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40
39회
해인의 계획을 알게 된 윤설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두 눈은 당황으로 얼룩진 상태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손은 떨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 세상에서 온 그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양반가의 규수가 알지도 못하는 외간 남자를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인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설아, 정말 미안해. 휴우…… 정말이지 감독님께 떼라도 쓰고 싶다. 너 혼자 두고 간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무거워. 히잉…..그런데 정말 믿고 말할 사람이 민준 씨뿐이라서 그랬어. 준이 씨는 누구나 다 아는 배우니까 마음이 놓이더라고. 게다가 끝나는 시간도 같을 거 아니야. 윤설아, 여기선 아가씨가 어떤 남자와 함께 차를 타는 거, 이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앗,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함께 있는 건 정말 위험하지만 말이야. 준이 씨는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우리한테 잘 대해주잖아. 조선시대처럼 큰일 나거나 무슨 의무를 져야 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마음 편히 해. 응?”
더없이 진실하고 간절한 해인의 눈빛에 윤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애써주어 정말로 고맙구나. 그래, 네 말대로 해보마. 너야말로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데…. 그런 너의 판단이라면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을 듯하구나.”
“정말? 정말이지? 휴우…. 그래, 윤설아. 잘 생각했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깐. 준이 씨는 정말 젠틀한 사람이란 촉이 딱 왔지. 참, 혹시 몰라서 준이 씨한테 몇 가지 사항을 미리 말해뒀어.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그냥 편히 차타고 오면 돼. 알았지?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내가 골목 입구로 나가있을게.”
해인은 먼저 떠나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았고 윤설은 그런 벗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언제나 서로를 의지했던 두 사람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해지는 순간, 묘한 기분이 서로의 마음속으로 피어올랐다.
‘윤설이가 잘 할 수 있겠지? 혼자 두고 오려니 정말 마음이 이상하네. 그동안 의지를 많이 해서 그럴까? 뭔가 많이 허전하고 슬퍼진다. 히잉…..’
‘해인이가 없으니 너무 두렵구나. 그동안 내게 큰 도움과 의지가 된 탓이겠지. 해인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것이 더욱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이다. 그래, 나 때문에 벗을 곤경에 빠뜨릴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곳은 조선과는 다르다고 하니 해인이를 믿고 따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촬영 현장으로 돌아가는 윤설의 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마치 한쪽 날개를 잃은 듯 어깨는 조금 쳐졌고 홀로 후대의 사람들을 대하려니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벗에게 짐이 될 순 없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야말로 용기를 내야할 때인지도 몰랐다.
윤설은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윤설이 부엌으로 돌아오자 수다를 떨던 여자들이 뿌루퉁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친구 분이 먼저 가셔서 허전하시겠네요?”
“그….그것이……”
“어찌나 쉴드를 치시던지…. 우리가 뭐 그쪽을 어쩌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보아하니 나이도 우리보다 어린 것 같은데 조선 음식에 조예가 깊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건 당연하잖아요. 뭘 좀 물으려고 하면 친구 분이 딱 나서서 막고, 그거 사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요?”
날선 반응이 윤설을 매우 당황케 만들고 있었다.
홀로 남게 될 경우, 어색할 상황을 예측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윤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 여기셨다니…. 참으로 송구합니다. 그간 낯선 제게 잘들 대해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학식이 부족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조차 죄스러울 뿐입니다. 그저 못난 사람 하나 거둬주신다고 여기시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헐…..”
윤설이 고개까지 조아리자 이번엔 그녀를 마주한 여자들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동안 윤설에게 쏟아지는 특혜를 두고 여자들 사이에선 별의 별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건 윤설이 김 감독에게 뇌물을 썼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거의 듣보잡 수준의 그녀가 단번에 이런 자리를 꿰찬 것이 설명될 수 없었다.
해인이 사라진 오늘에야말로 자세히 캐고 싶었던 이들은 윤설에게 경악하고 말았다.
스스로를 철저히 낮춘 언행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더 이상 반박할 말도 없었고 따져 묻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사극에서나 듣던 말투를 현실에서 듣는 기분은 참 묘했다.
말장난이냐고 따질 만도 했지만 윤설의 차분한 언행은 계획적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황한 여자들이 서로의 시선을 응시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찰나, 밖에서 조연출의 음성이 휙 날아들었다.
“음식 팀, 신 넘버 35 준비하세요.”
“뭐? 얌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새벽 2시……
촬영을 마치고 귀가를 준비하던 윤 매니저가 준을 향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표정은 방금 준이 한 말의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민준이 싱긋 웃었다.
“말 그대로에요. 윤설 씨 집에 데려다주고 가자고요.”
“그러니까, 그걸 왜?”
“아, 해인 씨가 바빠서 먼저 갔거든요. 간곡히 부탁을 해서 제가 모셔다드리기로 약속했어요.”
윤 매니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곧 준에게 눈을 흘겼다.
“저기요, 민준 씨….. 선행도 좋지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아니, 대체 어떤 배우가 스태프 귀가까지 책임진다냐? 참내….해인이라는 그 아가씨도 정말 너무하네. 아니, 요즘 세상에 널린 게 차인데 다 큰 아가씨가 집에도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냐? 그리고 그걸 왜 너한테 부탁해? 아놔….. 한 마디 해야겠구먼.”
“형,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요.”
“뭐?”
“새벽 2시잖아요. 차편이 끊겼을 텐데…. 홀로 집에 가는 길이 위험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우리도 가는 길인데 도와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윤 매니저가 혀를 끌끌 차더니 부피가 큰 가방을 번쩍 들었다.
대기실을 나서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준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한 건 출연을 결심한 이후, 두 번째였다.
다시 말하면 흔치 않은 상황이란 뜻이었다.
물론 그의 말은 하나같이 모두 옳았지만 현실 가능성은 희박한 일이었다.
대세 배우의 차로 스태프를 데려다주는 건 구설수에 오르기 쉬웠다.
형평성에도 맞지 않았고 여러모로 모양새가 이상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방향도 정 반대였다.
빨리 귀가해 잠을 자두는 것이 다음날의 촬영을 위한 최선이지만 준은 그런 생각보단 선행에 더욱 관심이 큰 듯했다.
밖으로 나와 한 마디를 더하려던 윤 매니저가 멈칫하고 말았다.
부엌의 처마 밑, 어둠 속에서 배낭을 맨 채 쓸쓸하게 서있는 사람은 바로 윤설이었다.
그와 함께 나오던 준 역시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떨군 윤설의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마치 고아처럼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귀가를 서두는 이들의 분주함 속에서 그녀는 마치 유리벽에 갇힌 사람 같았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준의 가슴에 고이고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안쓰러움에 서둘러 걸음을 움직이려고 하자 윤 매니저가 그를 막아섰다.
“보는 눈들이 많다. 너 먼저 차에 가 있어. 윤설 양은 내가 모시고 갈게.”
밴에서 기다리는 준이 창밖을 내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누군가를 차에 태워주는 별 것 아닌 일로 이렇게 애태우긴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그에겐 대단히 큰일이었다.
준은 해인의 부탁을 듣자마자 꿈이 아닌가 싶었다.
마치 아무도 모르는 제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었다.
정말 윤설이 제 곁에 앉는다고 생각하면 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떨리면서도 좋은 상반된 감정은 설명이 힘든 것이었다.
홀로 설렘 가운데 조용히 떨고 있던 이에게 드디어 기회가 날아들었다.
-덜컥-
윤 매니저가 밴의 뒷문을 열자 곧 준의 떨리는 시선으로 윤설의 모습이 담겼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듯했다.
어쩐 일인지 가여운 모습은 준을 일어서게 만들고 말았다.
차에서 내린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윤설 씨, 많이 당황하셨죠? 모셔다드리기로 해인 씨랑 약속했으니 어려워하지 말고 타세요.”
한껏 친절하고 다정한 음성이었지만 윤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준이 또다시 용기를 냈다.
그는 제 왼팔을 펼쳐 차의 내부를 가리키며 제법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일 처음이라 당황하셨을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사실 처음 있는 일이라 떨리는군요. 해인 씨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으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윤설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준을 향했다가 그의 미소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 고개를 떨구었다.
“저….. 허면…. 염치없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그녀는 목례하며 준의 친절을 받아들였고 윤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윤설이 떨리는 마음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해인과 준의 배려는 몹시 고마웠지만 매우 낯선 문화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떨게 만들고 있는 건 비단 그 한 가지 때문만이 아니었다.
제 앞에 선 까맣고 커다란 탈 것은 해인이와 함께 다니는 중에 접하지 못한 것이어서 어떻게 올라야 할지 두려웠다.
‘조선에서 온 것을 절대로 티내선 아니 된다. 차분하자. 차분히 발을 내딛고 올라서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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