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50
#449화
기이할 정도로 강해진 천령폭의 물살을 넘어 동정채의 영역으로 진입했을 때부터, 선화아 무송의 가슴은 조금씩 빠르게 뛰고 있었다.
‘황 숙부. 소질이 왔습니다.’
동정채의 채주인 장강일도(長江一刀) 황충은 무송에게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무송의 진짜 스승인 해상왕은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고 그들의 관계는 마른 모래처럼 퍽퍽했다.
어린 시절, 무송이 혹독한 질타와 수련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황충의 따뜻한 조언과 배려 덕분이었다.
‘소질은 믿고 있습니다. 숙부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장강수로맹의 누구보다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
그런 황충이 해사방과 동정어옹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거하는 최악의 악수(惡手)를 뒀을 리는 없다.
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무송 역시 직접 이 자리에 오기를 택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믿음과는 별개로 불안감은 시시각각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가 아는 장강일도 황충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신중한 사람이다. 천령폭(天靈瀑) 하나만을 믿고 수채의 방비를 소홀히 할 리 없었다.
동정채는 장강 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
만약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들이 천령폭을 넘는다면, 그들은 곧 수백 장 길이의 협곡과 그 위에서 침입자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화살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목전이거늘. 어찌하여 아무런 답도 없단 말인가.’
장강수로맹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을 울려 신호를 보냈음에도 사방은 전처럼 고요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섬을 바라보던 무송의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뇌리를 스치는 한줄기 생각. 그가 느낀 정체 모를 불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체를 드러냈다.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그게 무슨……!”
어린 의생, 문경의 말에 고개를 돌린 무송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곧이어 선상에 있던 사람들 사이로 동요가 들불처럼 번졌다.
“저, 저건…….”
“시체! 시체다!”
이 자리의 모두는 피와 죽음에 익숙한 무림인. 시체라면 질릴 정도로 봐 왔던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곳은 동정채다. 해사방의 핵심 인물들이 전멸하고 동정어옹마저 사망이 확실시되는 현재, 더욱 거칠어진 천령폭을 넘어 이곳까지 올 수 있는 자는 호북성에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시체라니.
동요하는 사람들 사이, 침묵하고 있던 무송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당장 끌어올려라. 확인해 보아야겠다.”
“예, 옙!”
수룡채의 수적들이 곧장 움직이기도 전에, 한 사람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물러나라.”
불과 촌각 전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던 화왕 적천강이 착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공간을 격하고 쏘아진 고강한 공력이 물에 잠긴 시체를 끌어당겼다.
쉬익, 텅!
둔중한 소음과 함께 쾌조선의 갑판 위로 내려앉은 한 구의 시신.
상반신의 절반이 사라져 있고 얼굴이 부풀어 오른 시신을 확인한 무송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자는…….”
“아는 사람입니까?”
성큼 다가온 진태경의 물음에, 무송이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조귀(小潮鬼) 왕필. 황 숙부의 오른팔이자 동정채의 부채주일세.”
호북성의 장강을 호령하는 동정채다. 그런 동정채의 부채주이자 장강일도 황충의 오른팔이니 이름과 별호가 알려진 것은 당연지사.
소조귀라는 별호에 터져 나오는 탄식을 뒤로한 진태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송을 응시했다.
“부채주? 확실합니까?”
“틀림없네. 비록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야.”
“……제기랄.”
진태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라 상황을 인지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수적이어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하물며 동정채의 부채주이자 호북 무림에 이름이 자자한 장강수로맹의 초절정 고수라니.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동정채에 변고가 생겼다.’
모두의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을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진태경이었다.
쉬익!
눈부신 속도로 선상을 가로질러 쾌조선의 후미에 도착한 그는 온 힘을 다해 양팔을 뻗었다.
퍼엉! 퍼어어엉!
화염신장(火焰神掌)에 실린 열양지기가 수분을 증발시키고 쾌조선을 앞으로 밀어 낸다.
그제야 충격을 벗어난 이들이 진태경을 따라 움직였다.
“수부(水夫)들은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노를 잡아라!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다른 배에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어서 신호를 보내라!”
둥, 둥, 두웅!
다급한 외침과 북소리가 고요를 깨트렸다.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무송은 사방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보다 더욱 크고 거칠게 뛰는 자신의 가슴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그는, 아니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쾌조선의 뱃머리를 따라 서서히 흩어지는 안개 너머, 산산이 부서진 나루터와 강물을 가득 메운 수많은 시신을.
* * *
“이런 씨팔……!”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튀어나온 욕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눈치를 주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럴 경황이 없거나, 어쩌면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대신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지옥도가 따로 없군.”
“……어떻게 이럴 수가.”
적천강은 심유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늘 밝던 청풍은 떨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무너진 가옥과 시신들이 즐비했다.
나루터 주위에서 목격한 시신들은 섬에 내려앉은 무수한 죽음 중 일부에 불과했다.
“조, 조장님. 저기…….”
“알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혁무진을 애써 외면했다.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이가 악물어졌다.
‘어린아이들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들.’
섬에는 동정채의 수적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일가 피붙이를 이 안전한 천혜의 요새에 데려왔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하나의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 죽었어.’
이제 막 젖이나 뗐을 법한 어린아이, 병약한 노인과 아녀자들.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켜야 할 수백의 수적들까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나와 일행들은 물론이고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무인들, 무송이 이끄는 수룡채의 수적들이 한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섬을 샅샅이 뒤진 끝에 나온 결과다.
그리고 그 무수한 죽음 속에는 한 사람의 이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황 숙부!”
짐승과도 같은 무송의 포효가 저 멀리서 울려 퍼지자, 궁기방이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어코 찾은 모양이군.”
누군가는 말한다. 사람의 목숨에는 경중(輕重)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 경중은 나뉘어 있다. 망자가 생전 어떤 사람이었고, 나와 어떤 관계였느냐에 따라 무게는 달라진다.
적어도 무송에게 있어 장강일도 황충은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주께서 급히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제갈세가 무인의 말에 진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대협에 관련된 일이겠군.”
“예. 지금 막 황 대협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한데…….”
“가세. 나머지는 제갈 가주께 직접 듣도록 하지.”
우리는 가타부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자가 된 장강일도 황충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행 중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적천강의 얼굴이 굳어 있는 이유 역시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 네 녀석은 어찌 생각하느냐?
문득 귓가를 파고드는 한 줄기 전음에, 나는 발걸음을 늦추며 대답했다.
– 노야와 같은 생각입니다.
– 노부가 어떤 생각인 줄 알고?
– 저와 같은 생각이요.
– 화염신장이 마렵구나.
– 저도 아까부터 오줌 마려운데 참고 있습니다. 노야도 참으세요. 지금 할 말 정리 중이니까.
나는 지난 한나절 동안 고민했던 생각들을 차분하게 풀어냈다.
– 동정채는 오직 천령폭을 넘어야만 올 수 있는 천혜의 요새. 제가 이곳 상황을 자세히는 몰라도, 장강일도 황충이라는 초절정 고수와 휘하의 수적들을 쓰러트리려면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꿈도 못 꾸겠죠.
– 똥개도 제 앞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법인데, 장강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을 상대하려면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적천강의 전음이 이어졌다.
– 특히 장강일도는 정마대전 당시 마교를 상대로 모든 수전(水戰)에서 대승을 거둔 물귀신 같은 놈이니, 동정채를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족히 두 배 이상의 전력이 필요했을 게다.
동정채의 두 배라…….
나도 이곳에 오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동정채의 규모는 여타의 수채들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당장 지금껏 발견된 시신의 숫자만 일천이 넘어가니, 그 규모만으로는 일파(一派)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무송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동정채는 장강수로맹의 총단 다음으로 강성한 수채라고.’
당장 주위만 둘러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파괴되었지만, 일개 수채가 오십여 척에 달하는 선박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도시의 번화가에서나 볼 법한 가옥으로 거주지를 만들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같은 명문대파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더라도, 장강일도가 거느린 휘하 수적들 역시 상당한 정예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동정채를 상대로 두 배의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집단은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손에 꼽는다.
– 그만한 전력과 선박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이라면…….
– 노부가 알기로는 호북성에서 단 네 곳뿐이다. 그중 하나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고.
– 무당파, 제갈세가, 관부. 그리고 해사방. 맞습니까?
– 그렇다. 하지만 해사방은 생업을 위해 모인 이들이 대부분이라 고수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무당파와 제갈세가는 힘이 있으나 동정채를 칠 만한 이유나 명분이 없지.
– 관부도 마찬가지겠군요.
– 물론이다. 무림과 관이 상호 불가침의 관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만에 하나 천자가 황명(皇命)을 내려 토벌코자 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천하의 이목을 속이고 은밀하게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림은 천하라는 숲속 깊숙이 뿌리내린 나무다.
가지를 치기에는 이미 너무 높이 자랐고, 섣불리 찍어 넘어트리기에는 도리어 도끼날이 상할까 염려된다.
이는 지금껏 숲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무림이 존속할 수 있던 이유기도 했다.
천자라는 나무꾼조차 쉽사리 도끼를 들이댈 수 없는 거목(巨木).
그것이 무림이고, 이 거목에 솟아난 수많은 가지와 잎사귀는 힘을 합치거나 때로 서로를 꺾으며 자라 왔다.
장강수로맹은 그중에서도 제법 굵은 나뭇가지다.
천하 각지에 흩어진 수채를 한자리에 모은다면 일군(一群)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고, 고수의 숫자 역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장강수로맹의 가지가 꺾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
– 노야께서는 흉수가 무당, 제갈, 관부, 해사방. 이 네 곳 중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 하루에도 수백 척이 넘는 선박이 오가는 물길이다. 수많은 이목을 피해 그만한 전력을 동원하여 천령폭을 넘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지.
– 매우 쉬운 일일 수도 있죠.
나는 아까부터 혀끝에서 맴돌던 한 마디를 툭 뱉었다.
– 암천(暗天)이라면.
– ……!
– 놈들은 굳이 수백, 수천의 병력을 선박에 싣고 천령폭을 넘을 필요가 없습니다. 워프, 아니 이동진이라고 불리는 그 진법이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요.
암천은 이미 소림과 사천에서 그것을 증명했다.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장강을 오가는 수많은 이목이 눈치채지 못한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적천강이 작게 침음을 흘렸다.
– 노부만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 이런 일에서 암천을 배제하기에는…… 냄새가 너무 구립니다.
– 하지만, 왜 하필 장강수로맹이란 말이냐?
– 글쎄요.
나는 저 멀리, 서서히 가까워지는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