 시전자는 대상의 신체 내부에 가득 차 있는 기를 인도하고 순환시켜야 한다. 방법은 문파마다 다르지만 천금이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가 아니면 힘들겠네요.”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어렵다. 백무성이라고 했던가? 화산 어쩌구 하는 그놈은 벌모세수를 받은 것 같더군.”
이건 말 그대로 투자다. 미래가 기대되는 문파의 유망주들을 선별하여 벌모세수를 실시하는 것이다.
백무성 정도의 우량주라면 화산파에서도 투자할 가치가 있었겠지.
“그럼 혹시 청풍도?”
“검성이 보고만 있었겠느냐? 아주 어릴 때부터 조금씩 다듬었겠지.”
젠장, 나만 못 받았네.
태원진가 정도라면 무림에서도 은수저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벌모세수를 쌍꺼풀 수술처럼 받는 다이아 수저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뭡니까?”
“인내.”
“예?”
“벌모세수는 타고난 근골과 체질을 바꾸는 수법이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다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지.”
“어느 정도로 아픈데요?”
적천강이 딱 잘라 말했다.
“죽을 만큼 아프다.”
“……죽을 만큼이요?”
“실제로 죽기도 하고.”
“헉.”
“사천당문(四川唐門)에서는 항아리에 천여 가지 독물을 가득 채운 다음…….”
적천강의 말이 이어질수록 위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내가 물었다.
“그, 그건 사천당문에서만 그렇게 하는 거죠?”
“물론이다. 본문의 비전은 따로 있지.”
“혹시 천여 개의 장작을 가득 쌓은 다음 그 위에 올라가서 불을 붙이라거나…….”
“…….”
“아닌가 보네요. 죄송합니다.”
“네놈은 도대체 본문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고리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모세수는 하루아침 만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공력으로 근골만 바로잡아 줄 테니 후에 영약을 처먹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라.”
“아, 네.”
그러고 보니 지금 적천강은 빈손이다. 제대로 벌모세수를 하고자 했다면 영약을 비롯해 필요한 여러 가지를 챙겨 왔을 것이다.
“그럼 옷 벗을까요?”
“한 번만 더 물어보면 가죽까지 벗겨 주마.”
걸치고 있던 옷들을 빛의 속도로 벗어 던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알몸을 샅샅이 훑던 적천강의 눈빛이 묘해진다.
“이건…….”
“네?”
“아, 아니다. 아무것도.”
뭐지?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는데.
저 노인네가 왜 저러나 생각하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씩 웃었다.
“에이, 다 아는 사람들끼리 뭘 그러십니까.”
“……?”
“사실 이 정도 크기가 절대 흔한 게 아니거든요. 저도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요. 혹시 아마존 아세요? 거기 블랙 아나콘다라는 게 있는데. 막, 확. 그냥 아주. 어후.”
“……!”
“놀란 마음을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만져 보시는 건 안 됩니다. 아셨죠?”
쉭, 빡!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불끈 움켜쥔 주먹이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 * *
띠링.
– 상태 이상, [기절]이 해제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과 함께 정신을 차린 나는 낯익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시바, 그냥 안 만진다고 하면 되지 왜 사람을 때려.”
그렇게까지 만지고 싶었나. 너무 단호하게 거부해서 마음이 상한 건가.
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는 미처 읽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가 둥둥 떠 있었다.
“어라? 벌모세수가 끝났다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적천강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사이에 벌모세수를 뚝딱 끝내고 떠난 모양이다. 이런 메시지가 뜬 걸 보면.
– [벌모세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 [근골], [근맥]이 5씩 상승했습니다.
– [근력], [체력], [민첩]이 1씩 상승했습니다.
“오…….”
힘 빠진 감탄이 흘러나온다.
분명히 좋다. 확실히 전보다 나아지긴 했다. 이 정도면 레벨 업 한 번에 꾸준한 수련을 해야 얻을 수 있는 효과다.
그런데…….
“겨우 이게 끝?”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한 법.
아무리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약식으로 이루어졌다지만 벌모세수는 벌모세수다.
뭔가 대단한 효과를 예상하고 있던 나는 실망을 넘어 당황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뭐지.”
무협 소설에서는 거의 치트키 수준으로 나오던데.
환골탈태, 벌모세수. 이 두 가지는 주인공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나 다름없다.
약해 빠져서 골골거리던 놈도 저 두 개면 깡패로 돌변해서 무림을 휘젓고 다녔었다.
근데 나는 왜 이래.
“이거 너무 대충해 준 거 아냐?”
투덜거리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더니 혁무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들어가도 되겠…… 헉.”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걸치며 말했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데, 이상한 생각 하면 뚝배기 깨 버릴 거야. 참고로 뚝배기는 머리다.”
“그럼 왜 알몸이세요?”
“그 늙은이가 몸을 좀 봐 줬어.”
“몸을요. 굳이 홀딱 벗고.”
“……어째 말이 묘하다, 너.”
움찔한 혁무진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까 마주친 적 대협 표정이 워낙 심상치 않아서 무슨 일 있나 와 본 거예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고?”
“얼굴이 잔뜩 굳어 계시던데요. 뭔가에 놀란 사람 같기도 하고,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
“예.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일 정도로요.”
“왜?”
“그야 저도 모르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 * *
적천강은 상념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사방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진태경.’
고작 며칠 사이에 그에 대한 평가가 여러 번 바뀌었다.
재미있는 놈에서 사문의 비급을 태워 먹은 괘씸한 놈.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진태경의 벗은 몸을 본 순간, 적천강은 생각했다.
‘묘한 놈일세.’
겉으로 보기에도 진태경의 근골은 뛰어났다. 이런 변방에서 썩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옷에 감춰져 있던 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니 생각 이상이었다.
‘이토록 균형 잡힌 몸이라니.’
사람의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지만, 균형은 또 다른 문제다.
평상시의 자세, 의식주에 관련된 사소한 습관 하나가 그 균형을 어그러트리기 때문이다.
우수검(右手劍)을 사용하는 검객이라면 오른팔에 붙은 근육이 더 많고 근력도 강하다.
그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데 진태경은 아니었다.
‘……뭐냐, 이놈은.’
뼈의 길이, 각도. 근육의 형태와 모양.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전지전능한 미지의 존재가 텅 빈 화선지에 진태경의 절반을 그린 다음 접어서 펼친 것처럼.
‘혹시 어릴 적부터 꾸준히 벌모세수를? 아니야, 이건 벌모세수로도 불가능하다.’
과거 적천강은 근골이 떨어지는 장천을 위해 많은 고심과 연구를 거듭했었고, 마침내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아 벌모세수를 실시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벌모세수에도 한계가 있다.’
사람의 몸에 완벽한 균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천금이 아니라 만금을 들여도 미세한 결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진태경은 달랐다.
적천강은 의식을 잃은 그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무르고 만졌다.
질기고 탄력 있는 피부. 겉과 속을 가득 채운 힘을 느꼈고, 신체 내부로 공력을 흘려보내 넓고 튼튼한 근맥(筋脈)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경악했다.
‘어찌 이런 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완벽하다. 말로만 듣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으면 이렇게 될까 싶을 정도였다.
적천강은 지금까지 몇 명의 초절정 고수를 만났고 그중에는 검성 매종학이라는 불세출의 고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까지 그가 본 근골 중에서는 진태경이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호, 혹시…….’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던 적천강은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림에는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전설처럼 전해지는 말들이 있다.
수백 년, 혹은 천 년에 한 번씩 하늘의 변덕으로 탄생한다는 천무지체(天武肢體) 또한 숱한 전설 중 하나였다.
‘천무지체라니. 내가 미친 게지.’
하지만 진태경의 몸을 보면 볼수록 의심은 깊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신체는 손 볼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벌모세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요식행위를 마치고 나자 고민이 깊어졌다.
‘저 녀석이 만약 천무지체라면. 지금보다 더욱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영약을 흡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전각을 빠져나온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천강의 마음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욕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저 녀석을 가르친다면?”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중얼거림에 적천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자라니?
하나뿐이었던 제자는 문파를 배신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새로 제자를 들이다니.
더군다나 자신은 백 세를 넘긴 데다 노환으로 이미 정신이 흐려진 상태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매종학, 그 친구라면 좋은 인재를 찾아 본문의 맥을 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적천강은 태원진가를 떠나는 대로 검성 매종학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강한 무공에 사사로운 욕심도 없는 그에게 열화문의 후계를 맡기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생각이란 말이냐. 적천강, 이 멍청한 놈. 미련한 놈아.’
적천강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적 대협.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의바른 목소리의 주인은 엄청난 덩치의 거한, 진위경이었다.
마침 진태경을 떠올리고 있던 적천강이 흠칫했다.
“으, 응?”
어느덧 태원진가에 머무르기 시작한 지도 사흘째.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진위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
“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다행입니다만.”
적천강이 먼 산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노부는 아무 문제 없네. 정말 괜찮으니까 볼일 보게.”
“저어, 혹시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없다니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갈 길 가게.”
“……저, 적 대협?”
“아, 왜!”
결국 폭발한 적천강의 외침에 진위경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적 대협께서 계신 곳이 제 집무실 앞입니다만.”
“…….”
“차라도 한잔하며 얘기 나누시겠습니까?”
잠깐 침묵하던 적천강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커흠. 차 말고 술로 주게.”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만큼은 정직한 적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