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9
#978화
어느 날부터인가 가끔, 변해 버린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이 지긋지긋한 사투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한 줄기 환희를 느끼며 나아가는 내 모습을.
“진태경-!”
사자후(師子吼)와도 같은 일갈이 귓가를 후려친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 너머, 북천마군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혈광을 향해 백염을 내리그었다.
서걱!
창날의 궤적을 따라 두 줄기로 갈라지는 거대한 장력(掌力).
목표를 벗어나 좌우에 늘어선 암벽을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과 폭발음을 뒤로한 채, 다시 한번 지면을 밟았다.
팟.
응당 터져 나와야 할 염화일로(炎火一路)의 불꽃은 없다.
살성의 가르침이 녹아든 발끝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고, 쾌속하게 내쏘아지는 신형은 섬광과도 같았다.
마치, 저 멀리 맞은편에서 불현듯 들이닥친 빛줄기처럼.
슈확!
압축된 공기가 찢겨 나간다. 소리마저 앞질러 다가온 빛의 화살을 향해, 북천마군은 분노와 공력이 들끓는 일권(一拳)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접촉. 그리고 폭발.
부풀어 오르는 아득한 섬광 속, 나는 궁성이 쏘아 보낸 빛줄기가 검붉은 혈광에 스러지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내 모습을 비치고 있는 북천마군의 두 눈동자도.
‘보인다.’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또렷하고 생생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느릿하게 달싹이는 입술도.
이제는 흰자위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붉어진 눈동자도.
그리고 내가 전력을 다해 내뻗은 창날을 가로막는, 한껏 응축된 수강(手罡)도.
콰드드득!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강기가 부딪친다. 허공에서 맞닿은 청백색의 화염과 검붉은 어둠이 뒤섞여 거센 힘의 파동을 뿜어냈다.
“고작. 이 정도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음성.
한 손으로 창날을 움켜쥔 채 나를 노려보는 북천마군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지는 듯했다.
“나를, 이 모용백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치지지지직!
들불처럼 일어난 미증유의 기운이 창날에 실린 화염을 억누른다. 북천마군이 생명마저 불태워 가며 얻은 그 힘은, 이미 예정된 죽음에 대한 대가는 높고도 거대했다.
자무카를 처치하며 모든 피로와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상황에서도 승리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나는 웃었다.
지금 북천마군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내가 충분히 예상했던 범주 안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등 뒤에서 짓 쳐드는 누군가의 기운은, 북천마군이 지닌 그것과 비견될 만큼 거대했으니까.
‘지금.’
그 어떤 경고의 외침이나, 전음도 없었다.
그러나 안다. 그도, 나도.
비록 시야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말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뇌리에 떠오른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스륵.
창대를 놓으며 신형을 반쯤 돌려세운 그 순간.
거한(巨漢)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내 체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한 줄기의 화염이 내 빈자리를 채우며 터져 나왔다.
고오옹.
전설 속 화룡(火龍)이 뿜어내는 숨결처럼, 새하얀 백색의 겁화가 어둠을 아득하게 밝혔다.
새벽 공기에 스며 있던 이슬을 살라 먹고, 증발시키며 북천마군을 향해 들이닥쳤다.
화. 왕.
자그맣게 달싹이는 입술이 소리 없는 외침을 토해 낸다.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 놈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은 채 흔들렸다.
숨길 수 없는 혼동과 두려움.
그리고 북천마군이 본능적으로 내비친 그 감정은, 나나 적천강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등장을 의미했다.
슈확!
북천마군의 등 뒤, 부드럽게 휘어진 두 자루의 곡도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거칠 것 없이 정면에서 들이닥친 폭급한 화염과는 정반대의,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치명적인 기운이 실린 일격.
“……!”
느려진 세상 속, 북천마군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정면에는 적천강의 멸염신권(滅炎神拳)이, 후방에는 형태를 뒤바꾼 궁성의 쌍도(雙刀)가 내리그어지는 상황.
회피할 시간도, 회피할 수도 없는 두 초절정 고수의 가공할 합공(合攻)이 펼쳐진 순간. 놈에게 더 이상의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쾅! 콰아아아아!
일순간, 협곡에 드리웠던 모든 어둠이 걷혔다.
시뻘건 혈광(血光)이 북천마군의 전신을 휘감은 채 터져 나왔다.
드드드득!
세상이 뒤흔들린다. 거칠 것 없는 힘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었고 세 사람의 발끝에서 지면이 붕괴했다.
콰득! 쩌저적!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지면.
마지막 순간 내가 그러했듯, 신형을 비틀어 방향을 뒤바꾼 북천마군의 전신이 태풍을 만난 나무처럼 거세게 떨렸다.
한 손으로 적천강의 일권을, 다른 손으로는 궁성이 펼쳐 낸 두 자루의 곡도를 움켜쥔 놈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이미 악귀였지. 오래전부터.’
제아무리 긴 세월 동안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있었다고 한들, 괴물의 본질마저 사라지지는 않는 법.
북천마군은, 모용백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로 마(魔)를 좇아 어딘가로 향했던, 수많은 괴물처럼.
콰득, 푸화악!
조금씩 베이고, 바스라지는 살과 뼈마디 사이로 핏물이 솟구친다.
북천마군은 상상한 적 없던 고통을 느끼고 경련하고 있었다.
화왕과 궁성. 두 초절정 고수를 막아서고 있는 놈의 양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제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마지막까지 변함없을 것은 원독(怨毒)으로 가득한 저 눈동자뿐일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피가 흐를 만큼 악문 잇새로 씹어 내뱉는 듯한 북천마군의 목소리에 실린 고통과 증오를 나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내 모습에 미처 숨기지 못한, 한 줄기의 두려움까지도.
“나는, 죽지, 않는다.”
헐떡이는 숨결을 따라 끊어져 나온 북천마군의 음성에, 적천강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 사람도, 괴물도.”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던 혈광(血光)도, 사방을 짓누르던 기파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아직은 남아 있다 해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사그라지고 있을 뿐이다.
그그극.
한 손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압력.
적천강이 나직한 대답과 함께 전력을 다해 끌어낸 백색 겁화 앞에서, 북천마군은 마침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지면이 깊게 파였다. 터질 듯이 눈을 부릅뜬 북천마군의 귓가로 궁성의 음성이 전해졌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내린 선택에 정답은 없다. 다만…… 이것이 네 선택에 대한 결과일 뿐.”
정답이 있는 삶이 어디 있겠나.
인생은 객관식도 아니다. 주관식이나 서술형으로 점수가 매겨지는 시험 따위도 아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더라도, 돌이켜보면 단 한 점의 후회라도 남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판단도 결과도 자신의 몫이며, 단지 그뿐이다.
“이룡신창(螭龍神槍) 모용백. 아니, 북천마군. 이제 네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때다.”
무림인의 별호에는 그만한 이유와 시간이 있다.
그렇기에 궁성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낯선 별호를 들었을 때, 나는 모용백이 살아온 삶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룡(螭龍).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용이 되고 싶었던 이무기.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놈이 여의주를 얻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쳤던 것은.
창천을 훨훨 누비는 한 마리의 용으로 거듭나고자, 합리화를 위한 온갖 변명과 이유를 찾아 암천(暗天)의 그늘 아래에 머무른 것은.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설령 놈이 직접 말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나는 모용백을, 북천마군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놈을 이해하는 그 날, 나 역시 저 깊고 어두컴컴한 강 건너에 존재하는 괴물이 되어 버릴 테니까.
“마지막으로, 이것만 알고 가라.”
나는 나직한 음성과 함께 손을 뻗었다.
북천마군이 적천강과 궁성에 맞서기 위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새하얀 창 자루가 빨려 들어가듯 손아귀에 붙잡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너와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는 살아남는다.
이 세상은 늘, 언제나, 항상 그래 왔다.
약육강식의 법칙은 비단 무림뿐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비단 창칼이 아니라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그러나 그들 모두가 도태되는 것이 두려워 북천마군과 같은 선택을 한다면, 세상은 이미 지옥도(地獄道)가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도리와 인의도 없는.
오직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목적에 의해, 끝없는 연장선을 이어 가는 끔찍한 세상.
하지만 모든 이가 북천마군과 같지 않기에, 나는 이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믿는다.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처럼 수많은 이들 중, 어느 별 볼 일 없는 F급 헌터에게 이토록 불가사의한 힘을 내려 준 누군가 역시 그런 마음일 것이라고.
“이제, 가라.”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단호하게 청백색의 화염에 휩싸인 창날을 찔러넣었다.
마지막 순간에조차 포기하지 않고, 체내에 남아 있는 모든 생명력을 불태우며 몸부림치고 있는 북천마군을 향해.
단순히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것을 빼앗아 부풀리기 위해 살아왔던 괴물의 가슴을 향해.
푸욱.
이글거리는 화염이, 살과 뼈를 관통했다.
* * *
마치 누군가 촛불을 켠 듯, 어둠 속의 존재는 불현듯 눈을 떴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것일까.
모든 것이 혼잡하게 뒤섞인 그 심연 같은 꿈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익숙한 의문인 동시에, 매번 같은 결론이었다.
어둠 속의 존재에게는 늘 그랬다.
그가 간혹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달라져 있었으니까.
장장 수십여 년간을 잠들어 있던 적도 있으니 두말해서 무엇하랴.
다만 세월이 흐를수록 짧아지는 그 주기 속에서, 어둠 속의 존재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생각했던 그 날이, 어느덧 자신의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화아아악.
서늘한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이내 광풍(狂風)이 되어 휘몰아쳤다.
짙은 어둠 속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횃불을 꺼트리고, 땅과 지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고요한 호수에 격랑이 일어난 듯한 그 급격한 변화는, 어둠 속 존재가 자신이 눈을 뜬 이유를 깨달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북천(北天).
네 번째 하늘이 무너졌다. 또 하나의 충실한 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곧 천하의 모두가 놀라게 될 그 사실 앞에서, 어둠 속 존재는 홀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