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44
#443화
열흘간의 항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 크루즈 선도 아니고 목재로 만들어진 선박에서 퀴퀴한 선실과 축축한 갑판만을 오가야 했으니까. 항구? 빠듯한 일정 탓에 앞만 보고 나아갔다.
그런 사정이 있다 보니, 적천강은 물론이고 장강이 홈그라운드인 수적들마저 표정이 환해졌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오오, 드디어…….”
강제적인 재능기부로 호북성까지 오게 된 무송은 감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쾌조선 한 척이 침몰한 이후로 상심에 젖어 있던 그는 지금까지의 고생을 모두 잊은 듯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닻을 내려라!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적천강이 무송을 바라보았다.
“지긋지긋?”
무심코 본심을 내뱉은 무송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장강을 말한 겁니다.”
“당연히 장강이지. 노부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인데?”
“…….”
“설마, 우리를 두고 지긋지긋하다고 한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상당히 그럴 리 있어 보이는데.
적천강의 가늘어진 눈초리에 무송이 식은땀을 흘리는 동안 우두머리의 위기를 간파한 수적들은 잽싸게 움직였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 쾌조선들이 줄을 지어 정박하고 닻을 내리자, 항구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저 깃발은…….”
“장강수로맹. 장강수로맹이다!”
“밑에는 뭐라 적혀 있는 거야? 수룡채? 처음 들어보는데.”
“사천에 본거지를 둔 수채일세. 해상왕의 둘째 제자인 선화아(船火兒) 무송이 맡은 수채가 바로 수룡채야.”
“그렇게 말하니 들어본 것도 같군. 그런데 사천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호북까지 온 거지?”
“난들 어찌 알겠나. 빌어먹을 수적 놈들. 가뜩이나 요즘 들어 분위기가 흉흉한데…….”
“쉿. 조용히 하게. 웬 젊은 놈이 이쪽을 보고 있어. 무림이랑 얽혀 봤자 좋을 게 없다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상인 무리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니,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카맣게 탄 어부가 망을 챙겨 후다닥 물러나고, 잡은 물고기를 내다 팔던 장사치가 빛의 속도로 좌판을 접었다.
저 멀리에서는 관복을 차려입은 벼슬아치는 관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서려 있는 것은 노골적인 경계심이었다.
‘이거 어째…… 사천 쪽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인데?’
장강수로맹이 제아무리 약탈을 근본으로 하는 수적 집단이라고 하지만 나름의 규칙과 체계가 잡혀 있다.
건수가 있다 하면 달려들어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모조리 털어 가는 식이 아니라, 때로는 무근본 수적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고 평소에는 일정량의 통행세만 받고 통과시킨다고 들었다.
‘정마대전 당시에도 간을 좀 보긴 했지만 결국 정파 쪽에 붙었었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
장강수로맹은 천하 무림의 향방이 갈린 환란의 시기에 정파의 손을 들어 주었고, 관부에는 충분한 뇌물을 찔러 주었다.
그렇다 보니 양쪽에서 묵인하고 넘어가는, 쉽게 말하자면 합법의 탈을 쓴 용역 깡패가 바로 장강수로맹이다.
물론 그리 썩 좋은 놈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별의별 미친놈들이 날뛰는 무림 아닌가. 이 정도면 양반까진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상놈 정도는 된다.
‘그래서 사천에서는 양민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그냥 저 각설이 새끼들이 죽지도 않고 또 왔구나, 정도였지 지금처럼 대놓고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역마다 있는 분위기 차이. 뭐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슬쩍 바라본 무송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미간을 좁힌 채 순식간에 텅 빈 항구를 바라보던 그가 오른팔 격인 수하를 불렀다.
“본 맹의 형제들에게서는 연락이 없느냐?”
“예, 채주. 분명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아무 연통도 없습니다.”
“당양채와 홍호채에서도?”
“그렇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동정채(東湖寨)는 황 숙부께서 계신 곳이다. 우리가 온 것을 그분이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무송이 수하를 향해 말을 이었다.
“하선(下船) 후 날랜 놈들을 풀어 상황을 알아봐라. 인근의 형제들에게도 즉시 연락을 취하도록.”
“존명.”
무송의 손짓에 휘하 수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찌감치 하선 준비를 끝마친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드디어 장강을 벗어나게 된 적천강이 가장 빨리 앞장섰고, 그 뒤를 나와 진위경, 그리고 청풍과 혁무진, 궁기방이 차례대로 따랐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녹아든 문경은 덤이다.
드디어 상성 지역에서 벗어난 불 포켓몬, 적천강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서렸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군. 이래서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니까.”
하지만 적천강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거기 잠깐.”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 어느새 다가온 벼슬아치가 우리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수백의 관군을 돌아보더니 가슴을 펴며 말을 이었다.
“본관이 주위 말을 들어 보니 그대들이 사천에서 왔다던데. 맞나?”
“그대들? 맞나?”
눈을 껌뻑거린 적천강이 관리를 향해 되물었다.
“혹시, 지금 그거 노부에게 한 말이냐?”
“그렇다.”
“그렇다?”
관리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키웠다.
“어허, 본관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거라. 어디에서 왔는지, 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낱낱이 고하지 못할까!”
“어허? 하거라? 못할까?”
“아, 아니 이 늙은이가…….”
“늙은이?”
안 돼. 하지 마. 제발 그만둬.
훈남이 저렇게 되묻는 말투를 쓰면 여자들이 설렌다던데, 보는 사람 시선에서는 공포 영화가 따로 없다.
나는 적천강이 저 권위적인 관리의 가슴에 화염 신장을 날리기 전에 잽싸게 끼어들었다.
“저랑 이야기하시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놈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갔던 거 꺼내 줬더니 말하는 꼬라지 보소.
확 그냥 대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사천에서 온 거 맞고,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면, 그 볼일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게…….”
그 순간, 누군가가 잔뜩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다진 고추를 듬뿍 얹은 생선찜이요!”
“청풍, 이 개새끼야!”
“왜요, 은인. 그거 진짜 맛있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맛인지는 몰라도, 관리의 눈에는 죽어야 할 놈들로 비친 것이 확실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관리가 고래고래 외쳤다.
“감히 본관을 능멸하다니!”
“잠깐만, 아저씨. 그게 아니라…….”
“장강수로맹의 깃발을 달고 사천에서 왔다는 것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데, 생선찜을 먹기 위해 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군. 여봐라, 당장 이 자들을 추포하라!”
“명을 받드옵니다!”
아니, 이 전개 뭔데.
뭐라 할 새도 없이 벌어진 돌발 상황. 군기가 바짝 든 관군 수백 명이 창을 들고 우리를 에워싼 그때, 작게 혀를 찬 진위경이 앞으로 나섰다.
“성질도 급하시구려.”
진위경은 현대의 관점에서 봐도 장신이지만, 무림에서는 거인으로 통한다.
우랄산맥 같은 어깨와 의복 위로 도드라진 근육을 바라본 관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대는 누군가?”
“산서 태원진가의 진위경이라 하오. 긴말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수하들을 물리는 것이 어떻겠소?”
관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위경의 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귀관이 아직 전달받지 못한 듯한데, 우리는 사천성주께 직접 통행을 허가받은 무림인들이오.”
“……사천성주께서?”
“미심쩍다면 확인해 봐도 좋소. 허나 그 전에 수하들을 물리는 것이 좋을 거요. 구태여 생목숨을 잃게 할 필요는 없을 테니.”
관리는 물론이고 우리를 둘러싼 관군들의 창끝이 움찔 떨렸다.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힘든 훈련을 거친 정예병이라고 해도 우리를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원래 피는 아랫놈이 흘리고, 자존심은 윗놈이 강한 법이다. 관리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자가 감히…… 본관이 누구인지 알고!”
진위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고 있소. 호북성의 민정, 재정을 담당하는 승선포정사사에 적을 둔 건 당연할 테고. 관복을 보아하니 종육품 이문(理問)이시구려. 사법을 다루셔야 할 분께서 왜 여기까지 나와 애먼 사람을 붙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 그건 그렇고 이 가에 홍천이라는 함자를 쓰시는 분을 알고 계시오?”
관리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그분은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하신 포정사신데.”
“그렇군. 얼핏 이야기를 들어 본 것도 같았지. 산서 육조참정에서 호북성 승선포정사라. 영전하신 셈이니 축하할 일이구려.”
“호, 혹시 포정사님과 어떤 관계이신……?”
진위경이 빙긋 웃었다. 어느새 그의 태도와 말투는 자연스럽게 관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 만나 뵙고 술 한두 잔 했지. 필요할 때 도움도 드렸고.”
“헉!”
“왜.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나?”
“아, 아닙니다!”
빳빳하던 허리가 연체동물처럼 숙여졌다.
진위경을 향해 잽싸게 폴더인사를 한 관리가 수하들을 향해 호통쳤다.
“이놈들! 무엇 하느냐, 어서 그 흉한 날붙이를 치우지 않고!”
“예, 옛!”
“이런 경우도 모르는 놈들을 봤나!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진위경이 자애롭게 관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네. 살다 보면 오늘처럼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는 법이야.”
“대해와도 같은 마음씨에 이 손 모, 감읍할 따름입니다!”
“나 말고 이분들께 직접 사과드리게. 특히 자네가 처음 말을 걸었던 분은 무림의 존경받는 어른이시지.”
“저,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하오면 혹시 별호를 여쭤봐도…….”
“화왕 적천강 대협이시네.”
“……!”
“사천혈사(四川血史) 직후 장강수로맹의 배를 빌려 타고 곧장 호북으로 온 참일세. 아, 물론 생선찜을 먹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니고.”
이제 그만해라, 애 울겠다.
자살이 마려운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던 관리는 일 초에 다섯 번씩 허리를 접는 묘기를 펼쳤고, 진위경은 슬쩍 내 옆구리를 찔렀다.
“어떠냐, 막내야. 이 형님 멋있지?”
“……그 말만 안 했으면 멋있었을 텐데.”
“관부와 한 번 연을 맺으니 편한 점이 많더구나. 혹시 너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내 이름을 대 보거라.”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뿌려 놓은 씨앗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긴, 궁기방의 말을 들어 보면 태원진가처럼 단기간에 이토록 급성장한 것은 정말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원진가에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하고 있을 진무경이 무공의 천재라면, 진위경은 가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겸비한 올라운더라고 볼 수 있었다.
“막내야, 멋있지 않으냐? 응?”
“…….”
그래, 이런 것만 빼면 완벽한 가주다.
그렇게 내가 계속해서 질척거리는 진위경을 밀어 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모두 물러나시오.”
심후한 공력이 실린 목소리와 함께, 항구에서 멀찍이 떨어져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동시에 상당한 기운을 품은 수십의 무인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저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걸친 새하얀 비단 무복에는 구름 같은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갈세가(諸葛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