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8
#977화
수치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수많은 감정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느끼는 사람에 따라 그 크기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천대받는 노비에게 있어 수치심이 숙명과 다름없다면, 고귀하고 부유한 이들에게는 그 어떤 칼날보다 날카롭고 잔혹하게 마음을 헤집으니까.
그리고 북천마군은 명백한 후자였다.
“우리 뽀삐, 어딜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가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
걱정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
더불어 이러한 모습이 무색해질 만큼, 비뚜름하게 솟아오른 입꼬리.
“많이 걱정했잖아. 혹시 이대로 영영 잃어버리는 줄 알고.”
비웃음이 담긴 진태경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북천마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뻔히 놓여 있는 덫에 스스로 걸려든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숫제 집 나간 개 취급을 받는 상황.
지금 북천마군의 전신을 감싼 수치심과 절망감은, 지금껏 그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무언가였다.
“네놈 따위가 감히…….”
“닥쳐라.”
아스라이 흩어지는 먼지구름 너머.
이어지려던 북천마군의 목소리를 가볍게 끊어 내며 나타난 적천강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네놈 따위가.”
북천마군은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일까.
어느덧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적천강의 모습은, 오래전 정마대전에서 보았던 그때처럼 크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화왕(火王)이라는 거인 앞에서 은연중 위축되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저벅.
유난히도 선명히 귓가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
그러나 북천마군을 향해 다가가던 적천강은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실소를 흘렸다.
“족히 십보(十步)를 걸었음에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로군. 그렇지 않으냐?”
스승의 물음에, 진태경이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그럴 리가요.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착각?”
“말이 안 되잖아요. 무슨 제자리걸음도 아니고, 왜 거리가 안 좁혀져요?”
턱을 긁적인 진태경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북천마군을 힐끔 바라보며.
“어느 쫄보 새끼가 무서워서 뒷걸음질 쳤다면 또 모를까.”
“……!”
“어, 이게 맞나? 진짜로?”
으득.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입술이 터지도록 이를 악문 북천마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시선을 돌린 이유는 비웃음으로 가득한 저 핏덩이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마저 놓아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야, 진짜였네. 조금 전에는 약 좀 빨았다고 온갖 있는 척에 개지랄을 다 떨더니.”
비아냥과 함께 또다시 성큼 가까워지는 발걸음.
그러나 이번만큼은 북천마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 옳았다.
사박.
앞을 가로막은 두 스승과 제자와는 달리,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는 깃털처럼 가볍다.
반쯤 신형을 돌려세운 북천마군의 시야에 산들바람처럼 다가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궁성.’
진퇴양난. 사면초가.
그 어떤 표현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무려 세 명의 초절정 고수.
그중 한 사람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 삼성(三星)의 일원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런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늙은 제왕(帝王)이며, 마지막으로는 늙은 제왕의 가르침을 여의주 삼아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젊은 신룡(神龍)이 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는데.’
공허한 마음 한구석에서 홀로 내뱉은 뇌까림.
그러다 어느 순간, 떨림이 잦아든 북천마군의 눈동자가 깊숙이 가라앉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를 쓰러트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태경이 망설임 없이 되물었다.
“너네 혹시 대사 암기하고 다니냐? 토씨 한 글자라도 틀리면 일주일 동안 공력 압수. 뭐 그런 벌칙 있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지금까지 꽤 잘 막아 낸 것 같은데. 오늘도 포함해서.”
진태경의 대답을 들은 북천마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너희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래. 계속해서 희망을 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서천마군이, 남천마후가, 그리고 동천마군이 왜 실패했을까. 오랫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어찌하여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일까.”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진태경이, 아니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서늘한 음성.
당장이라도 산 채로 불태워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묻는 적천강을 향해, 북천마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군.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인지.”
“놈……!”
“구태여 서두르지 말게, 화왕. 당신이 그리 재촉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으니.”
마음을 비우니 목소리 또한 담담하다. 북천마군의 자신의 몸 안에 남아 있는 기운을 관조하며 말을 이었다.
“길어야 반년. 그것이 전부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암흑 속의 절대자가 긴 잠에서 깨어난 그 날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십만마도(十萬魔道)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 믿을 수 없는 권능. 새로운 하늘이란 바로 그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천마군이 입에 담은 ‘그분’이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천주(天主)…….”
혼잣말처럼 뇌까린 궁성이 맑은 눈을 들어 북천마군을 응시했다.
“그것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도를 저버리고, 천하를 배신한 이유였더냐.”
“동도? 지금 동도라고 했나?”
북천마군은 불현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동도(同道).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이.
그 두 글자에 담긴 의미를, 그 무의미하고도 하잘것없는 가치와 지난날의 과거를 떠올리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온 모양이군. 하기야, 뿌리도 없이 심산유곡에 틀어박힌 채 천하를 등지고 살아오던 당신들이 무엇을 알겠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적천강과 궁성을 차례대로 스쳤다.
두 사람 모두 정마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진 적 없던 기인이사(奇人異士)들.
그러나 북천마군은, 모용백은 달랐다.
그는 천하 오대세가의 일익인 모용세가의 직계로서 세상을 겪었다.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하는 그들과 함께 암투를 치러야 했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올바름을 논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칼날을 소맷자락에 감춰두었지. 그것이 너희가 말하는 동도인가? 이것이 정파인가?”
하늘 위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별들도 언젠가는 빛을 잃고 스러지는 법.
모든 것은 언젠가 늙고, 쇠한다.
무림인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흐르는 시간 속에 어느덧 강호는 사라졌다. 차가운 무림만이 남았다.
협(俠)의 가치는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정파 무림은 알력 다툼에 힘을 쏟았다.
수많은 속가제자(俗家弟子)를 받아들여 산하의 문파를 늘리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사파를 포섭하는 금기를 벌이는 이도 있었고, 암암리에 벌인 충돌 끝에 여러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팽창의 끝은 결국 폭발.
그들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힘은, 곧 분쟁이라는 형태로 정파 무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의 땅이라고 한들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혹독했다.
적어도 모용세가에게는.
“당신들도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내가, 아니 우리 모용세가가 어떠한 뿌리를 지녔는지.”
북천마군은 발아래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명문대파의 가주로서 살아온 일생을 증명하듯, 그에 어울리는 권위와 힘이 느껴지는 준수한 용모.
그러나 모용세가가 요녕성에 뿌리내린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혈관에 흐르는 이방인의 특징은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누군가로 하여금, 숨이 끊긴 채 쓰러져 있는 자무카의 얼굴을 언뜻 떠올리게 할 만큼.
“유목민?”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진태경의 뇌까림에, 본능처럼 힘이 들어간 북천마군의 주먹이 하얗게 물들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손가락질과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의 눈과 귀에 남아 있다.
유목민. 침략자. 이방인.
그리고, 오랑캐.
먼 과거, 모용선비(慕容鲜卑)라 불리던 동북의 이민족들은 대륙의 끄트머리를 차지했고 일국을 세웠다.
난세였다.
다섯 이민족과 열여섯 개의 소국이 난립했으니.
그러나 분열되었던 천하는 안정을 되찾았고, 혼란을 틈타 돌격창과 각궁으로 대륙을 질타했던 침략자들은 장성 너머로 쫓겨나거나 흡수되었다.
모용선비족은 후자였다.
그들은 요녕성에 남아 새로이 초석을 다졌고, 그렇게 세가(世家)의 기틀을 세웠다.
모용세가의 탄생이었다.
오랑캐의 피를 이어받은 침략자들의 가문.
고절한 무공과 뛰어난 기마술로 무림의 거목이 되어 우뚝 섰으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또 다른 거목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시와 천대를 받았던.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군. 만약 정마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용세가가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팽창의 끝은 폭발이지만, 상상치도 못했던 거대한 폭발의 끝에는 화해와 평화가 남는다.
마교라는 외적의 등장은 그렇게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함께 싸워야 했고, 무신(武神)을 중심으로 탄생한 무림맹은 반목하던 정파 무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으니.
그러나 모용백은, 모용세가는 잊지 않았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협(俠)도, 인의(仁義)도 더는 없다. 오랜 세월 끝에 살아남는 것은, 결국 강자뿐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오직 그것만이 북천마군이 깨달은 이 세상의 본질이다.
폭력으로 세워진 무림의 유일한 가치이며, 목적이었다.
그렇게 모용백은 북천마군이 되었다.
“그래서였다. 오직 그뿐이었다.”
드득. 드드득.
지면으로 퍼져 나가는 거센 진동.
더는 충혈되었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든 핏빛 안광(眼光)을 흩뿌리며, 북천마군은 협곡 안의 모두를 향해 부르짖었다.
“한데 감히 누가! 그 어떤 위선자가 나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콰아아!
창노한 외침에 실린 공력이 막강한 음파(音波)가 되어 터져 나왔다.
실로 가공할 만한 기세.
석상처럼 굳어 있던 산서인들의 귓가에서 피가 흘렀다. 외침을 들은 것만으로도 내부가 진탕된 몇몇 이들은 토혈(吐血)까지 하며 무릎을 꿇었다.
우우웅.
한 사람을 중심으로 요동치는 무시무시한 힘.
극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온 사방의 공기를 저릿하게 조여드는 그의 거대한 기파(氣波)에, 적천강은 북천마군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선천지기(先天眞氣).
앞서 저승으로 떠난 암천의 수괴들이 그러하듯이, 이 순간의 북천마군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끝에 죽음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러나라면, 물러나겠느냐.”
적천강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직한 음성에, 그의 제자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쐐애액, 탁.
등 뒤에서 화살처럼 쏘아진 창 자루가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다. 곧이어 투명하리만치 맑은 창날 위를 휘감으며 솟구친 청백색의 불꽃은, 무언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개소리를 하도 오랫동안 들었더니 삭신이 쑤시네요.”
“새파란 놈이 삭신은 무슨.”
피식 웃는 적천강을 따라, 진태경도 웃었다.
“먼저 갑니다. 두 분은 천천히 따라오세요.”
그와 동시에, 진태경의 발끝에서 흙과 바위가 바스라졌다.
콰득, 퍼어엉!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지면. 그리고 쏘아지는 한 줄기의 불꽃.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강렬한 기세를 흩뿌리며 나아가는 신룡의 뒤를 따라, 두 노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팟.
순식간에 지워지는 거리 속에서, 시뻘건 혈광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