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02
#601화
복구가 진행되고 있는 아레스 길드 본사.
회의실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거대한 원형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자리에 앉은 삼십여 명의 남녀들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한 사람의 입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해서, 이렇게 긴급회의를 소집하게 된 걸세.”
초조한 기색의 중년인. 박대원 부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허, 참. 어지간히 얕보였군요. 그것도 서른도 안 된 어린놈한테.”
“뻔히 보이는 의도도 가소롭습니다. 이건 숫제 우리 아레스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것 아닙니까.”
“아니, 형님. 왜 권한도 없는 외부인의 요청으로 긴급회의를 소집합니까? 아무리 형님이 부사장이어도 이건 아니죠.”
사방에서 쇄도하는 비난의 목소리에, 박대원 부사장은 손수건으로 반쯤 벗겨진 이마를 문질렀다.
어느덧 환갑을 코앞에 둔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후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쟁에서는 두각을 드러냈지만, 정쟁(政爭)에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다행히 적을 만들지 않는 성격 덕분에 지금까지 허울뿐인 부사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열흘 전, 은퇴를 앞두고 떠난 휴가 도중 믿지 못할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한 사람에 의해 아레스 길드 본사가 격파당하고, 부길드장인 석고준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처음 십 분 동안은.
하지만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삼십여 년간 공들여 세운 철옹성은 무너졌고, 새롭게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임 성주는 목이 달아났다.
그리고 검찰의 포승줄을 간신히 피한 신하들은 입을 모아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헛소리, 들어 줄 필요도 없어요.”
“아레스라는 이름을 만든 것도 우리고, 지켜 낸 것도 우리요.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핏덩이가, 그것도 외부인이 무슨 자격으로 끼어들어?”
“박대원 부사장님,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
박대원은 말없이 물잔을 들이켰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최소 십 년, 최대 삼십여 년을 아레스 길드에 몸담은 중역이다.
길드 내의 실권을 틀어쥔 실력자들 대부분이 검찰 소환에 불려갔다 해도 저들의 힘은 절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 최민우에 관해서는 박대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천태민의 사생활 및 가족 관계는 철저히 보호되어 있었지만, 측근으로 분류되는 소수의 인물에게는 달랐으니까.
창립 멤버에 포함되어 있던 박대원도 그중 하나였다.
‘돌잡이 때 처음 보고,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던 그 아이가 어느덧 훌쩍 커서 돌아왔다. 오래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하여.
모든 상황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왔던 박대원은 그 사실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그것은 길드 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최민우를 외면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오는 얄팍한 죄책감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박대원이 고심에 잠겨 있던 그때,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럽던 회의장에 짧고 굵은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갈수록 가관이라 더는 못 들어 주겠네.”
“……!”
“……!”
순간 회의장에 내려앉은 싸늘한 침묵. 눈을 부릅뜬 여러 쌍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김 상무님, 그게 무슨 망언이십니까!”
“상무님은 무슨. 야, 김광필이! 넌 무슨 개소리야!”
짧은 침묵 후 터져 나온 거친 외침에, 김 상무가 딱 벌어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가관이라서 가관이라고 한 것뿐인데. 그리고 백 전무님, 말조심합시다. 아무리 제가 후배여도 그런 말은 듣기 좀 거북합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저 배신자 새끼가……!”
김 상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요. 배신자?”
“그래, 이 새끼야! 너 같은 배신자 새끼들만 없었어도 이런 개 같은 상황도 없었어!”
“개같이 굴던 건 백 전무님 쪽 식구들 아닙니까. 그건 지금 누가 구치소에 있는지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 같은데?”
“뭐?”
“저와 몇몇 임원들이 진태경에게 합류했던 게 그리 거슬리셨던 모양인데, 결국 석 부길드장. 아니지, 석고준 그 인간이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혹시 백 전무님도 한 다리 걸치신 겁니까?”
“너, 너 이 새끼……!”
“어이, 김 상무! 말조심해!”
“말조심해야 하는 건 당신들이지!”
“옳소!”
“이 작자들이 감히 어디서!”
두 파로 나뉘어 온갖 고성이 오가는 회의장 내부. 홀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대원 부사장이 불쑥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외부인은 아니지.”
그 한 마디에, 핏대를 세워 가며 싸우던 중역들이 멈칫했다.
“예?”
“부사장님. 지금 뭐라고…….”
“최민우 그 친구 말일세.”
삼십여 명의 중역들을 천천히 훑은 박대원이 말을 이었다.
“그분, 천태민 길드장님의 하나뿐인 외손자가 아닌가.”
“……!”
“……!”
정확히 맹점을 찌르는 한 마디에 회의장이 정적에 잠겼다.
순간 김 상무를 비롯한 일파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떠올랐고, 내내 불만을 성토하던 이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 그건 단순한 루머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형님. 아직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이에요.”
소격변 이후부터 최민우의 신분에 관해서는 알음알음 이야기가 새어 나간 상황.
그러니 저들의 언행은 모른다기보다는 모르는 척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적어도 박대원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확실하네. 내 기억으로는 그분의 외손자가 틀림없어. 그리고…….”
누군가가 애써 반박하기도 전에, 박대원이 손에 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본인 스스로도 밝힐 생각을 굳힌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
“서로 치고받는 것도 좋지만, 바깥 상황 정도는 확인했어야지. 각자 데려온 비서들도 출입을 금지한 상황인데. 그렇지 않나?”
그 말에 뭔가를 깨달은 사람들이 황급히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불과 일 분 남짓한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헉, 하고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수십여 대의 스마트폰에서 재생된 영상 속, 기자의 다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최, 최민우 씨! 외조부님의 함자를 다시 한번 정확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한 사람의 목소리가, 회의실 내부를 울렸다.
– 천, 태 자에 민 자. 천태민. 그분이 바로 제 외조부십니다.
– ……!
– ……!
끊임없이 들려오던 카메라 플래쉬 소리도, 웅성거리던 소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식 기자 회견이 열린 영상 속 장소뿐만 아니라, 회의실 내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짐작. 그러나 그 짐작이 사실로 변하고, 세상에 공표되었을 때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천태민의 유일한 핏줄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더불어 회의실 안의 모두는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침내 칼을 뽑았다.’
유배나 다름없던 이십여 년의 세월.
마침내 돌아온 왕손(王孫)은 가장 적절한 시점에서 가장 예리한 칼을 뽑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기 위하여.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칼날이 어디로. 또 누구를 향해 휘둘려질 것인지다.
꿀꺽.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 속, 작은 속삭임들로 채워진 시간이 흘러가던 그때였다.
삑.
미세한 전자음과 함께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넓은 회의실 벽면에 걸린 시계였다.
마치 위험을 알리는 듯한 붉은 LED에는 현재 시각이 떠올라 있었다.
PM 06 : 00
오후 여섯 시.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 동시에 누군가의 등장을 의미하는 시간.
저벅, 저벅.
문밖 복도를 가로지르는 구둣발 소리를 모두가 들었고,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칵.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 모여 계셨군요.”
“어, 여기 금방 고쳤네. 내가 지난번에 부쉈던 것 같은데.”
정중한 동시에 무례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점령군의 등장이었다.
* * *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고는 했다.
아들아, 남자가 한 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 팀장은 남자 중의 상남자였다. 무가 아니라 아레스 길드를 썰어 버리려고 이곳에 왔으니까.
“…….”
생각해 보니 내가 이미 한 번 썰어 버리긴 했었지만, 어쨌든.
“반갑습니다. 최민우입니다.”
최 팀장이 정중한 인사와 함께 목례를 취하자, 커다란 원탁을 중심으로 일어나 있던 아레스 길드의 중역들이 엉거주춤 인사를 받았다.
3초 후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띤 낯익은 얼굴들도 있다.
본사 습격 당시 내 편에 섰던 송천우 계파의 중역들이다.
하지만 판단하기 애매한 태도를 지닌 사람도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늙수그레한 중년인. 박대원 부사장이 바로 그랬다.
“오셨습니까. 최민우 팀장님.”
복잡한 표정을 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기자 회견이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본의 아니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다들 표정을 보아하니 본방 사수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물론 그중 절반 정도는 수신료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지만.
“그럴 리가요. 그럼 말씀 전에 우선 자리로…….”
“괜찮습니다.”
자리를 권하려는 박대원 부사장을 만류한 최 팀장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어차피 금방 끝낼 테니까요. 아직까지는 다른 분들도 절 외부인으로 생각하실 테니, 이야기가 길어지면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크흠.”
뼈가 있는 말에 곳곳에서 헛기침이 튀어나온다.
그런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둘러본 최 팀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지금 보니 다섯 자리가 비는군요. 고문(顧問)직에 계신 세 분.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 지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꼬장꼬장해 보이는 중년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쪽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
“제 기억력이 좋은 편입니다, 백 전무님.”
“…….”
백 전무가 입을 다문 그때, 열흘 전 내 편에 붙었던 중역이 신속하게 대답했다.
“오지 않았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죠?”
“세 분의 고문님들께서는 병환을 이유로 불참하셨고, 두 지사장은 참석을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
“꼭 참석하라고 말씀드렸는데. 제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최 팀장이 담담하게 뇌까린 그때, 백 전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건 공식 회의가 아니라, 외부인의 요청에 의해 모인 자리요. 꼭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지. 설령 그 외부인이…….”
순간 머뭇거리던 그가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의 외손자라고 해도.”
“맞는 말씀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최 팀장이 품에서 자그마한 메모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요?”
“병환을 앓고 계신 고문님들께 전해 드리는 처방전입니다. 아, 다른 지사장님 두 분께는 처방전 대신 다른 무언가가 갈 겁니다.”
아마도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당사자들은, 저 메모를 본 순간 모든 병에서 회복할 거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 사실이 낱낱이 적혀 있으니까.
메모를 확인한 백 전무도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거.”
“백 전무님도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처방전을 따로 드릴까요?”
“아, 아니. 이 사람이 그게 무슨! 나, 난 괜찮아!”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괜찮아는 반말 아닌가?”
“괘, 괜찮소.”
“소리 없이 죽이는 101가지 방법, 저자 진태경.”
“괘, 괜찮습니다.”
음. 말귀가 어느 정도 트인 사람이 분명하다. 마른침만 꼴깍거리며 서 있는 그를 힐끗 바라본 나는 최 팀장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앉아서 얘기하면 안 됩니까? 다리 아픈데.”
“글쎄요.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말꼬리를 흐리는 그를 대신해, 나는 친절하게 상석을 가리켰다.
“저기. 자리 비었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앉아도 되겠습니까?”
“투표하죠. 다수결의 원칙으로. 불만 있으신 분. 손?”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