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97
#496화
“음.”
혁무진은 신중하게 붓을 들었다. 탁자 위, 미리 펼쳐 둔 소첩(小牒)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적어 놓은 글자로 빼곡했다.
x월 x일. 날씨 지랄 같다가 맑아짐.
꿈을 꿨다. 용을 닮은 괴물이 나오는 악몽이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다가 오줌을 지렸다.
일어나자마자 속곳과 바지를 빨려고 몰래 개울가로 갔는데, 나보다 먼저 온 궁 소협이 똥 묻은 바지를 빨고 있었다.
더러운 인간 같으니.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따로 없다.
우리 조장님은 왜 굳이 바지에 똥이나 지리는 인간을 데리고 다니시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내가 의방에 있는 거지?
x월 x일. 날씨 맑음.
악몽이 사실이었다.
문경이의 말에 따르면 그 괴물의 정체는 이무기였고, 마기(魔氣)가 골수까지 치밀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다행히 조장님께서 나서 주신 덕분에 나는 그 마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당분간 일기를 꾸준히 쓰며 기억을 되짚으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나저나 그 말도 안 되는 광경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니.
듣던 중에 문득 의문이 떠올라 문경에게 물었다. 그 꿈, 아니지. 그 자리에서 싸우는 네 모습을 봤는데 그것도 전부 사실이었냐고.
문경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궁 소협도 합세해서 함께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마에 피멍이 들어 있지?
모르겠다. 다시 잠이나 자야지.
x월 x일.
사체를 처리하러 갔다. 이무기의 거대함에 한 번 지리고, 조장님의 도축 솜씨에 두 번 지렸다.
골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가 조장님께 골이 울리도록 맞았다.
뼈와 비늘, 살점으로 나뉜 이무기의 사체는 비밀리에 운송할 거라고 들었다.
아,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분류한 사체의 물량이 상당수 사라졌다.
진노한 현공진인께서 범인 색출을 천명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주먹만 한 크기도 아니고 그 많은 양을 누가 훔쳐 간단 말인가.
그렇게 약간의 소란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배에 오르자, 어디선가 똥 냄새가 심하게 났다.
참다못해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장님께서 궁 소협을 지목하셨다.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며칠 전에 똥 지린 걸 목격한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소리다.
내 옆에 앉은 문경이는 시종일관 표정이 오묘했다.
똥 냄새 때문에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싶은데 궁 소협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는 거겠지.
착한 녀석 같으니. 언제 봐도 순진하고 정이 가는 녀석이다.
x월 x일.
이무기의 사체를 처리한 지 이틀이 지났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 대협은 통 보이지 않고, 조장님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신다.
밤낮없이 독과 암습에 시달리는 사람 같다고 농담을 던졌더니 죽일 듯한 얼굴로 노려보셨다.
괜히 만만하니까 나한테만 난리야.
라고 생각했을 때, 궁 소협이 나와 같은 말을 했다가 맞는 걸 봤다. 기분이 좋아졌다.
x월 x일.
사흘 만에 다시 쓰는 일기다. 왜 그동안 뜸했냐 하면, 달리 쓸 만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 대협에 이어 조장님도 통 보기 힘들어졌고, 문경이도 어딜 자꾸 쏘다니는지 뜸하다.
나 같은 무인이 남는 시간 동안 뭘 하겠나. 궁 소협과 괜찮은 장소를 물색해 수련했다.
입 냄새가 시궁창 같아서 그렇지, 입 다물고 수련하니까 제법 나쁘지 않다.
반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온 청 소협의 조언은 하나같이 쓸모없었다.
무공에 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딱 두 가지였다.
그거 되게 쉬워요. 그게 왜 안 돼요?
이 인간아. 그렇게 쉽게 됐으면 내가 아직도 일류겠냐.
답답했는지 시범을 보여 주는데 도통 모르겠다.
수련할 때마다 미미인지 하는 물뱀 놈은 옆에서 혈어(血魚)를 삼키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덩치가 꽤 커진 것 같다. 뿔도 그렇고.
어쩐지 혈어의 씨가 말랐다 싶더니, 저놈 주둥이로 싹 다 들어간 모양이다.
x월 x일.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무인들 몇몇과 제법 친분을 쌓게 됐고, 그 덕분에 몇 가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제갈세가는 와룡객 제갈풍 대협의 진두지휘 하에 그 틈새를 완전히 틀어막을 진법을 시험 중이라고 한다.
듣기로는 그걸 못 막으면 혈어 같은 괴상한 것들이 계속 생겨날 거라는데, 암천 놈들은 도대체 무슨 기괴막측한 수법으로 저런 것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반면 무당파에서는 여전히 그 살귀(殺鬼)를 추적 중이라고 했다.
관부까지 합세해서 호북성을 이 잡듯이 뒤지는데도 색출해 내지 못하는 걸 보면 도망치는 데에 도가 튼 놈임이 분명하다.
x월 x일.
이곳에 온 지 칠 주야째다. 오랜만에 만난 조장님의 안색은 평온했다.
전에는 혼자서 무슨 수련을 하시는 건지 몸에 상처도 많고, 안색도 창백하거나 푸른 빛이 돌았는데 이제 괜찮아지신 모양이다.
그 대신 성격이 좀 날카로워지셨고, 걸음걸이가 유령처럼 변했다.
어찌나 기척을 내지 않는지, 궁 소협과 조장님 욕을 하다가 걸려서 뒈지게 얻어맞았다.
아니, 도대체 그 거리에서 어떻게 욕하는 걸 들었던 거지?
그나저나 맞던 와중에 문경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데…… 아마도 착각이겠지.
“으음.”
약 열흘 동안 보고 겪은 일을 적은 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소첩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혁무진이 붓으로 첫 획을 그으려던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돼, 됐다!”
“가주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자네들이 아니라 내가 해낸 걸세! 역시 나는 천재야! 제갈무후시여!”
삐끗! 찍!
마음이 흐트러지니 손이 엇나가고, 손이 엇나가니 붓도 휘청였다.
대문호(大文豪)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려던 혁무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체 어느 놈이!”
분노하는 혁무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네가 말하는 그놈이 제갈풍 대협이신 것 같은데. 전해 드릴까?”
“어디 한번 해 보십쇼. 그때는 궁 소협 죽고 나 죽는 거지.”
허락도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궁기방을 향해 퉁명스럽게 대꾸한 혁무진이 붓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밖에는 대관절 무슨 일이랍니까?”
“제갈세가에서 그 틈새를 완전히 틀어막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야.”
“진법으로요?”
“그럼 바위로 막겠냐?”
“참나. 못 막을 건 또 뭡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으면 진작 틀어막았겠지.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아, 그래요? 평소에 생각이 많으셔서 똥 지린 겁니까?”
“오줌 지린 개가 똥 지린 개 나무라는 격이군.”
“똥보단 오줌이 낫죠. 그리고 궁 소협은 두 번이나 쌌잖아요. 지난번에 이무기 사체 처리하러 갔을 때…….”
“와, 진짜 미치겠네. 그거 나 아니라니까!”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궁기방의 모습을 본 혁무진이 혀를 찼다.
“거, 발뺌도 정도껏 하셔야지.”
“진짜라고!”
“궁 소협이 아니면 누굽니까? 예? 설마 현공진인께서 쌌겠어요?”
“진태경! 분명히 그놈한테 똥 냄새가 진동했, 헉!”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궁기방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그래도 불과 며칠 전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가 매타작을 겪은 그였다.
“어, 없지?”
혁무진도 덩달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아는 진태경은 누가 먼저 욕을 했건 간에 사이좋게 조지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 아마도?”
“확실해?”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조장님 기척 눈치챌 정도면 이미 초절정 고수죠. 아니면 유령이거나.”
촉각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살피던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작 말 몇 마디하고 눈치를 보는 자신들의 처지에 문득 허탈함이 밀려왔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조장님 돌아가실 때까지요.”
“만약에 그놈이 나중에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하면?”
“혀 깨물고 자결해야죠. 별수 있습니까?”
“빌어먹을. 진태경 그놈은 진짜 괴물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혁무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진태경이 망나니였던 시절부터 봐 왔던 그였기에 공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맞죠.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청 소협? 그 인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몇 번 보더니 취팔선권(醉八仙拳)을 엇비슷하게 따라 하더군. 스승님이 아셨다면 문파 비전을 유출했다고 죽이려 드실 거야.”
“오오.”
“……방금 네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영원히 입 다물어라. 나 진짜 죽는다.”
“오오오.”
“이런 개 같은 놈을 보았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궁기방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주군은 뭘 하느라 통 안 보여?”
“저야 모르죠. 수련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온종일 막사에만 머무르실 때도 있어요.”
“진 대협이야 뭐 원래 이래저래 바쁘시고, 적 대협은 한참 안 보이시던데.”
적천강은 이곳에 도착한 첫날 이후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많은 이가 그의 거취를 궁금해했지만,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왕. 그 두 글자만으로도 스스로를 증명하는 인물이니까.
“천하의 화왕을 누가 해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하긴. 제아무리 암천이라 해도 어림없지. 그분을 어찌하려 했다간 기둥뿌리 서너 개는 뽑히고, 이미 주위가 초토화되고도 남았을 거야.”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궁기방이 말을 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요새 문경이도 통 안 보이던데?”
“그러게요. 가끔 볼 때마다 조장님과 함께 있더라고요.”
“그래?”
“예. 아무래도 수련 중에 입은 부상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흠.”
“왜 그러세요?”
“아냐. 냄새가 나.”
“또 지리셨어요?”
“혁무진 이 미친놈아. 그게 아니라. 둘 사이에 뭔가 있다 이 말이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궁기방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잠깐, 설마!”
“설마 뭐요.”
“아직도 모르겠냐? 왜 요즘 들어 두 사람이 종종 함께 있는지?”
혁무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가만히 궁기방의 말을 듣다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네가 생각한 그게 맞다.”
“허어. 이럴 수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지. 우리에게는 심심하면 주먹을 날리면서, 문경이 녀석에게는 단 한 번의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어.”
“언제부턴가 욕도 거의 안 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무기 사체를 처리하러 갔을 때도 수상했어요.”
“진태경이 사라졌을 때, 문경이도 자리에 없었지.”
“맞습니다! 역시 개방의 차기 방주!”
“확실하군. 문경이 그 녀석…….”
궁기방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가 녀석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는 것이 분명해.”
“아아, 문경아! 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선택을!”
혁무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하얗고 깨끗한 백지 같은 문경에게 진태경이라는 먹물이 스며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그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허어, 통탄할 일이로군. 사천에 계신 신의를 뵐 면목이 없어.”
“문경, 문경이는 안 됩니다! 우리와 같은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진태경은 악귀다. 그런 사악한 놈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상 우리가 손 쓸 방법이 없어.”
“그럼 지금쯤 문경이는…….”
“후우…….”
“아아…….”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쯤 진태경의 마수(魔手)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문경을 생각하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문경아. 부디 살아남거라.’
* * *
‘제발 누가 좀 살려 줘.’
서걱!
한 줄기 바람이 목을 스친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가 이내 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 한 방울이 지면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쉬릭, 타닥!
허공에서 신형을 바로세운 나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방금 건 좀 위험했는데요.”
답하는 목소리, 아니 전음(傳音)이 있었다.
– 위험하라고 한 것이다.
“아니, 장난이 아니라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요.”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
도대체 어디일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전음만이 있을 뿐.
“후, 시벌.”
– 뭔 벌?
크게 심호흡한 나는 백염의 창대를 말아쥐었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개 같아서 못해 먹겠네, 진짜.”
쉬잉!
대답 대신 눈부신 검격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