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0
#39화
“아.”
눈을 깜빡였다. 덥고 습하다. 숨을 내뱉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머리를 더듬자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VR 헬멧.’
그대로 벗겨 내자 먼지 낀 캡슐 내부가 눈앞에 있었다.
쿠션이 꺼진 낡은 캡슐 의자에 앉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현실이라고? 정말?’
꼭 30일 만의 로그아웃. 문득 두려움이 솟구쳤다.
여기가 정말 현실일까? 저 버튼을 누르고 캡슐이 열렸을 때,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지는 않을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상태창 오픈.”
적막이 찾아왔다.
익숙한 알림도, 시스템창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로그아웃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캡슐 문이 열렸다. 텁텁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허.”
어둡고 좁은 방 안. 책상 위에 올려 둔 소형 TV와 침대 하나. 그리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잠들어 있는 한 사람.
“크허어. 크허어어.”
저 괴상한 코골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돌아왔어. 현실로.’
기억 속 그대로다. 지난 30일간의 기억이 꿈인 것처럼.
한동안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던 나는 진호 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목젖을 손날로 후려쳤다.
빡!
“크허어…… 컥!”
이 인간 코골이만 아니었어도 캡슐로 기어들어 갈 일은 없었다. 나는 발버둥 치는 진호 형을 꽉 붙잡았다.
“한 대만 더 맞자. 아니, 두 대만.”
빡! 빡!
“컥! 커허억!”
* * *
“다 알 만한 사람들이 그래. 그것도 고시원 총무라는 양반이.”
“……죄송합니다.”
“얼굴 붉힐 일 없게 합시다. 응?”
쾅.
문이 닫히자 진호 형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미쳤냐?”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선수를 쳤다.
“미리 말해 두는데, 정당방위였다.”
“뭔 개소리야. 너 돌았어?”
“지극히 정상이지.”
“근데 왜 잘 자는 사람 목을 치고 지랄……!”
쿵쿵쿵.
옆방 아저씨가 벽을 두드렸다. 박자와 강도로 보아 ‘널 죽이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호 형이 목소리를 낮췄다.
“왜 지랄이야? 그것도 이 새벽에.”
“새벽?”
“그래, 이 미친놈아. 이제 겨우 세 시야.”
진호 형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7월 25일. AM 3:02.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겨우 세 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무림에서 한 달. 딱 30일을 지냈는데 현실에서는 고작 세 시간이 흘렀다니.
“……형.”
“말 시키지 마. 목 아파.”
“보통 게임 캡슐 시간 배율이 어느 정도지?”
“홍길동 같은 놈이네, 이거. 대화 주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 아주.”
“어느 정도냐고.”
“어?”
굳은 얼굴로 묻자 잠깐 당황하던 진호 형이 대답했다.
“지난달에 나온 최신형 캡슐이 오 대 일? 아마 그럴걸.”
“그 오 대 일이 정확히 뭔데?”
“뭐긴. 게임 체감 시간이 다섯 시간이면 현실에서는 한 시간 흐른 거지.”
미치겠네.
“그 이상은?”
“없어. 지금 기술력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보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다시 봐도 낡아 빠진 캡슐. 만들어진 지 20년도 넘은 저 고물은 현재의 기술력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30일 동안 겨우 세 시간이라니. 시간 배율로 따지면 도대체 어느 정도냐. 정신이 없어서 계산도 안 된다.
“골 때리네.”
“뭐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진호 형이라면 뭐라도 답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한 달 전에, 아니 세 시간 전에 저 캡슐로 들어갔는데…….”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할 말도 많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진호 형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한마디를 던졌다.
“골 때리네.”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저거 불법 개조 캡슐, 뭐 그런 거 아냐?”
“아니, 캡슐 말고. 너.”
“응?”
진호 형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깔끔하게 사과해, 그냥. 미안하다.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때렸다. 쿨하게, 이 자식아.”
“…….”
“뭐, 로그아웃이 안 돼서 한 달 동안 목숨 걸고 버텨? 소설을 써라, 아주.”
그래, 왠지 잘 풀린다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라니까.”
“자, 태경아.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진호 형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어떤 놈이 잘 자는 사람 목젖 때려서 깨우더니, 한 달 동안 게임 속에 갇혀 있었대. 근데 시계 보니까 세 시간 지났네? 캡슐은 박물관에 들어가도 되는 고물이네?”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 알아, 이해해. 근데…….”
“어, 그럼 나 좀 이해해 주라. 숙취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목젖도 아프고 널 보는 내 마음도 아프다.”
“아니, 내 얘기를 좀 들어 보라고!”
쿵쿵쿵쿵.
옆방 아저씨가 벽을 때려 부수기 전에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형이 직접 해 봐.”
“뭐?”
“형이 해 보면 믿을 거 아냐.”
직접 겪어 보는 것만큼 빠른 게 없다. 10분쯤 후에 꺼내 주면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진호 형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그럼.”
그러더니 캡슐로 몸을 집어넣고 VR 헬멧까지 썼다. 헬멧 안에서 쉰내가 난다고 투덜거리는 진호 형에게 말했다.
“금방 꺼내 줄게. 홍화루에 처박혀 있어.”
“홍화루 같은 소리 하네. 캡슐 문이나 닫아.”
잠시 후 마주할 진호 형의 표정이 궁금하다. 나는 캡슐 문을 닫고 핸드폰을 꺼내 스톱워치 기능을 켰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숫자가 빠르게 솟구친다.
‘1초, 2초…… 10초.’
현실에서 10초면 게임 속에서는 분, 시간 단위일 거다.
지금쯤이면 홍화루에서 사태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을…….
덜컹.
“어?”
문이 열렸다. 뭐야, 왜 벌써 나와? 아니, 어떻게 나와?
당황한 나를 보며 진호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뭐 하냐?”
“어, 어?”
“전원도 안 들어오는데 뭔 게임을 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원이 안 들어온다고?”
“비켜 봐.”
어어, 하는 사이에 문을 열고 나온 진호 형이 캡슐 아래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뭔가를 집어 올렸다.
“넌 이게 뭐로 보이냐?”
코드다. 뽑혀 있는 전기 코드.
헛것을 봤나, 맹렬한 기세로 눈을 비볐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게 왜…….”
“태경아. 진태경아. 이 가엾고 딱한 자야.”
진호 형이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날 밝는 대로 정신병원 가라. 난 내 방 간다.”
전기 코드를 툭 던져 놓고 떠나는 진호 형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전기 코드도 안 꽂혀 있었다니.
‘그럼 내가 했던 게임은 뭐야.’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미친 건가?’
전기 코드도 안 꽂혀 있던 캡슐로 30일간 게임을 했다니.
진호 형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전부 사실이야.’
진위경, 월화, 혁무진과 대장로. NPC들의 얼굴 하나하나, 그들의 말투와 행동들을 기억한다. 결코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었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답은 하나다. 27년 전 만들어진 게임 캡슐. 오래전에 현역 은퇴하고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 저 고물이 문제다.
게다가 만들어진 시기도 수상쩍다. 2020년 1월 1일.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인류의 손에 쓰러진 날.
‘그때 캡슐 만드는 놈들이 어디 있냐고.’
5년의 대전쟁으로 인해 억 단위의 사람이 죽어 나가고 몬스터가 도심을 활보하던 시대다.
마왕이 쓰러졌다는 뉴스 속보에 ‘자, 이제 게임 캡슐 만듭시다!’ 하고 공장 돌리는 새끼들은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때는 인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몸이 굳었다. 인쇄?
‘제품 사용 설명서!’
그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니, 이런 멍청한 놈.
나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뒤엎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 밑에서 낯익은 소형 책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품 사용 설명서]제품명 : 가상현실 접속기
모델명 : Ark – 2020
제조사 : H 소프트
제조일 : 2020년 1월 1일
그리고 다음 페이지.
[주의사항]– 플레이어 임의로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 플레이 도중 사망 시, 부활할 수 없습니다.
한 달 전, 아니 세 시간 전에는 여기서 책자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주요 기능]–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형 캡슐! 사용자 등록 시 캡슐이 영구 귀속되며, 이는 사망 전까지 유효합니다.
– 쾌적한 플레이를 위한 시간 배율 조정! 로그인 시 현실의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캐릭터와의 동기화 시스템! 사용자는 캐릭터와 동기화됨으로써 더 큰 일체감을 느낍니다.
“뭐야, 이게.”
눈을 글자를 읽었는데, 뇌가 받아들이질 못한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영구 귀속.’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내 거란 뜻이다. 나는 의문만 해결되면 저 개 같은 캡슐을 박살 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다음. 시간 배율.’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정확한 수치 대신 ‘매우 느리게 흐른다’는 두루뭉술한 표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했으니 현재 게임 속 시간도 매우 느리게나마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럼 전쟁도 계속되나?’
문득 진위경이 생각났다. 대장로의 배신은 이미 기정사실, 그는 중요한 순간 뒤통수를 치려고 들 것이다. 혁무진과 정찰조가 진위경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까?
‘아, 한참 멀었구나. 시간 배율이 거꾸로 바뀌었으니까.’
뭣보다 지금 당장 내 코가 석 자다. 나는 마지막 주요 기능을 살폈다. 하지만 앞에 쓰인 것과는 달리 이건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캐릭터와 동기화한다고?’
혹시나 싶어 국어사전 검색까지 해 봤다.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다. 그래서 더 미친 소리로 들린다.
‘게임 캐릭터랑 뭘 어떻게 동기화를 해.’
이건 도저히 모르겠다. 결국 의문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확실한 건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워 책자의 앞장을 읽었다.
“제작사. H소프트.”
결국 길은 하나로 통한다. 이놈들을 조사하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는 H소프트를 찾아 인터넷을 뒤졌지만 동명의 포르노 제작사가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
일단 문부터 잠그고 생각을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