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64
#463화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깊고 어두운 동굴 안.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은 가부좌를 튼 채 자신을 관조하고 있었다.
태양과도 같은 기운이 수백 개의 혈도를 지나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치닫자, 유형의 기운이 일어나 노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내 변화가 시작되었다.
솨아아아.
하얗게 센 노인의 머리 위로 세 개의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이내 사라졌다.
꽃봉오리를 이룸과 동시에 흩어진 기운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오색찬란한 빛을 띤 다섯 개의 원.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만이 이룩한 경지. 바로 오기조원(五氣朝元)에 다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노인을 둘러싼 변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륵. 츠츠츠츠!
오기조원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원이 붉게 물들었다. 극강의 열양지기를 머금은 공력의 고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엄청난 화기가 노인을 휘감고, 이내 푸른 빛을 띠었다.
노화순청(爐火純靑).
화로의 불이 뜨거워지면 푸른색으로 변하는 법. 노인이 이룩한 무공의 경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장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공력과 깨달음은 이미 극의(極意)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인가.’
노인, 화왕(火王) 적천강은 공력을 거둬들였다.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떠올라 있던 신형이 지면에 닿는 순간, 그를 둘러싼 기이한 현상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고요한 공간에 남은 것은 적천강의 실소뿐이었다.
“허허.”
어찌하여 눈앞의 벽을 넘어 더 나아갈 수 없는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벽이 아쉽고 애석했다.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적천강은 미간을 찌푸리는 대신 웃음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
‘무얼 원망할까. 노부가 자초한 일인 것을.’
무공은 끊임없는 단련으로 강해지고, 깨달음은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그러나 적천강은 지난 수십 년간 마음에 쌓인 찌꺼기를 비워 내지 못했다.
이렇게 쌓이고 고인 것은 언젠가 썩는 법. 썩은 마음에 번뇌가 가득하니 심마(心魔)가 찾아왔고, 심마가 찾아오니 노환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벽에 똥칠하고 있었겠지. 허허.”
적천강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한 번. 단 한 번의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면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또한 욕심이라는 것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마음이라는 것을.
문득 고개를 들자 자그마한 구멍 사이로 하늘이 비친다. 적천강은 저 너머,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이구려. 맞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대답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타고난 살귀(殺鬼)를 제자로 거두어 죄 없는 이들을 죽게 했으나, 두 번째 제자 덕분에 정신이라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어떤 미련도 갖지 말라는 대답.
대답하는 존재는 없었지만, 적천강은 자신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들었다.
“참으로 지랄 같군. 노부가 지금껏 처리해 준 마두(魔頭)가 몇 놈인데 이런 푸대접이라니.”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쉰 적천강이 고개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적천강의 시선 끝에 선 한 사람, 와룡객(臥龍客) 제갈풍이 쥘부채를 흔들며 대답했다.
“언젠가 조부께서 아홉 살이 된 저를 곁에 앉혀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저 위에 어떤 놈이 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지랄 같은 성미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 지금 노 선배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공후, 그놈이 그래도 가끔가다 한 번씩 맞는 말을 하긴 했지.”
“현명하신 분이었습니다.”
“물론 네놈보다 똑똑하기도 했다. 적어도 조부뻘 되는 사람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게 부채질하진 않았으니. 그 부채 부숴 버리기 전에 당장 접어라.”
“쉽게 부서질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만년한철을 두 냥이나 넣었거든요.”
“네놈 골통도 만년한철이냐?”
“아, 그렇군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냉큼 부채를 접은 제갈풍이 동굴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한데 이곳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수색도 끝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데.”
“그러니 온 것이다. 노부야 기관진식에는 문외한이니,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지.”
준비라는 말에 제갈풍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전투가 벌어질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항상 싸움을 대비하는 것이 무인의 자세. 더군다나 암천이라는 놈들은 잔학무도하고 집요하다.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
적천강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암천에 의해 법왕 굉도라는 절친했던 벗을 잃은 그다.
하남과 사천의 혈사가 낳은 수많은 죽음은 과거 일어났던 정마대전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사천당문의 지하 뇌옥에 천력마(天力魔)가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입니다. 그가 진 소협을 통해 암천을 마교의 후신(後身)이라 칭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역시.”
천하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정마대전은 정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그것은 대승이 아니라 상처뿐인 승리였다.
만약 당시의 정파에 충분한 여력이 남았다면 퇴각하는 마교의 군세를 추격하여 모든 뿌리를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신교와 정파. 두 용과 호랑이는 종전과 동시에 대부분의 힘을 잃었고, 오십여 년이라는 긴 공백의 시간은 도망친 패자가 다시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암천(暗天)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돌고 돌아 또다시 난세가 찾아오고 말았어.”
적천강의 나직한 목소리에 제갈풍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천장의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둡고 혼란했다. 당장 내일 저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늘이 푸르게 걷힌다 해도, 흐트러진 천기는 천하의 그 어떤 복자(卜者)도 읽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난세.’
바야흐로 돌고 돌아 찾아온 난세였고, 환란의 시대는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죽음과 파괴가 곳곳에서 자행되니 부모 잃은 고아가 천하를 떠돌 것이며, 썩어 가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해 역병이 창궐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제갈풍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암천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객이 있었군.”
귓가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 제갈풍은 창졸간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우뚝 굳어 버렸다.
‘어떻게?’
비록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제갈풍 역시 절정의 끝자락에 다다른 고수.
그런 그가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 셋을 동굴 앞에 세워 두고 왔음에도 아무런 징조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이 최소 초절정의 고수라는 뜻이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마주 보고 있는 적천강을 제외하면 무당파의 현공진인 뿐.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턱없이 젊고 맑았다. 마치 소년의 그것처럼.
‘아.’
제갈풍은 섬전 같은 깨달음과 함께 돌아섰다.
몇 번인가 스치듯이 마주했던 소년 의생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에 가득했던 안개가 흩어지고 한 사람의 별호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살성(殺星).”
소년 의생, 문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방금까지는.”
제갈풍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금제일의 살수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남았지요. 어찌하여 신의라는 걸출한 의생이 정마대전이 끝난 후에야 등장했는가에 대해서도.”
“제법이군.”
“유심히 지켜본 적도 있었습니다만, 설마하니 반로환동의 경지에 드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살성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미지의 인물.
번쩍이는 눈동자로 문경을 바라보던 제갈풍이 문득 멈칫했다.
“한데 어째서 굳이 제게…… 혹시?”
“눈치도 빠르고. 제갈가의 핏줄다워.”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 약간 이상한 것 같긴 해도 똘똘한 놈이야. 제갈공후가 손주 놈을 잘 키운 게야. 자, 그건 그렇고…….”
어깨를 으쓱한 적천강이 문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가? 어울리지도 않게 어린애 흉내나 내던 늙은이가 이리 다급하게 찾아온 연유가.”
“짧게 말하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
“뭐라?”
문경이 말했듯이, 그의 말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리고 그것은 적천강에게 있어 저 빌어먹을 천령폭을 넘을만한 이유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
“더 짧게 말해 줄 필요가 있겠군.”
문경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제자가 위험하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
그 말을 들은 순간, 적천강은 더 이상의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제갈풍을 바라보는 그의 노회한 눈동자에는, 어느새 푸른 불꽃이 깃들어 있었다.
“배를 띄워라. 지금 당장.”
* * *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동정호의 강물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벽과 기암괴석(奇巖怪石)의 틈새로 비추는 석양을 바라본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함부로 움직이지 마. 나룻배는 안전한 곳에 묶어 두고, 땅으로 이동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동정호는 호수지만 그 크기는 호수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광활하다.
사방에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섬, 혹은 장강의 지류에서 흘러들어온 흙과 모래가 쌓여 축적된 평평한 지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만약 전투가 시작된다면, 육지 위에서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이중 수공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내가 [수상 구조대원]의 칭호 효과로 수중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긴 하지만, 무공의 위력이 20%나 감소하는 디버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만약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면…… 최소한 육지에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해.’
이런 내 생각을 모를 리 없는 녀석들이다.
궁기방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함께 가지.”
“헤엄칠 줄 아냐?”
“개헤엄 조금 한다.”
“개처럼 맞기 전에 육지로 가라.”
“음. 그게 나을 것 같군.”
궁기방이 뒤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혁무진이 나섰다.
“조장님.”
“넌 육지에서도 몸 사리고 숨어 있어. 괜히 나서 봤자 별 도움 안 된다.”
“저도 압니다. 그냥 힘내시라고 불러 봤습니다.”
“…….”
저런 시부럴 놈. 그나마 있던 힘도 쭉 빠질 지경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마지막으로 청풍을 향해 신신당부했다.
“저 안에 동정어옹이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내가 놈을 발견해서 밖으로 끌어낸다면…….”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을게요.”
“그래. 그거면 돼.”
동정어옹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몰라도, 청풍의 도움이 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물론 이곳에도 없을 수 있겠지만.’
하지만 뭐랄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이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다. 사람들을 차례차례 바라본 나는, 망설임 없이 자줏빛 강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촤악!
익숙한 느낌과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칭호 효과에 따라 평범하던 손과 발에 투명한 물갈퀴가 생성되고, 호흡이 편안해진다.
‘더, 깊숙이.’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차가운 강물과 수많은 물고기를 지나쳐 빠르게 헤엄치던 그때였다.
‘저건…….’
저 멀리, 시커먼 동혈(洞穴)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