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22
21회
편의점과 집은 그리 멀지 않았고 복잡한 길도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온 친구에겐 버거울 지도 몰랐다.
윤설을 걱정하던 해인은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 문 앞을 지키며 골목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선으로 드디어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반가움을 품은 마음이 환호성으로 터져 나오는 찰나, 윤설이 지나간 자리로 그녀를 유심히 응시하는 이들이 해인에게 포착되었다.
옷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길게 땋은 머리와 댕기는 흔치 않은 것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놓칠 리 없었다.
해인은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에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선에서 온 친구를 보호하고 싶은 순수한 우정이었다.
“윤설아, 어서 와. 우와, 정말 대박이다. 잘 찾아왔네?”
해인의 격한 환영에 윤설이 수줍게 웃었다.
“이걸로 잘 잠그고 왔단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내려왔어.”
윤설은 제 목에 걸려있는 열쇠를 가리켰고 그것과 함께 매달려있던 핸드폰이 해인의 시선에 담겼다.
유사시를 대비해 목걸이로 만들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해인은 윤설의 말을 들으며 가녀린 목에 매달린 것을 보는 순간 미안함을 느끼고 말았다.
윤설을 의자에 앉힌 해인은 연달아 들어온 손님들의 계산을 마친 후, 서둘러 친구에게 다가갔다.
“미안. 심심했지?”
“아니다. 집에 있어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단다.”
윤설은 제 농에 웃을 줄 알았던 해인이 어쩐 일인지 한숨을 내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인아,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이니?”
“아니야. 윤설아. 내가 잘못을 했지.”
“으,응? 잘못이라니……?”
“조심스러워서 네게 주의를 준 것인데….. 그만 널 주눅 들게 만든 것만 같아. 사실 아까도 골목을 따라 내려오는 네 모습을 보면서 무척 반가웠는데, 주변에서 널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뭐니? 순간, 깜놀했어. 미안해. 나 때문에 답답하지? 그래서 나온 거지?”
윤설이 풀죽은 해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해인아, 넌 내 존재가 이곳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그런 것이잖아. 그렇지?”
“응, 내 마음, 알고 있구나?”
“당연하지. 우리가 만난 것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난 나를 염려하는 네 마음을 잘 안단다. 나를 도우려는 네 마음 역시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너무 고맙고….. 실은…. 여기까지 온 연유는…. 널 돕고 싶어서란다.”
“에이, 뭘 자꾸 돕는다고 하니? 그러지 않아도 돼.”
해인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손사래를 치자 윤설이 눈빛을 반짝였다.
“아니란다. 난 정말 널 돕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이 세계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 이곳으로 온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국혼을 피하게 된 셈이니 무엇이라도 하고 싶구나. 내 마음은 참이란다. 네게 신세만 지는 벗은 되기 싫단다. 그것은 너무 초라하지 않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갈 생각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듯하구나.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허락해다오. 날 위해 애쓰는 네게 나도 도움이 되고 싶단다.”
진정성 있는 대답에 해인이 멈칫했다.
오해가 풀린 것은 다행이었지만 윤설의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돌아갈 방법도 때도 알 수 없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날까지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한탄의 늪으로 밀어 넣을는지 해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
벗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설이 수줍게 웃으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해인아 내가 머리 모양을 바꾸면 조금 수월하겠니?”
“뭐, 뭐라고?”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윤설이 싱긋 웃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사람과 다름없어 보이겠지? 음….. 머리카락을 자르는 거랑….. 구불구불한 거 빼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심각했던 해인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나자 윤설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윤설의 진심을 알게 된 해인은 만류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개척해보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제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윤설에게 맡길 일을 생각하던 해인이 손뼉을 쳤다.
“윤설아, 여기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식탁이야. 물론 알지? 크큭…. 이곳이 늘 깨끗해야 하거든. 버릴 것이 있으면 쓰레기통에 넣고 행주로 싸악 닦아줄래? 이렇게 말이야.”
해인의 시범에 윤설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해보진 않았지만 많이 보아서 알기는 안단다. 그쯤은 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렴.”
“정말?”
생긋 웃는 해인의 귓가에 유리문의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을 확인한 윤설이 어서 가보라는 듯 손짓하자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이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이 시간대에는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이 제법 잘 나가는 편이었다.
손이 빠른 해인은 계산과 동시에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분주히 일하는 벗을 바라보던 윤설이 행주를 들고는 열심히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이 세계로 와서 일이라곤 처음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상기되고 신이 나기도 했다.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며 식탁을 닦던 윤설이 자신도 모르게 제 몸종을 떠올렸다.
조석으로 별당을 열심히 닦던 개똥이는 제게 말벗이라도 되어줄 때마다 함박웃음을 짓곤 했었다.
행랑어멈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지만 가끔은 또래의 공감대가 형성된 탓에 까르륵 웃은 적이 허다했다.
평온했던 조선의 시간이 스르륵 펼쳐지자 다시금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어여쁜 내 조카들…. 행랑어멈….개똥이…. 모두모두 그리워.’
상념에 잠겨있던 윤설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 여기 앉아도 되죠?”
도시락을 든 손님이었다.
화들짝 놀란 윤설이 행주를 든 채 꾸벅 인사하고는 서둘러 물러났다.
손님은 기다란 식탁에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인에게 가려던 윤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계산대가 분주한 탓이었다.
하지만 실내에도 여기저기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윤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멈칫하다가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몸짓이었지만 식탁을 닦는 일 외에 다른 할 일을 찾고 싶기도 했다.
알록달록한 것들이 팔려나가자 그것을 올려둔 선반이 금세 썰렁해졌다.
윤설은 손님들이 들고 가는 것을 지켜보며 무엇일까 궁금히 여겼지만 곧 텅 빈 곳을 닦기 시작했다.
물건들은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빠져나갔고 윤설은 다른 선반들로 이동해 닦기를 반복했다.
잠시 한 시름을 덜던 그녀가 비어있는 식탁을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또 오세요.”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마자 해인이 서둘러 윤설을 찾았다.
그리고 곧 식탁을 열심히 닦는 친구의 모습이 그녀의 눈으로 들어왔다.
순간 해인에게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상반된 마음이었다.
양반집의 규수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인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반대로 낯선 상황을 딛고 노력하는 점에선 친구라도 본받을 만했다.
“윤설아,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 히잇. 많이 힘들었지? 좀 앉아있지 그랬어.”
해인이 생수를 들고 다가오자 식탁 닦기에 공을 들이던 윤설이 싱긋 웃었다.
“우와, 대박! 식탁이 완전 새 걸로 변신했네? 완전 깨끗해.”
“정말이니? 벗이라고 봐주는 건 아니니?”
“어우, 노노. 완전 깔끔하다. 우리 사장님이 너무 좋아하시겠는데? 자, 어서 앉자. 휴우…. 힘들었지? 이것 좀 마셔.”
“응, 고맙구나.”
윤설이 무심코 생수마개를 돌려서 열자 해인이 까르륵 웃었다.
“윤설아, 너 이제 여기 사람 다 된 것 같다. 크큭….”
“아……”
겸연쩍게 웃던 윤설이 생수를 한 모금 삼키자 해인이 물었다.
“힘들지?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난 그냥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정말이니? 그렇게 얘기해주니 기쁘구나. 널 보니 그간 힘겹게 살았을 거라 여겨져 가슴이 쓰라렸단다.”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윤설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해인의 마음속엔 커다란 천둥이 번쩍였다.
참 갈망했던 한 마디였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한 건 아니었다.
그럴 여유조차 없던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잊은 채 정신없이 움직이고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 그녀였다.
그러한 열심을 알아주는 따스함은 꽤나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해인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해인아, 나 저기도 닦았단다. 아, 그리고 여기도.”
잠시 울컥했던 해인이 시선을 돌려 친구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윤설이 겸연쩍은 얼굴로 벗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내가 또 무언가를 잘못한 모양이로구나.”
거울 위로 이리저리 움직인 얼룩이 가득했다.
물수건을 사용한 탓이었지만 해인은 그것을 타박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시 닦으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애쓰는 친구의 마음이 그저 고맙고 예쁠 뿐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