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2
51회
이지가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여자는 정말로 긴 댕기머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마나 머리를 길러야 저 정도의 길이가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그마한 체구여서 더 도드라져 보였는지도 몰랐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영은의 속삭임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던 그녀를 향해 해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댕기머리를 데려온 뽀글 머리였다.
“우왕, 심이지 씨를 여기서 보다니. 꿈은 아닌 거죠? 오…. 진짜 예쁘시다. 두 분 친하시다더니 예쁜 것도 닮으셨네요? 히잇. 촬영장에서 일하니까 매일 계 타는 기분이에요. 헤헷.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초면치고는 과한 인사였다.
당황한 이지가 머뭇거리는 사이,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상반된 반응이었다.
이지는 덩달아 목례했지만 고개를 들며 내심 안도했다.
친구가 전해주는 얘기가 와 닿지 않아 흘려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러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댕기머리는 평균 신장 이하였고 패션은 요즘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차림이었다.
좋게 말해서 수수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냥 보기엔 딱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휴우…… 공연히 마음을 졸였네. 우리 준이 씨가 저런 여자에게 마음을 줄 리 없지.’
이지는 유난히 공들인 자신의 모습을 뿌듯하게 여기며 자신감 있는 얼굴로 영은과 함께 자리했다.
“어? 거기 해인 씨라고 했던가? 이리 와요.”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던 해인이 윤 매니저의 손짓에 더없이 밝게 웃었다.
“어머, 저희 여기 앉아도 돼요?”
“아, 그럼. 어서들 앉아요. 음식 선생님도 그쪽으로 앉으시고요.”
“아싸, 매니저님, 감사합니다. 준이 씨, 실례할게요.”
민준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매니저의 제안은 못할 말이 아니었지만 뜻밖의 일이긴 했다.
하루 종일 촬영에 매진하느라 윤설을 만나지 못한 그에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기쁠 뿐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해인과 윤 매니저의 넉살이 척척 맞아 웃음을 유발했지만 그 가운데에서 윤설은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모든 스태프들을 초대한 자리여서 어쩔 수 없이 부엌을 겨우 벗어났지만 윤설은 사실 당황의 끝에 서 있었다.
남자들과의 겸상이 난생 처음인 탓이었다.
친 오라비들과도 같은 상에서 식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낯선 남정네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복잡하게 얽히고 말았다.
혼자만이 동떨어질 수 없어 숟가락을 들긴 했지만 그 위에 얹어진 밥은 밥알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모습이 준의 시선에 담겼다.
그가 곧 근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윤설 씨…. 어디 불편하신가요?”
“예예?”
그제야 수다에서 벗어난 해인이 제 벗을 바라보았다.
“어? 윤설아, 너 정말 안색이 별로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순식간에 식탁 위의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윤설이 겸연쩍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저,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어우 야, 네가 먹어야 다 같이 먹지. 이따가 서예 신 있다며? 잘 먹어야 촬영도 잘 하지. 안 그래요? 준이 씨? 선배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죠.”
해인의 씩씩한 반응에 윤 매니저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선배 맞네. 쭌이 좋겠다. 이제 선배 소리도 듣고? 어서 조언 한 말씀 해드려라.”
“아….그게….”
겸연쩍게 웃던 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윤설 씨, 해인 씨 말이 맞습니다. 촬영이 결국은 체력이더군요. 저도 그걸 놓쳐서 초반에 고생했지만…. 잘 드셔야 하는 건 진리입니다.”
식사 중인 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가운데에서 유독 까르륵 거리는 웃음이 도드라졌다.
영은과 커피를 마시던 이지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준이 씨가 웃고 있어.’
더없이 편안하고 밝은 준의 웃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지경이었다.
이지는 카메라를 꺼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제 마음에 그의 모습을 담았다.
“좋아 죽겠지?”
친구의 농담에 이지가 주변을 살피더니 그녀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눈짓이었다.
영은은 알아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곧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봤지? 현장에 여자 스태프들이 없다면 몰라도…. 왜 저들만 저 식탁에 앉았을까?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오늘 보니까 그동안 공연히 마음 졸였다 싶은데…. 자리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님 다른 이유라도 있겠지.”
“뭐? 헐…. 너 정말 웃긴다. 내 촉이 얼마나 정확한지 몰라? 너 생각해서 바쁜 시간 쪼개가며 알려줬는데…..”
영은의 언성이 높아지려고 하자, 이지가 머그잔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네 차 트렁크에 백 하나 넣어뒀어. 내 마음, 알지?”
“뭐? 정말이야? 칫……”
삐죽거리던 영은이 제 머그잔을 들더니 이지의 그것에 부딪혔다.
두 여자가 웃는 낯으로 커피를 삼켰다.
겉으로 보기에 제법 화기애애한 모습은 절친으로서 더없이 완벽했다.
영은의 시선이 친구를 향했다.
“대단한 밥 차에 신상 백까지 준비했다면….또 무슨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야? 받아도 부담이네.”
이지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가방 킬러가 신상을 부담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니? 많은 거 바라지 않아. 회식 자리 한 번만 귀띔해줘.”
“뭐….그쯤이야…..”
부담을 던 영은이 웃음을 터뜨리자 이지가 덩달아 웃었다.
그녀는 커피를 삼키며 다시금 준의 모습을 응시했다.
조용하고 은밀한 눈길이었다.
친구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지에게 윤설의 존재는 까맣게 잊히고 말았다.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에 안심한 탓이었다.
지금은 그저 밝게 웃는 준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과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뿐이면 족했다.
돈을 쓴 보람은 충분했고 행복과 기쁨은 가슴 깊이 차올랐다.
이지의 눈길이 준의 미소를 가득 담아내는 동안, 준의 시선은 윤설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었다.
촬영 종료를 자축하는 회식자리가 시끌벅적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남은 건 최종회까지 순항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파김치가 되었던 이들이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며 회포를 풀어갔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 유독 처진 어깨로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가 있었다.
태주는 스스로 채운 잔을 금세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그의 곁, 심이지의 자리가 빈 채였다.
그날 어색하게 헤어진 후로도 태주는 몇 번이나 연락을 했었다.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와달라고 했지만 이지는 결국 부재를 택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스케줄이라도 있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의 매니저는 그저 사적인 일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태주는 내내 찜찜했다.
아니, 사실은 조금 화가 났다.
이지와 더욱 가까워질 기회만을 바라던 그였다.
하지만 제 본심을 밝힌 이후, 어쩐지 더욱 냉정해진 그녀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자, 우리 남주 태주 씨, 수고 많았어요. 한 잔 합시다.”
촬영 감독이 다가와 태주의 잔에 술을 채우자 그가 웃는 낯으로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감독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남자가 잔을 부딪치려는 찰나, 곁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잔을 들고 달려들었다.
시청률 대박을 외치는 함성이 요란스레 울려 퍼졌고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껄껄 웃으며 동조했다.
제 감정을 숨긴 채 웃어보이던 태주가 주머니 속의 진동에 반응했다.
곧 꺼내 본 스마트폰 위로 낯익은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기다렸던 전화였다.
그는 소란을 틈타 조용히 일어섰다.
식당 뒤편, 자그마한 골목에 이르러 태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외진 곳에선 길고양이 한 마리가 급히 몸을 숨겼을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주가 서둘러 화면을 터치했다.
상대는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부터 내뱉었다.
[ 심이지, 오늘 촬영장에 갔대. 들리는 얘기로는 최영은이랑 절친이라던데…. 친구 응원차 갔다고 하더라. ]통화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태주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봇대에 등을 기댄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훗, 반상? 최영은과 절친이라고? 심이지……. 너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그래, 그렇다고 치자. 아무리 절친이라도 어떻게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 일정을 팽개치고 그곳엘 갈 수 있지? 왜 오늘 꼭 거길 가야만 했던 건데?’
태주가 이번엔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뱉었다.
시선에 담긴 까만 하늘은 달빛조차 흐릿해 마치 제 마음인 것만 같았다.
답답함을 느낀 그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알아낼 거야. 그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너….. 반드시 나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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