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22
#521화
“반가운 김에 하는 말인데, 혹시 맹주 하실 생각 없소?”
“……?”
“……?”
조별과제 조장이 때려치운다고 하면 조원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지사.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난 매종학의 말에 벽력도왕은 입을 딱 벌렸고, 창천검왕과 무명은 아연한 눈빛으로 매종학을 바라보았다.
‘반가운 거랑 그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
‘이런 새끼가 무림맹주라니.’
말은 안 했지만 딱 그 표정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지막 한 사람, 적천강은 놀라울 정도로 덤덤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평범한 인물이라면 이럴 때 말을 잇지 못할 거요. 하지만 노부는 달라. 근래에 미친놈들을 수두룩하게 만났거든.”
순간 적천강과 눈빛이 마주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엄청난 우연의 일치인지, 아무도 없다. 바닥에서 뭔가를 쪼아먹고 있는 참새 한 마리 빼고는.
음, 그렇군. 적천강이 왜 이쪽을 쳐다보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새를 좋아하시는지는 몰랐네요. 하긴, 참새가 귀엽긴 하죠.”
“네놈을 보고 있느니라.”
“저요? 갑자기 저를 왜?”
“몰라서 묻느냐?”
“보통은 몰라서 묻죠. 아는데 왜 묻습니까.”
“주둥이를 신나게 나불대는 걸 보니 묻어 버리고 싶구나.”
음, 그럼 곤란해지는데.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정말 혹시, 설마,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방금 말씀하신 미친놈들 중에 제 이름이 끼어 있습니까?”
“무조건,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 없이, 네놈의 이름이 제일 앞줄에 있다.”
“…….”
학창시절 뒤에서 일등은 몇 번 해 봤어도 앞에서 일등 해 보기는 처음이다.
이렇게라도 일 등을 해서 참 기쁘……기는 개뿔. 어이가 없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천강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심지어 청풍보다 순위가 높아.’
정신적 데미지에 눈앞이 아찔하다. 나는 적천강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 지인 중에 테스 형이라고 있는데. 그 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지금 그거, 노부에게 한 말이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이런 호로…….”
반쯤 치켜들었던 주먹이 멈칫한다. 서서히 모여드는 주위의 시선을 느낀 적천강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매종학을 향해 돌아섰다.
“어쨌든 결론부터 딱 잘라서 대답하자면, 싫소.”
“헛. 어째서?”
“귀찮으니까.”
대답이 걸작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솔깃할 만도 한데,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무림 맹주 자리를 거절하다니.
“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구려.”
“…….”
이건 더 걸작이네. 제발 수긍하지 마. 주변에 슬금슬금 사람들 모여드는 거 안 보여?
‘조졌네.’
이 대화가 퍼져 나가면 조별과제가, 무림맹이 파토 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로를 마주한 두 걸작선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상남자들이었다.
“그런 감투는 성미에도 안 맞고, 사람 상대하는 것도 싫소.”
“앗. 나도 그렇소.”
“그럼 때려치우시던가.”
“그건 곤란하오.”
“그 이유는?”
턱을 긁적인 매종학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
그저 무공이 좋아 검을 들었고, 검성이라는 별호를 얻은 한 남자.
참혹한 전란의 끝자락에서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스스로 야인을 자처하며 산으로 돌아간 진정한 무인(武人).
하지만 검성 매종학은 무인이기 이전에 대협(大俠)이다.
그가 맹주라는 직함을 받아들인 이유는 얄팍한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다.
무인인 동시에 대협이라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한마디. 빤히 매종학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제법 긴 세월이 흘렀건만, 당신은 변하지 않았구려. 구화산에서 만났던 그 날이 어제라고 생각될 만큼.”
매종학이 눈을 크게 떴다.
“어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족히 수십 년도 전의 일인데.”
“…….”
“…….”
내 감동 돌려내. 이 인간아.
순간 억울한 감정이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쎄한 시선에 매종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웃음기가 싹 가신 적천강이 중얼거렸다.
“……정말 변하지 않았군. 오장육부가 문드러지는 기분이야.”
“아직도 몸이 좋지 않소? 중독된 건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그 입 좀 여무시오. 계속 떠들어 대면 노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이제야 하는 말인데,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은 적 대협이 처음이었소. 이래서 적 대협이 좋다니까.”
“……청풍, 그놈이랑 정말 그냥 사제지간이오? 핏줄이 이어진 것 아니고?”
이건 진짜 무림 7대 미스터리에 꼽힐 만한 의문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매종학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맹주님과 화산신룡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 의족(義足)을 단 채 절뚝이며 걸어오는 노인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천면호리 송호.’
전(前) 무림맹 은영각주이자, 신(新) 무림맹의 은영각주로 돌아온 그가 고개를 작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올라가시지요. 다과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 * *
무림맹은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가슴팍에 맹(盟)이라는 글자를 은빛 수실로 새겨넣은 이들이 곳곳에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뿐만 아니라 정갈한 문사 차림을 한 이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역시 은영각주라는 직함은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다.
내 시선에 담긴 의문을 즉각 알아차린 듯, 나란히 옆에서 걷던 천면호리가 짧게 설명했다.
“저들은 맹주부(盟主部) 직속일세.”
“왠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쪽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대로 봤군. 맹주부 직속인만큼, 기밀 유지를 위해 다른 문파에 속하거나 신분이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이들은 선별하지 않았지. 자, 이쪽으로.”
무림맹 내부는 평야처럼 광활하면서도 미로처럼 복잡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빼곡하게 솟은 전각 등의 건물이 즐비했고, 저 멀리 보이는 연무장에서는 기합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처음 마차에 내렸을 때만 해도 그 장소가 내성(內城)에 속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비는 삼엄해졌고 인적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아무리 호흡을 죽이고, 고도의 은잠술(隱潛術)을 펼친다고 해도 내게는 느껴진다.
벽면. 천장 위.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곳을 주시하는 시선과 그들이 품은 기운들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들이 은영각입니까?”
불쑥 던진 물음에 천면호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다섯 번째 문을 지날 때부터.”
“지금도 느껴지나?”
“예.”
“대단하군. 정말이지 대단해. 저들 네 사람은 은영각 내에서도 살수로 길러진 이들인데. 기척을 완벽하게 파악하다니.”
탄성을 흘리는 천면호리의 모습에, 나는 턱을 긁적였다.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시험입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시험이면 재미없네요. 넷이 아니라 다섯입니다.”
스으윽.
벽면에 걸어놓은 횃불이 작게 흔들렸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그건 주위에 은신해 있던 은영각 요원들의 동요를 드러내는 유일한 증거였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천면호리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설마 했는데, 우연이 아니었군.”
“사실 찍었습니다.”
“…….”
“농담이고, 수하분들께서 다들 실력이 뛰어나시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채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천면호리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스쳤다.
그것은 나를 시험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진심이 담긴 경탄과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군. 자네의 무위에 대해서는 그간의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게 예측했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새롭게 깨달음을 얻었나?”
깨달음이라.
나는 열흘간의 장강 표류 수련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문경이 지시한 수련을 하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무공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기(氣). 그 자체를 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의 내가 동아줄을 이용했다면, 지금은 실타래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력의 운용에 대한 이해도 올라갔고, 기감 역시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졌다.
“아마도, 조금은요.”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로군. 믿기지 않을 정도야.”
천면호리의 말에, 아까부터 나를 힐끔거리던 벽력도왕이 중얼거렸네.
“확실히……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네놈 같은 괴물은 또 처음 보는구나. 내 장손주 녀석과 좋은 경쟁 상대가 되겠어.”
“그, 장손주분 성함이?”
“팽도진.”
“펭도리요? 확실히 스타팅 포켓몬으로 좋죠. 귀엽고.”
“무슨 개소리냐! 팽도진, 팽도진 말이다! 성라대연 때 네 녀석과 접전을 펼쳤던!”
벽력도왕의 외침에 뒷골목 시정잡배처럼 휘적휘적 걸어가던 적천강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한테 일각 동안 개처럼 맞다가 항복한 그놈 말이다. 나이가 이립이던가.”
“아하. 이제야 기억나네. 마지막에는 도를 지팡이로 쓰시던데.”
“이, 이이……!”
“괜찮습니다. 원래 젊을 때는 여기저기서 맞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거죠.”
적천강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꼬마처럼 환한 얼굴로 내 말을 받았다.
“팽가야. 그건 나이 들어도 마찬가지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거라. 아무리 해 봤자 제 할아비처럼 반로환동도 못하고 늙어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이런 개 같은……!”
“크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의 최대 피해자는 창천검왕이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도 야무지게 들어오는 데미지에 노검객의 눈 밑 살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들려온 매종학의 한마디는 쐐기를 박는 화룡점정이었다.
“다들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시구려. 그냥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니까.”
“……!”
“……!”
저게 말이야 방구야.
반로환동이 자연스럽게 되는 거였으면 천하 무림인 중에 절반은 반로환동이었겠다.
벽력도왕과 창천검왕. 두 사람이 한 치의 악의도 담겨 있지 않은 매종학의 말에 화도 못 내고 입을 다문 그때, 지금껏 무림맹에서 본 것 중 가장 크고 높게 솟은 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시지요.”
처음에는 맹주가 거주하는, 뭐 그런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착각으로 판명 났다.
타다다닥!
“강소(江蘇)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등급은?”
“지(地)급입니다.”
“관련 안건 정리해서 옮겨. 소평, 황소, 장일팔은 한 식경 안으로 보고 올리도록.”
촤촤촤촥!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전각 곳곳에 복잡하게 얽힌 정체불명의 원통을 통해 이동하는 죽간과 문서들.
이 모든 혼잡한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던 천면호리가 입술을 열었다.
“호북(湖北), 무당(武當), 천(天)급.”
짧은 단어의 나열을 들은 문사 복장의 누군가가 고리를 잡아당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쉬잉! 텅!
옆에 늘어져 있던 원통을 타고 떨어진 죽간 하나가 펼쳐졌다.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신 이유입니다. 닷새 전, 호북의 무당파로부터 도착한 급보지요.”
그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죽간에 적힌 내용을, 아니 그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수신룡이…… 전부가 아니었군.’
검은 먹으로 그려진 정체불명의 무언가.
그건 누군가에게는 낯설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낯익은 어떤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