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1
#830화
마계의 주인. 몬스터의 군주.
마왕 아스모데우스.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모든 재앙의 시작점이자 근원 그 자체였던 악마의 존재를.
– 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다! 모두 왕께서 시킨 일이라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냐!
나는 다급하게 외치는 도플갱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짧은 갈등 끝에, 발끝을 향해 흘려보내던 공력을 회수했다.
– 쿨럭, 컥.
가슴에 가해지던 압박감이 해소됨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기침.
참았던 숨을 토해 낸 도플갱어가 분노와 고통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무려 170레벨에 달하던 네임드 몬스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력한 모습.
그러나 지금 마주하고 있는 저 작은 그림자야말로, 도플갱어의 본질이자 유일한 진실이었다.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지금껏 수많은 생명을 갈취해 왔겠지.’
닥치는 대로 뺏고, 흡수하고, 소화했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양분 삼아, 계단 삼아 강자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즐겁게 먹고 마시던 만찬의 시간도 오늘로 막을 내렸다.
도플갱어를 마치 신처럼 떠받들던 광신도들도, 몬스터 군단도 곁에 없는 지금. 놈의 앞에 놓인 길은 단 하나뿐이다.
“모조리 토해 내.”
꾸득.
잠시나마 사라졌던 천근(千斤)의 압력이 발끝에 실린다.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는 도플갱어를 응시하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게 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지.”
마왕 아스모데우스.
악(惡), 그 자체이자 근원.
내가 도플갱어의 입을 통해 듣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저주받은 존재에 대한 정보였고, 이 세상의 미래였다.
“조금 전에 했던 그 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갈라진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낯설다.
마치 모래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입안이 까끌거리는 것은, 비단 피로와 갈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놈이, 마왕이…….”
한 음절, 한 음절이 힘겹다. 감히 입에 담기도,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나는 안다.
현실을 외면한 이들이 어떠한 말로를 맞이했는지. 그렇게 애써 외면한 현실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산불을 피하기 위해서는 불의 존재를 인지해야 한다.
솟아오르는 연기와 붉은 화마(火魔)를 눈으로 확인하고, 타들어 갈 것 같은 열기를 느껴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아직, 살아 있나?”
숨 막히는 침묵 속, 머리 위로 작은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만이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다.
나도, 스켈레톤 킹도, 마지막으로 도플갱어도.
아주 잠시 동안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인간의 것이 아닌 그림자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 살아 있냐고?
스륵.
어둠이 일렁인다. 이목구비도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새까만 심연이 길게 찢어진다.
– 너는 모른다. 선택받은 자여. 동시에 언젠가는 세월에 꺾이고, 흙이 되어 스러질 어리석은 필멸자여.
도플갱어는 웃고 있었다.
나에 대한 분노도, 고통도, 두려움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혹은 그 모든 것을, 이 자리에 없는 주인의 존재감으로 덮어 버린 채.
– 위대한 왕께서는 신의 저주를 극복하신 분. 흔들리되 꺾이지 않으며, 스러져도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상 모든 흙과 물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
– 그것만이 진실이다.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진실.
나는 멍하니 소리 내어 웃는 도플갱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그 눈을 마주한 그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사방에 자욱하던 모래 먼지와 돌무더기도, 스켈레톤 킹과 도플갱어도 사라졌다.
아니, 내 의식이 송두리째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동시에 지금껏 본 적 없는, 환영과도 같은 광경이 마치 유성우처럼 눈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솨아아아악.
동쪽에서 떠오른 찬란한 태양이 세상을 물들인다. 푸른 하늘 위로 내달리는 구름. 이내 석양빛과 함께 달이 떠오르고 어둠이 찾아온다.
하루, 또 하루.
그것은 언젠가 봤던 자연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처럼 빠르게 흘러갔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솟구친다.
드넓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야생동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내달린다. 석양과도 같은 화염을 등진 괴물들이 지평선을 메우며 진군했다.
드드드득.
수십, 수백만.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의 대군세(大軍勢)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지축을 뒤흔들고, 하늘을 뒤덮었다.
캬우우우!
구름 위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끔찍한 포효.
거대한 날개가 구름을 훑고 햇빛을 가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만든 그림자가 내 눈앞에 드리워졌다.
쉭.
시야가,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동시에 뒤바뀐 풍경 속에서, 나는 불타오르는 도시를 볼 수 있었다.
꽈아아앙!
수백여 개의 포신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고층 빌딩과 키를 나란히 하는 거인들이 불길에 휩싸여 주춤하는 사이, 빛살처럼 쏘아진 신형들이 파괴된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들었다.
광휘로 타오르는 무기를 들고, 피를 토하듯 자신들의 결의를 부르짖으며.
– 절대 물러서지 마라! 맞서 싸우라!
– 인류를 위하여!
그들은 헌터였다.
저주받은 존재들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검과 방패.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선택으로,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은 전사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아득한 허공 위에서 그 장엄한 돌격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수십 배가 넘는 몬스터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자신들의 외침을 증명하듯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인류를 위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나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듯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피로 물들고 산산조각 난 피사의 사탑에 수백여 명이 압사(壓死)당하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의식이었으며 관전자에 불과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쉴 틈 없이 뒤바뀌는 풍경 속에서 잿더미로 불타오르는 문명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보고 듣는 것이,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권리이자 저주였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 그리고 파괴.
거리가 시체로 뒤덮였다. 꺾여 나간 교회의 십자가가 피 웅덩이에 처박혔다.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작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아이 하나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고블린 무리를 발견하고 손에 쥔 인형을 떨어트렸다.
재앙(災殃).
뜻하지 않은 불행한 변고를 뜻하는 말.
하지만 대격변을 상징하는 그 단어로도 감히 내가 본 끔찍한 광경들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문득 한 단어를 떠올렸다.
‘종말(終末).’
그래, 그것은 종말이었다.
인류가 기나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문명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줌의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희망은 이미 죽었다.
한 사람씩. 천천히.
수백, 수천의 조각으로 나뉘어 굶주린 몬스터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 매직 존슨을 위하여.
수많은 촛불이 일렁이는 거대한 광장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한쪽 팔을 잃어버린 최 팀장이 술잔을 비운다.
샤오 쉔이 물기 어린 눈으로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 일 년 전 오늘, 영원한 별이 되어 버린 ‘엉클 척’ 헤이글과 우리의 친구 스톤 킹을 위하여.
한 잔, 또 한 잔을 채우고 비울 때마다 연호되는 이름을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광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이라는 것을.
앞서 떠나간 영웅들을, 인류의 희망이었던 그들을 마지막으로 되새기는 출정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 누구보다 용맹했던 그를 위하여.
– 어둠에 맞서, 언제나 모두의 앞길을 밝혀 주었던 인류의 빛을 위하여.
내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 진태경을…… 위하여.
파르르 떨리던 목소리가 끝맺어진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술잔을 비운 최 팀장이 주먹을 쥐었다.
콰직.
산산이 부서진 잔의 파편과 함께 손아귀에서 흐른 핏물이 땅을 적신다. 촛불이 일시에 꺼지고 광장 전체가 침묵에 잠긴다.
동시에, 최 팀장의 허리춤에서 빛이 부풀어 올랐다.
화아아악.
영웅의 검.
깨지고 부서졌으나 여전히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고 있는 검신 위로, 거대한 광휘가 샘솟았다.
촛불이 꺼진 광장 전체를 감싸안으며 짙은 어둠을 흐릿하게 밝혔다.
펄럭.
어느샌가 저 멀리에서 다가온 거센 바람이, 수십여 개의 크고 작은 깃발을 맹렬하게 흔들었다.
검과 방패가 교차된 문양. 조악한 그림으로나마 재현한 그것은 바로 세계 헌터 연맹의 깃발이었다.
– 물러설 곳은 없다.
쿵. 쿵쿵.
수천, 어쩌면 수만의 발끝이 지면을 굴렀다. 영웅의 검에 맺힌 광휘가 그들을 얼굴을 하나하나 비추었다.
– 물러서서도 안 된다.
캉! 카강!
허공에서 부딪친 날붙이가 불꽃을 토해 낸다. 탱커들이 커다란 타워 실드를 미친 듯이 내리찍고 두드렸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맥동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의 뜻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떠나간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앞서 벌어질 전투를 기다리며 자신들의 새로운 맹주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마디를 기다렸다.
– 우리는 오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다.
차차차차창!
와아아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솟구친 수많은 오러가, 하나의 목소리로 내지르는 아득한 고함이 어둠을 밀어낸다.
광장을 밝히던 촛불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지만, 인류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마지막 불꽃을 잠재울 어둠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스아아아악!
그 순간.
바람이 멈췄다.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한껏 열기가 달아올랐던 광장이 차갑게 식고, 수많은 눈동자가 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 어둠을 두른 한 존재가 있었다.
– 아아…….
누군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그 신음이, 내 귓가를 파고든다.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붕 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마왕.’
본능과도 같은 공포가,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 의지에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모두가 바라보는 그 방향을 따라, 놈을 보았다.
마왕 아스모데우스.
과거에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미래에도 인류를 불구덩이를 밀어 넣은 저주받은 왕을.
그리고 저 멀리 꿈틀거리는 어둠을 향해 눈을 부릅뜬 순간.
쩌저적.
나를 둘러싼 세계가, 모든 허상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