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03
#602화
채찍질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때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 팀장은 자신이 쥔 채찍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홍 이사님.”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최 팀장의 호명에, 가장 젊은 축에 드는 중역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예.”
“홍 이사님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수완이 아주 뛰어난 분이시라고.”
“아,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아레스 길드의 중역은 운이 좋다고 올라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죠. 특히 홍 이사님처럼 젊은 나이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
최팀장의 어조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오히려 홍 이사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최 팀장이 수십 명의 중역 중 굳이 한 사람만을 콕 집어 말을 꺼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어릴 때 해외에서 자라다 보니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그런지, 하나둘씩 친구가 생기더군요.”
제아무리 유배당했다고 해도 결국은 왕손. 나 같은 소시민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온 최 팀장의 인맥은 상상 이상이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주더군요. 홍 이사님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아주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물론 다른 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최 팀장의 담담한 시선이 옮겨질 때마다 시선을 마주친 중역들은 불에 덴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물이 고이면 결국 썩기 마련이지.’
아레스 길드는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집단이고, 그런 곳의 중역은 천문학적인 부와 명예를 움켜쥘 수 있는 자리다.
이 자리에 모인 중역 중 청정수처럼 깨끗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들이 아직까지 검찰의 소환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청렴결백해서가 아니라 3급수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폐수(廢水)나 오물이 둥둥 떠 있는 자들은 이미 구치소에서 정모를 벌이고 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식은땀을 흘리시는데.”
최 팀장의 질문에, 홍 이사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더워서요.”
“온도 조절 마법에 문제가 있나 보군요. 빨리 고치는 게 좋겠습니다.”
회의실 내부는 마법에 의해 딱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중역 중 절반은 습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더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모두가 최 팀장이 소매에 감춘 채찍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넌지시 보여 줌으로써 중역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불편해서 못 들어 주겠군.”
입을 연 것은 신경질적인 눈매의 중년인이었다. 흰 수염이 듬성듬성한 그는 굵은 손마디로 원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감히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아시아 지역을 맡고 계신 김 지사장님이시군요.”
노골적인 질문에 최 팀장이 턱을 쓸며 되물었다.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그렇다면?”
“반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이니까.”
“뭐라고?”
“사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협박하고 있고, 아레스 길드를 제 것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최 팀장이 부드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모두의 동의를 구해서,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도마뱀이 공룡을 삼키겠다는 소리군.”
최 팀장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김 지사장이 피식 웃었다.
“어린놈들이라 그런지, 아직 몰라도 한참 모르네. 아레스 길드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나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약간?”
“…….”
막상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본사가 무너졌다고 해서, 아레스 길드 전체를 병신으로 보면 곤란하지. 아무리 강해도 우리를 당해 낼 수 있을 것 같나?”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전 세계에 수많은 지사를 둔 아레스 길드의 규모는 거대하고, 본사의 병력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들 전부를 홀로 제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서, 뭐?”
내 물음에, 김 지사장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쳤다.
“뭐?”
“뭐, 인마.”
“인마?”
“씨벌놈이, 확 그냥.”
“……어?”
이거 뭐 하는 새끼지. 딱 그 표정이다.
주먹을 치켜든 내 모습에 본능적으로 엉거주춤 의자를 뒤로 뺀 지사장이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뭐긴. 조지려는 거지.”
“무력을 쓰겠다고? 지금? 여기서?”
“그럼 지력을 쓸까. 가뜩이나 능지가 처참해서 슬픈데.”
“아니……. 그렇게 되면 불법인데?”
“열흘 전에 석고준 모가지 딴 건 합법이었냐?”
“……!”
“어떻게든 되겠지, 뭐. 어차피 이미 몇 명 골로 보냈는데 한 명쯤 추가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안 그래요?”
내 질문에 최 팀장이 입맛을 다셨다.
“이건 좀 사안이 달라서, 뭐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요새 분위기가 좋긴 한데, 아무리 나라도 징역은 못 피하겠지?”
“그렇죠. 하지만 현재 진태경 씨에 대한 이미지나 여론이 워낙 좋으니까, 잘만 하면 몇 년 정도로 퉁 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다. 술 먹으면?”
“천재십니까? 그럼 확 줄어들죠.”
“생각해 보니까 요새 너무 고생해서 심신 미약 걸린 것 같기도 한데.”
“오, 집행 유예도 노려 볼 만합니다.”
멋진 나라다. 술 먹고 심신 미약 주장하면 감형 서비스도 팍팍 넣어 주고.
하지만 우리의 희망찬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이, 이런 미친놈들.”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몰랐어? 나 미친놈인 거.”
“……!”
“처신 잘하라고. 좋게좋게 가려고 하는데 왜 혼자 엇나가?”
물론 말만 이렇게 하는 거다, 말만.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와닿느냐다. 눈깔이 뒤집힌 채로 아레스 길드 본사를 박살 내고, 앞뒤 가릴 것 없이 살인을 저지른 미친놈. 그게 바로 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농담도 진담처럼 들릴 것이다.
‘채찍이 안 통하는 놈에게는, 존나 센 채찍이 필요한 법이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던 반동분자마저 입을 꾹 다문 그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박대원 부사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특히 최민우 팀장님께서 아레스 길드로 돌아오시는 것에 대해서는…… 부사장의 이름으로 찬성합니다.”
“부, 부사장님.”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그게…….”
그의 갑작스러운 의사 표명에 당황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최 팀장은 준비해 온 당근을 그들에게 던졌다.
“만약 다른 분들이 박대원 부사장님의 의견을 수렴하신다면, 아레스 길드는 빠르게 안정될 겁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발생한 공석도 곧 채워지겠지요.”
“……그 말씀은?”
“지금까지의 일들과는 별개로, 전 여러분들의 능력을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상황이 진정된다면 파격적인 인사이동이 있겠죠.”
당근의 정체를 확인한 토끼들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레스 길드의 주인이 바뀐다면 가장 위태로운 것은 기존의 중역들. 그러나 그 걱정이 사라지고, 오히려 승진이라는 보상을 약속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부할 이유가 없지.’
더군다나 최 팀장에게는 마땅한 결격 사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그것이 그가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말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이유였다.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잊겠습니다. 신속히 혼란스러운 길드 내부를 안정시키고,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킬 것이며, 이번 일을 발판으로 삼아 더욱 크게 성장시키겠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비단 자신들에게 주어질 당근의 존재 때문만이 아니라, 최 팀장의 능력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불과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평화 길드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그다. 내 존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최 팀장의 사람 보는 눈과 경영자로서의 능력, 그리고 정치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화 길드도 없었다.
더군다나…….
‘천태민의 하나뿐인 핏줄이기도 하지.’
이 나라에서 왕조(王朝)는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천태민의 이름은 신성(神性)의 영역에 있다.
인류를 구한 구원자의 핏줄은 그 자체로 고귀하며 힘을 가진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재벌 그룹도, 지금까지 존재해 온 어떤 왕조도 감히 최 팀장의 위에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타이틀은, 특히 아레스 길드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음.”
회의실 곳곳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정룡과 석고준은 찬탈자에 불과했으며, 부정할 수 없는 정통성과 능력을 지닌 최 팀장이야말로 새로운 성주에 적합하다는 것을.
드르륵.
고요한 침묵을 깨트리는 마찰음과 함께, 십여 명이 넘는 중역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흘 전을 기점으로 이미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망설임 없이 최 팀장을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
“……!”
이미 흐름은 넘어왔다. 채찍과 당근을 확인했으니,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중역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드륵.
연이어 울려 퍼지는 마찰음 속. 나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전음을 흘려보냈다.
– 아이, 싯팔 진짜…….
“……!”
“……!”
그러자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떤 두 사람, 백 전무와 김 지사장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했다.
이제 회의실 내의 중역 중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박대원 부사장.’
나와 최 팀장의 시선을 받으며, 마침내 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른 입술 사이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제가 곧 은퇴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최 팀장의 모습에, 박대원 부사장이 작게 뇌까렸다.
“그럼 이게 제 마지막 일이 되겠군요.”
“원하신다면 더 머무르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신경 써 드리지 못해 죄송했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이들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아레스 길드에 몸담았다는 것은, 최 팀장을 가장 오랫동안 외면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최 팀장을 바라본 박대원 부사장이 정중히 목례를 취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한마디와 함께.
“공식 이사회를 소집하겠습니다, 도련님.”
“……!”
최 팀장의 눈동자에 빛이 스쳤다. 삼십여 명의 가신(家臣)에 둘러싸인 그는, 이미 성주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