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49
#448화
단 한 걸음으로 수 장의 거리를 지우고, 텅 빈 허공을 밟고 뛰어오르며, 일권으로 절벽을 무너트린다.
옛날 전래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적(異蹟)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바로 초절정 고수다. 하지만…….
“꽉 잡, 으아아아아!”
콰아아앙!
이곳은 육지가 아닌 망망대해와도 같은 장강의 한복판.
반경 수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와류 앞에서, 내가 몸을 실은 쾌조선은 작은 나뭇잎에 불과했다.
쿠웅!
“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악!”
엄청난 수압이 쾌조선의 옆구리를 후려치자 거칠고 빠르게 나아가던 선체가 붕 뜨며 허공에서 기울어진다.
천천히 뒤집히는 세상 속, 내 상반신을 구명조끼라도 되는 양 힘껏 움켜쥔 진위경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머니! 지금 갑니다아아악!”
“가긴 어딜 가! 손 떼!”
“아버지! 보고 있다면 해답을 알려 줘어어억!”
해답은 시벌, 답도 안 나오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진위경뿐 아니라 궁기방과 혁무진, 거기에 더해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제자들까지 반쯤 정신이 나갔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를 비롯한 초절정 고수들뿐.
“으허! 으허어어어어! 물! 무울!”
“…….”
정정. 한 사람은 제외다.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적천강을 붙잡고, 남은 한 손을 있는 힘껏 허공으로 내뻗었다.
‘화염신장(火焰神掌)!’
퍼엉!
강력한 공력의 파동에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칼날처럼 휘몰아치던 와류의 일부가 흩어지며, 수면을 향해 거꾸로 곤두박질치던 선체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한참 일렀다.
낙하하는 쾌조선을 향해 제이, 제삼의 와류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나 혼자로는 부족해. 이럴 때는…….’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과 함께, 나는 큰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청풍!”
“네!”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청풍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끼얏호우!”
“아니, 끼얏호우 말고 이 미친놈아! 내가 했던 대로 하라고!”
“아아. 네, 은인!”
혼자서 월미도 디스코 팡팡을 즐기고 있던 청풍이 양 소매를 떨쳤다.
화산파가 자랑하는 절기,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이 수십 개의 꽃잎으로 화해 허공을 후려쳤다.
퍼버벙!
파괴력으로는 화염신장을 따라올 수 없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타격 범위가 훨씬 넓은 태을미리장이 적격이다.
칼날처럼 휘몰아치던 천령폭이 주춤하는 모습에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제자들도 잠시 출타했던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으하하하! 호랑이가 날뛰는구나! 본가의 제자들은 대천성신장(大天星神掌)을 펼쳐라!”
명령을 내린 와룡객 제갈풍이 손에 쥐고 있던 학우선을 흔들었다.
비록 아직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선법(煽法)에 있어서만큼은 초절정 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그다.
콰아아아!
학우선의 부챗살을 따라 시작된 산들바람이 강력한 바람으로 화해 와류를 막아섰다.
그리고 마치 쾌조선을 집어삼킬 듯, 삼각파도처럼 높게 솟구친 물살이 바람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던 그 순간.
쉭!
현공진인의 허리춤에서 솟구친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스쳤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모든 것을 지나쳐 간 섬광이 공간을 가르고 바람을 베자 천령폭이 일으킨 물의 장벽이 일순 끊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산산이 무너졌다.
촤아아아악!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보라.
엄청난 양의 찬물을 뒤집어쓴 적천강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지는 눈동자로 와류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이 축축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
“…….”
아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없어 보이지?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적천강의 양 소매를 타고 터져 나온 공력은 강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조리 꺼져라!”
화륵, 콰아아아!
수 갑자에 달하는 열양지기가 일거에 뿜어져 나온다.
주위에 가득하던 수분이 증발하고,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쾌조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끼얏호우!”
“청풍, 이 미친놈아!”
“앗. 죄송해요, 은인!”
퍼버버벙!
배를 사수하기 위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장력과 허락받지 않은 불청객들을 침몰시키려는 천령폭.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이를 악문 무송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좌현으로, 동시에 꺾어!”
“으아아아아!”
파앙!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껏 비명을 내지르던 소년 의생이 아무도 모르게 장력을 쏘아 보낸 것은 나와 적천강, 그리고 청풍만이 아는 비밀이다.
“하나, 둘!”
“지금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노를 저어라!”
촤아아아악!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 법.
그렇게 수백 명의 승객을 실은 네 척의 쾌조선은 와류를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천령폭을 통과하기 무섭게, 진이 빠진 사람들은 체면도 가리지 않고 선체 곳곳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예외는 있는 법.
붉어진 눈가로 거짓말처럼 평온해진 장강의 강물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열화문의 당대 장문인으로서 말하건대, 명일 이 시간부로 본문의 공적(公敵)은 제갈세가다.”
“…….”
“제갈 성을 쓰는 놈들은 모조리 붙잡아 저 빌어먹을 천령폭에 처넣어야겠다. 이의 있느냐?”
“있으면요?”
“네 녀석도 같이 처넣을 것이다.”
“어, 그럼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좋다. 당장 저 쌍노무 새끼를 잡아 노부 앞에 대령하도록 해라.”
적천강의 이글거리는 시선 끝에, 수십 장 뒤에서 따라오는 한 척의 쾌조선과 뱃머리에 앉아 학우선을 흔드는 제갈풍이 있었다.
“하하, 노선배님!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웃어?”
내가 봐도 죽이고 싶긴 하다.
차라리 절벽을 무너트리는 게 쉽지, 피할 곳도 없는 드넓은 장강 한복판에서 와류에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해 봐라.
말이 쉬워서 허공답보(虛空踏步)니 등평도수(登萍渡水)니 떠들어 대지만, 공력 소모도 극심하거니와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아니, 무슨 바다도 아니고 강물에 저딴 게 다 있어.’
괜히 천령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하긴, 조금 거센 물살 정도였다면 제갈세가와 무당파가 진즉 동정채에 들이닥치고도 남았겠지.
그리고 이 사이에도 적천강의 분노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당장 배 돌려라. 제갈풍인지 와룡객인지, 노부가 오늘 저놈의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 평생 누워 있게 해 줄 것인즉!”
“진정하세요, 진정.”
“노부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가뜩이나 물 싫어하는데 별 거지 같은 곳에 오는 바람에 이런 고초를 겪고! 몇 번 와 봤다는 놈은 물길 하나 못 잡아서 끙끙거리고 있고! 이 정도면 수적이 아니라 저승길 뱃사공 아니냐!”
길길이 날뛰는 적천강의 모습에, 대자로 뻗어 있던 무송이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고, 고정하십시오, 대협. 저도 천령폭이 이 정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와 봤다는 놈이 몰라? 모르면 수적 생활 끝나냐? 네놈 인생도 여기에서 끝내 줘?”
“그, 그게 아니라 천령폭의 물살이 전과 비교하여 이상할 만큼 강해진 탓에…….”
“강해지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금년에는 비가 얼마 내리지도 않았거늘, 감히 금방 들통날 감언이설로 노부를 속이려고 들어?”
“저, 정말입니다! 제가 어찌 화왕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음. 이건 무송의 말에 일리가 있다. 어느 누가 감히 화왕 적천강을 상대로 거짓말을 치겠는가.
구라 치다가 걸리는 날에는 손모가지 날아가는 정도로는 안 끝난다. 전신이 미디엄 레어로 구워지기 딱 좋다.
‘그나저나 강수량이 적었는데 물살이 저 정도로 강해질 수가 있나?’
됐다. 내가 기상 학자나 생태계 연구원도 아닌데 생각해 봤자 답도 안 나온다.
작게 혀를 찬 나는, 쉬지 않고 무송을 갈구고 있는 적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야.”
“돌아갈 때 잘해라. 노부가 조금 전과 같은 일을 다시 한번 겪게 만든다면, 그때는 장강수로맹 총단에 쳐들어가서 모든 배를 불 싸지르고 해상왕 그놈을 제갈세가 놈들과 함께 천령폭에 처넣어…… 뭐냐? 나중에 얘기해라.”
“그게 아니라, 다 도착한 것 같은데요.”
“뭣이!”
타다다닥!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
무송을 내팽개치고 한걸음에 쾌조선의 선체를 가로지른 적천강이 부릅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감격에 찬 탄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오, 오오오!”
누가 보면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줄 알겠지만, 자욱하게 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하나의 섬이었다.
대한민국의 한강에 드문드문 늘어선 섬처럼 작지도 않았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무인도도 아니었다.
“저기 보이는 저거, 혹시…….”
눈을 가늘게 뜬 혁무진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궁기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터로군.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야.”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나루터가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사람이 살고 있거나 혹은 경유지로 자주 오가는 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저 미친 천령폭을 넘어야만 올 수 있는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자들의 정체는 이미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와아, 동정채!”
청풍의 외침이 장강의 적막함을 깨트리고 멀리 퍼져 나가자, 진위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쯤 되면 동정채에서도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 혹여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좋겠구려.”
“……!”
만일의 사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대로 동정채가 지난 보름 동안 일어났던 두 사건의 흉수라면…… 그때는 무림의 법칙을 따라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채주. 우리는 피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오. 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을 거라 믿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무송이 진위경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와 수하들이 앞장서서 이곳에 온 이유는, 본 맹의 형제들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섭니다. 만약 전후 사정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작정 우리를 핍박한다면…….”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이는 이미 무당과 제갈세가가 보증했으며,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증인이 될 거요.”
망설이던 무송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소.”
어쩌면 이 중에서도 유혈 사태를 가장 막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일지도 모른다.
동정채가 아무리 뛰어난 수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을 이끄는 장강일도(長江一刀) 황충이 초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현재 우리의 전력을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만약 아주 엄청난, 정말 만에 하나라고 부를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 이 자리의 모두가 장강에 가라앉는다고 해도, 그때는 천하 무림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힘을 합치면 장강수로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깃발을 높이 올리고, 우리가 왔음을 알려라.”
수룡채의 수적들은 채주의 명령을 즉시 이행했다.
곧 장강수로맹의 깃발이 네 척의 쾌조선 위로 펄럭이고, 일곱 번의 낮은 북소리가 안개 너머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장강도, 안개도, 조용히 흐르는 강물도 여전했다.
바뀐 것은 진위경의 의문과 무송의 흔들리는 눈동자뿐이었다.
“채주. 무슨 일이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신호를 보냈으니 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군요.”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시선이 향하는 곳, 지금껏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소년 의생이 맑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그게 무슨……!”
무송의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년 의생, 문경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그곳에는 안개와 해조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떠올라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