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96
#295화
윤기가 흐르는 갑옷. 날개처럼 휘날리는 암녹색 망토와 텅 빈 동공에 타오르는 보랏빛 귀화(鬼火).
그리고…… 목소리가 있었다.
– 내려. 와라. 인. 간.
쇠를 긁는 듯한 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말을 했다고?’
지금 같은 일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처치했던 와이번, ‘외눈박이 카루스’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몬스터가 말을 한다는 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임드 몬스터…….”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마디.
맞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네임드 몬스터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네임드 몬스터가 내 눈앞에서 탄생했다.
아니, 탄생이 아니라 ‘진화’했다.
[Lv.105 스켈레톤 워로드]진화라니. 네임드 몬스터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고는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니, 이게 무슨 디지몬도 아니고.’
몬스터가 그 몬스터였나? 이거 진화도 있는 거였어?
이미 평범한 인생에서 오백 광년 쯤 멀어진 나도 당황스러울 지경인데, 다른 길드원들의 반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뭐야, 저거.”
“아니, 방금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저런 건 몬스터 백과사전에서도 못 봤는데…….”
그거야 당연하지.
네임드 몬스터는 변이종이다. 각 개체가 지닌 특성도, 힘의 차이도 다르다. 출몰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냐.’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 스켈레톤 워로드라는 놈이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지만, 네임드 몬스터에 걸맞은 힘을 지녔음은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A급 몬스터인 스켈레톤 나이트가 둘.’
남은 150여 마리는 전부 B급 몬스터인 스켈레톤 메이지, 혹은 워리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의 군대나 다름없는 놈들이라 까다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우두머리인 워로드와 핵심 전력인 나이트 두 마리를 내가 맡는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레이드를 돌렸으니까.’
지금 게이트 안에 들어와 있는 길드원들은 불과 오십 명.
하지만 그중 과반수가 내 채찍질을 버티며 지옥 특훈을 겪은 도사견들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스켈레톤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상대했으니 침착하게만 대응한다면 두 배, 세 배의 머릿수도 감당할 만하다.
‘새로 들어온 신입들도 기본 능력은 출중하고.’
대형 길드 이상의 급여를 지급하는 만큼 최고들로만 뽑았다.
이번에는 나도 직접 면접을 포함한 여러 심사에 참여하여 성장 가능성까지 점수를 매겼다.
아레스 길드라는 태풍을 버티기 위해 최상의 묘목(苗木)들만 골라 평화 길드의 앞마당에 옮겨 심은 것이다.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겠지만 붙어 볼 만해.’
최 팀장을 포함한 네 사람은 길드 내 업무도 대부분 중지하고 진가 심법의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태.
그들이 있었다면 훨씬 쉬운 전투가 되었겠지만, 설령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투입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매 안에 숨긴 비수는 숨겨져 있기에 치명적이다.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드러낼 수는 없다.
생각을 끝마친 나는 한 사람을 불렀다.
“진수야!”
“옙!”
사실상 부팀장 역할을 수행 중인 김진수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한다. 나는 손에 든 단검으로 스켈레톤 워로드를 가리켰다.
놈의 뻥 뚫린 동공에 맺힌 녹색 귀화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거, 네임드 몬스터다.”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길드원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저 중 대부분이 헌터가 된 지 2년도 안 되는 초짜들이다. 이 바닥에서 20년을 버텨도 마주치기 힘든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게 됐으니 표정에서부터 긴장감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러나 김진수는 달랐다. 놀란 표정도 잠시, 이내 녀석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쭈. 제법 태연한 척하는데.”
“사실 저도 좀 당황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수만은 없잖습니까.”
이놈 봐라?
처음부터 간덩이가 큰 건 알고 있었지만, 1년 차답지 않은 담대함이다.
그런 내 눈빛을 느꼈는지 김진수가 슬쩍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선배님께서 진작 후퇴 신호를 보내셨겠죠.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흠.”
“……어, 제가 혹시 헛짚은 겁니까?”
“아니.”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이 맞아. 이거 해볼 만한 싸움이다.”
“아.”
“내가 저기 있는 세 놈. 나머지는 너희가 맡는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
김진수가 짧은 생각 끝에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들이 경험이 없어서…… 그래도 한 시간은 버틸 겁니다.”
“한 시간?”
“예. 최소 한 시간입니다.”
김진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그 순간, 천천히 아가리를 벌린 스켈레톤 워로드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공명음을 토해 냈다.
– 그. 아. 아. 아. 아!
삐빅!
– [Lv.105 스켈레톤 워로드]가 특수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 특수 스킬, [망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 잠들어 있던 망자들이 사령관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건 등골이 오싹해지는 함성이었고, 동시에 저주받은 망자들을 깨우는 외침이었다.
투둑, 투두두둑!
흙이 솟구치고 땅이 울렸다. 곳곳에서 허연 해골 무더기들이 일어나 형체를 갖추고 무리에 합류했다.
흙이 묻은 골검과 잔뿌리가 묻은 나무 방패. 스켈레톤 워리어 사이사이로 해골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찬 메이지들도 보인다.
심지어 A급 몬스터인 나이트까지 두 마리가 늘었다.
기존 스켈레톤 부대에 새로 등장한 놈들을 더하니 그 수가 무려 300마리를 훌쩍 넘겼다.
“…….”
“…….”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가 입을 뗐다.
“진수야.”
“예.”
“한 시간, 가능하냐?”
“어, 음.”
“솔직히 말해 봐.”
“……30분 정도는 될 것 같은데요.”
“그래?”
“네. 상황이 좀 안 좋아지긴 했는데, 아마 될 겁니다.”
김진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스켈레톤 워로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자식이 헛짓거리만 더 안 하면요.”
“할 것 같은데.”
“설마요.”
– 그. 아. 아. 아. 아!
“봐봐. 내 말이 맞지?”
김진수가 탄식했다.
“아, 제발.”
삐빅.
– [Lv.105 스켈레톤 워로드]가 특수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 특수 스킬, [사령관의 고무]가 발동되었습니다!
– 스켈레톤 워로드의 지휘 아래 놓인 몬스터들의 힘과 민첩, 마법이 강화되었습니다!
– 적들의 기세가 크게 오릅니다!
스켈레톤 워로드가 울부짖었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이야…….”
[기감]을 사용해서 보니 단 한 놈도 빠짐없이 레벨이 5씩 상승한 것이 보인다.300마리가 넘는 스켈레톤 군대가 내뿜는 기세 또한 그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반쯤 넋을 놓고 있는 김진수가 있었다.
“30분, 가능?”
“…….”
이 자식이 이제는 눈으로 욕하네.
하긴, 저건 내가 봐도 무리긴 하다. 혀를 찬 나는 망설임 없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천천히 물러나. 놈들 자극하지 말고.”
“어디까지 물러나면 됩니까?”
“게이트 바로 앞 오솔길.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게.”
“오솔길이 좁으니 상대하기도 쉽겠군요.”
“그렇지.”
김진수의 말대로 게이트 앞 오솔길은 성인 남성 다섯이 어깨를 나란히 해도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비교적 몸집이 얇을 수밖에 없는 스켈레톤이라고 해도 일곱, 여덟이 한계다.
그러나…….
“그대로 빠져나가.”
내가 수정한 계획에 놈들과의 전면전은 없다.
“네?”
“애들 데리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라고.”
내 말을 들은 김진수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럼 선배님께서는…….”
“너희가 가는 동안 쟤들은 술래잡기하고 있겠니? 누군가는 시간을 끌어야지.”
“선배님! 그건 위험합니다!”
“진수야. 아니, 친애하는 평화 길드원 여러분.”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기 새처럼 목을 쭉 빼고 나를 올려다보는 오십 명의 길드원들이 보인다.
“나는, 우리 평화 길드는 길드원들의 안전을 늘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도사견 중 몇몇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 들어 본 개소리 중에 저게 최고다.”
“일주일 동안 일곱 번쯤 죽을 뻔했던 것 같은데.”
“난 열 번 정도.”
반면 입사 1일 차 댕댕이들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선배님!”
“아아, 시벌좌!”
“저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는 애끓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제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몇몇이 격동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저희는 싸울 수 있습니다!”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 지금 같은 경우에서는 제가 나서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도……!”
쉬이이잉! 서걱!
누군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불길한 흑색 오러가 날아들었다.
높이 수십 미터. 둘레의 길이만 수 미터에 이르는 아름드리나무를 횡으로 잘라 버린 스켈레톤 워로드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 모. 조. 리. 죽. 여. 주. 마!
스슥, 탁!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내가 외쳤다.
“모두 게이트로 돌아가십시오! 후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번에는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300여 마리가 넘는 스켈레톤 군대가 전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달그락. 쿵. 달그락. 쿵.
오와 열을 맞춰 이동하는 몬스터들의 기세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워로드의 특수 스킬로 강화된 놈들의 걸음에는 힘이 넘쳤고 뻥 뚫린 해골에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 그아아아아!
부대장 격인 스켈레톤 나이트가 흉성을 내지르자 녹이 슨 화살과 공격 마법이 후미에서 솟아올라 평화 길드원들을 향해 쏘아졌다.
쉬쉬쉬쉭! 후웅!
“막아!”
“탱커! 방패 내리지 말고 이대로 천천히 물러난다!”
“견제 사격 실시!”
두 부대의 거리는 약 삼백 보. 안전하게 후퇴를 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더 벌려야 한다.
나는 백염을 휘두르며 놈들의 선두를 막아섰다.
“이놈들! 감히 우리 소중한 평화 길드원들을!”
쐐애애액! 콰드득!
힘이 실린 창대가 뼈를 부수고 투명한 창날에서 뻗어 나온 창기가 사방을 베었다.
단번에 열 마리를 해치운 그때, 스켈레톤 나이트 셋이 한 번에 짓쳐 들었다.
– 그어어어!
– 그아아아아!
쉬이이익!
세 줄기의 흑색 오라가 아슬아슬하게 몸 곳곳을 스친다.
풍압에 베인 목덜미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자, 이미 오솔길로 접어든 길드원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선배님!”
“위험해!”
카카카카캉!
나는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오라를 튕겨 내며 힘겹게 외쳤다.
“가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진수야! 어서 가!”
갈등하던 김진수가 길드원들을 게이트로 인도하며 외쳤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죄송합니다, 선배님!”
“괜찮아. 어서 가!”
“크흑!”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김진수의 뒷모습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솔길에 빽빽하게 들어선 수백의 스켈레톤과 나뿐이다.
– 어. 리. 석. 구. 나.
처처척!
홍해처럼 갈라지는 뼈다귀들의 틈새로 스켈레톤 워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 죽. 기. 를. 각. 오. 했. 나. 인. 간?
하지만 나는 놈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매의 눈으로 주위를 샅샅이 훑어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드디어 다 갔네.”
– ……?
“애들이 쓸데없이 감수성이 풍부해. 팀장이 가라고 하면 냉큼 튀어야지. 돕긴 뭘 도와. 안 그래?”
나는 목덜미에 묻은 핏물을 닦아 냈다. 나름 조절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깊게 베였다. 한 0.2cm 정도?
“아 씨. 피 아깝게.”
워로드의 보랏빛 귀화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 도. 대. 체. 무. 슨. 꿍. 꿍. 이. 지?
“뭐, 별건 아니고.”
좁은 오솔길을 빈틈없이 메운 경험치, 아니 스켈레톤 부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너희는 여기서 다 뒈진다. 뭐 그것만 알면 돼.”
– 뭐. 라. 고?
나는 대답 대신 깊이 심호흡했다.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열화신공의 구결에 따라 단전에 똬리 튼 화룡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에 쥔 창대와 하나가 되어 쏘아졌다.
“일섬.”
콰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