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8
17회
잠겨있던 현관문이 열쇠로 휘리릭 열리더니 해인이 숨찬 얼굴로 들어섰다.
곧 그녀의 시야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기대어 앉아있는 윤설이 담겼다.
“윤설아, 왜 앉아있어? 아까보다 더 심해진 거야?”
“…. 아, 아니다. 너무 누워있던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서…….”
“휴우, 그랬구나. 자, 이것 좀 먹어봐.”
윤설의 힘없는 눈길이 해인의 손에 닿았다.
이 세상에선 모든 것이 처음이라 낯설다는 표현도 무색했지만 자그맣고 짙은 갈색병과 동그랗고 단단하여 콩 같은 것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은 이미 윤설의 궁금증을 아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요즘 사람들이 아플 때 먹는 약이야. 네 증상에 맞는 걸 사왔으니까 한번 먹어볼래?”
“…..약이라…..”
윤설이 생각하는 약이란 이런 저런 재료들을 모아 푹 고아서 마시는 쓴 물이었다.
구하기도 어렵지만 만드는 시간과 정성을 적잖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나갔던 해인이 금방 만들어 올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묻기엔 기력도 없었고 게다가 바쁜 해인을 방해할지도 몰랐다.
윤설은 의문을 감춘 채 해인이 건넨 약이란 것을 서둘러 입속에 넣었다.
낯선 것, 특히 약을 먹는 것은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미 벗을 믿기로 했고 은연중에 의지하고 있는 그녀였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약을 삼킨 윤설이 한결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해인아, 나를 위해 이토록 애써주어 고맙구나.”
대문을 닫고 나온 해인이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윤설을 혼자 두고 나오는 길은 언제나 편치 않았지만 특히나 아픈 친구를 생각하면 유난히도 걸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은 이러한 마음을 사치라고 타박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이가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해인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던 윤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자기 위안일지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윤설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여린 한숨이 허공을 향해 피어났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깨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지독한 절망감에 몸서리치던 밤, 낯선 곳으로 왔으니 이토록 몸이 아프다면 제가 원하는 곳에서 눈뜨길 기대할 만도 했다.
윤설은 조선에서의 마지막 날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혹시라도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이 많은 임금의 계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충격이 워낙 강했기 때문인지 별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어두웠던 것만 떠오르는구나. 그래, 그 밤은 유난히도 어두웠어. 보통은 달빛이 은은했는데…. 그 밤만은…… 휴우, 이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어제 본 그 대문이 조선으로 통하는 문이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은 마치 생명이 끊어진 것과 같아 곧 윤설을 깊은 슬픔 속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가슴을 쳐야 할 다음 행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렸던 윤설이 가만히 제 눈을 떴다.
분명 몹시 슬픈 감정이었지만 몸은 전혀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그녀가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픔과 슬픔으로 가누지 못했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더 말끔한 것도 같았다.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것인가?’
윤설은 기어이 몸을 일으켜 제 이마를 만지더니 팔과 다리를 주물러보았다.
아침까지 쑤셨던 온몸이 거짓말같이 멀쩡해져있었다.
“윤설아!”
집안으로 들어선 해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설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녀는 점심으로 죽을 사들고 온 길이었다.
집으로 달려오는 동안 끙끙 앓고 있을 친구를 상상했던 해인의 눈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부자리를 말끔히 개어놓은 그녀는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더니 막 들어온 벗을 웃으며 반겼다.
“해인아, 어서 와.”
“어? 괜찮은 거야?”
“으, 응.”
“정말? 어디 봐봐.”
비닐봉지를 싱크대 위에 둔 해인이 금세 윤설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곧 제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달려온 탓인지 식어진 윤설의 이마 보다 오히려 그녀가 더 뜨거웠다.
하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노심초사 친구를 걱정하던 이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정말 다 나았구나? 몸 쑤시는 곳은 없지? 정말 없는 거지?”
“응, 그렇단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단다.”
윤설의 대답에 해인이 비로소 웃음을 내보였다.
“에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안 그래도 늘 너 혼자 집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말이야. 약이 잘 든 모양이네. 히잇. 다행이야.”
“해인아, 너에겐 정말 할 말이 없구나. 이 한 몸 의탁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널 고생시키다니….. 이런 날 어쩌면 좋단 말이니?”
“어우, 아니야. 고생이라니. 내가 널 아프게 만들었지. 그날 민속촌이 아무래도 무리수였던 걸로…. 히잉…..”
해인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윤설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그러지 말렴. 넌 진심으로 날 생각했던 것이잖니. 실은….. 이제껏 너처럼 진솔한 벗을 사귀어본 적이 없단다. 아니, 벗이란 존재도 내겐 처음이나 다름없어.”
“헐! 진짜 진짜? 대박!”
의외로 힘찬 반응에 윤설이 살짝 놀란 얼굴로 해인을 응시했다.
“앗, 미안. 놀랐지? 실은…. 나도 친구가 오랜만이라…. 고향 떠나온 지도 오래고…. 이제껏 연락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단다. 너랑 비슷해. 히잇, 우린 어쩜 이렇게 잘 통한다니? 짠, 하이파이브!”
“으,응?”
오른손을 번쩍 든 해인이 곧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 통할 때마다 이렇게 손을 마주치는 거야. 어때? 여기서의 방식인데 한 번 해볼래?”
“이, 이렇게?”
윤설이 수줍은 듯 제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해인이 곧 제 손을 가져갔다.
허공에서 마주친 두 손이 찰진 소리를 내는 순간, 두 친구가 웃기 시작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죽 좀 사왔어. 아플 땐 죽이 최고지.”
“죽을…… 사왔다고?”
“응, 배고프지?”
윤설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해인의 행동을 응시했고 그러는 사이, 밥상에 죽을 가득히 담은 그릇이 올라왔다.
그릇에선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뽀얀 연기가 새어나왔고 제법 고소한 냄새가 윤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죽은 집에서 만드는 것이었다.
윤설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이곳에선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의아함보다 더 앞선 것은 바로 식욕을 돋우는 냄새와 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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