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49
#848화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 기절하는 것일까.
만약 시스템창이 내 인생을 요약한다면, 정신을 잃은 채 흘려보낸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젠장.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내가 지금 막 깨어났고, 웬 괴물같이 생긴 못생긴 놈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뿐이었다.
“엇, 시벌. 깜짝이야. 누구세요?”
괴물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접니다.”
“접니요?”
처음 들어 보는 특이한 이름에, 꿈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얼굴.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혹시 사천당가 분이신가?”
“…….”
“당접니?”
“조장님, 장난이 과하신데요.”
조장님. 괴물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세 글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적어도 지금 나를 저런 호칭으로 부르는 놈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무진이냐? 혁무진?”
“예.”
“세상에, 너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한테 얻어맞아서요.”
원래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사소한 일은 잊기 마련이다.
그제야 며칠 전 혁무진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팼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네. 너무 잘생겨져서.”
“……감사 인사라도 드려요?”
“주면 나도 고맙게 받지. 그런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이 정도로 얼굴이 좆…… 아니, 잘생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웬 미친놈이 절 영원히 잠재우려고 했습니다. 속수무책이었어요.”
“미친놈? 누구?”
“인생의 최우선 목표가 배 터지도록 처먹는 것밖에 없는 놈이요.”
내가 아는 이들 중 그런 미친놈은 딱 두 명밖에 없다.
청풍. 그리고 태산.
물론 지금쯤 살성과 함께 천하 곳곳을 누비며 암천의 흔적을 찾고 있을 청풍이 뿅 하고 사천당가에 올 리는 없으니, 남아 있는 미친놈은 하나뿐이다.
“지금 제 얼굴 보이세요? 태산이 그 미친놈이 붓기도 가라앉기 전에 때려서 세 배로 부었어요.”
“세 배로 잘생겨진 건 알겠으니까, 우선 얼굴 좀 치워 봐. 아니면 일으켜 세워 주든가.”
“죄송한데 그건 안 됩니다. 이 이상으로 가까워지면 조장님 입 냄새까지 나잖아요. 가뜩이나 지금 여기에서 버티는 것도 힘든데.”
“뭐?”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콧속을 파고드는 끔찍한 악취를 인지하기 전까지는.
“으읍.”
나는 올라오려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혁무진이 손에 들고 있던 물주머니와 천 쪼가리를 건넸다.
“냄새 장난 아니죠? 우선 저처럼 이걸로라도 코 막고, 물로 입 헹구세요. 그리고 가급적 말씀하실 때는 입을 가리…….”
“지금보다 더 잘생겨지기 싫으면 입 좀 다물어라. 속 울렁거려서 죽겠으니까.”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짜 지금 조장님 입 냄새 장난 아니에요. 도대체 뭘 드신 겁니까?”
“똥.”
“세상에, 그런 걸 왜 드셨어요?”
“…….”
혁무진 저 새끼는 정말 이걸 곧이곧대로 믿는 걸까. 아니면 날 조금이라도 엿 먹이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혁무진이 건네준 천 쪼가리로 콧구멍을 단단히 틀어막고, 입 안을 몇 번이나 헹구고 나니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적천강에 의해 그 끔찍한 단환을 강제로 삼켰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신을 잃기 직전 몸 안으로 스며드는 열기를 느끼긴 했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더없이 익숙한.
그렇기에 뜨겁다기보다는 따스하게만 느껴졌던 열기를.
‘노야의 열양지기(熱陽之氣)였어.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듯, 기운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열양지기를 이용하는 문파가 천하에 몇 개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열화문(熱火門)이라는 뿌리는 달라지지 않는 법.
내가 느꼈던 그 기운은 틀림없이 적천강의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이 말끔하게 정리된 내부. 그러나 공기 중에 스며든 악취와 바닥에 남은 거무스름한 자국은 여전했다.
“저거 닦는 데 엄청 힘들었습니다. 끈적거리고 냄새나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눈치 빠르게 입을 연 혁무진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신의께서 남기신 말씀에 의하면 몸 안의 노폐물이 점액 형태로 흘러나온 거라던데, 그. 정확히 뭐라 하셨더라. 아는 거였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요. 추. 추…….”
“추궁과혈(推宮過穴).”
툭 던진 한마디에, 혁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 추궁과혈이요.”
말로만 들을 수밖에 없다. 추궁과혈은 상당한 준비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만큼 쉽게 시도하지 않으니까.
설령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심한 심력(心力)을 소모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공력 일부를 상대의 신체 안에 고루 흡수시켜야 하는 것이 추궁과혈이었다.
‘그마저도 실패하면 타격이 극심하지.’
하지만 적천강은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추궁과혈을 실시했다. 상당한 위험과 공력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물론 그에게 추궁과혈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감사와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사경(死境)을 넘나드는 상황이었다면 내가 먼저 부탁했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게 버텨 왔다.
더군다나 지금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모두를 위해서라면 열화신룡 진태경이 아닌, 화왕 적천강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보존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노야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혼쭐이 나겠지.’
작게 실소를 흘린 나는 열양지기를 끌어올렸다. 눈에 띌 만큼은 아니어도 확실히 증가한 공력이 대번에 느껴졌다.
‘천천히. 신중하게.’
마치 용암을 흘려보내듯, 삼 갑자를 약간 웃돌게 된 열양지기를 전신 사지 백해로 퍼트렸다. 동시에 몸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조용히 관조(觀照)했다.
더 넓고 튼튼해진 혈도. 노폐물의 배출로 맑아진 핏물과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장기들까지.
흐읍.
나는 길게 숨을 삼키며 열양지기를 더욱 빠르게 흘려보냈다.
천천히 흐르던 용암이 들판을 휩쓰는 불길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아아아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소주천(小周天)으로 시작했던 운기조식은 대주천(大周天)이 되었고,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혈도를 휩쓸며 다시 한번 신체 내부를 정리한 화룡은 마침내 하단전으로 돌아와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그 순간.
욱신.
불현듯 하단전을 엄습한 통증에, 운기조식을 끝마친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신의가 제조한 그 끔찍한 단환의 약효도, 적천강의 추궁과혈도 현재의 내게는 최선의 치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끝내 완치(完治)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남발한 대가는 쓰디썼고, 아무리 아쉬워해 봐도 냉정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물을 받아낸 그릇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가능한 만큼만 담아내거나, 쏟아지는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깨져 나가거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후자였다.
“……아직까지는 금이 간 정도지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에, 자연스럽게 호법을 서고 있던 혁무진이 반문했다.
“예? 뭐가요?”
“넌 몰라도 돼. 그냥 그런 게 있어.”
“와, 너무하시네. 저처럼 충성스러운 오른팔이 어디 있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넌 끽해야 새끼발가락이야.”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뭐?”
“새끼발가락이요. 문지방에 찧으면 제일 아픈 부위 아닙니까.”
“…….”
저 자식이 점점 강적이 되어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일까.
잠시 말문이 막힌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먼저 가서 물이나 받아 놔. 찝찝해서 씻어야겠다.”
“어, 지금요?”
“그래, 냄새나서 못 살겠다.”
옷깃에 짙게 밴 악취를 맡으며 이마를 찡그린 그때, 혁무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조장님.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뭐라고?”
눈을 깜빡인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반항하니? 고금 제일 미남이 되고 싶어서 얼굴이 근질거려?”
“그만 때리십쇼. 제발.”
“그럼 왜 헛소리야?”
“반항이 아니라, 시간상 곤란할 것 같다고요. 이미 다들 준비 끝마치고 조장님 깨어나시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비? 내가 깨어나는 것만 기다려?”
“예. 냄새야 저희가 어떻게든 참아 볼 테니까, 그냥 바로 출발하시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황급히 품 안을 뒤적거린 혁무진이 누런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
“신의 어르신과 적 대협께서 떠나시기 전에 남긴 서신입니다. 저희더러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조장님 깨어나시면 늦지 않게 모셔 오라고 하셨어요.”
먼저 떠난 적천강과 신의. 그리고 그들이 남긴 서신.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느끼며 까슬까슬한 촉감의 누런 종이를 펼친 그 순간.
아마도 신의의 것이 분명할, 용사 비등한 필체로 적어 내린 한 줄의 글귀가 눈동자에 틀어박혔다.
사천성주(四川城主). 졸(卒).
“……!”
* * *
신의는 문득 떠올렸다.
무시무시한 살업(殺業)을 쌓은 동시에, 수많은 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린 스승에게서 들었던 가르침을.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적(積, 암)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육안으로 살필 수 없을 만큼 작은 종양이 몸속 깊숙한 곳에서 자라납니다. 초기에 징후를 알아차린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손꼽히는 명의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치료도 못 해 보고 죽는 경우가 다반사지요.’
‘네 말도 옳다. 그러나 시기와 의원을 잘 만난다면, 하늘의 도움이 없어도 능히 치유할 수 있는 병이다.’
‘그건 스승님께서 신의(神醫)이시며, 종사(宗師)의 반열에 오르실 만큼 무공의 고수이시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노부가 인정할 만큼 경지에 오른 의원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널 포함해서.’
‘과찬이십니다만, 이 제자는 아직도 스승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패이고 갈라진 살은 꿰매면 되는 것이요, 뒤틀리고 부러진 뼈는 붙이면 그만이다. 설령 장기가 다쳤다 해도 개복(開腹)하여 알아볼 수 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무엇이냐?’
‘마음의 병입니다.’
‘맞다. 마음의 병은 보이지도 않고 꿰매거나 붙일 수도 없다. 살수보다 은밀하며 마두보다 잔인하게 환자를 죽인다.’
‘하면 그런 이들은 어찌해야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는 의원과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마주해라. 둘째로는 말없이 귀 기울이며, 셋째로는 친구가 되어라.’
‘만약 그렇게도 치료가 되지 않고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정성을 다해 염(鹽)해 주고, 떠나는 길을 지켜보아라. 하지만 네가 그 어떤 환자를 대하건, 늘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무엇입니까?’
‘원인이 없는 죽음은 없다. 그 원인부터 파악하거라.’
‘……!’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난 신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넓고 화려한 침상 위,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쓰러져 있는 시신 한 구가 보였다.
‘사천성주. 그대는 무슨 연유로 죽었소.’
사랑하는 애첩을 빼앗긴 비통함인가. 아니면 빼앗길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한 분노인가.
그것조차 아니면…….
‘처음부터 상사병 따위가 아닌, 또 다른 무언가 때문인가.’
신의는 고요한 눈빛으로 사천성주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사천성 내에서 이름난 명의는 이미 저 신분 높은 사내의 사인(死因)을 급사라 확신했지만, 장장 세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시신을 살핀 신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원한을 산 거요.’
푹.
망자에게 닿지 않을 물음과 함께, 혈에서 뽑혀 나온 대침(大鍼).
그리고 그 날카로운 끝에 꿰어 꿈틀거리는 작은 무언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독(蠱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