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3
52회
촬영을 끝마친 부엌은 여느 때처럼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설거지 거리는 말 그대로 산더미였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는 거의 남을 일이 없었지만 문제는 재료를 싸고 있던 포장들이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재활용 쓰레기는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숙제였다.
모두가 급속히 파김치가 된 가운데 단 한 사람, 해인만은 멀쩡한 얼굴이었다.
수년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숱하게 겪었던 일이 몸에 밴 탓이었다.
해인이 차곡차곡 정리해가는 모습에 여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들 보세요. 이 정도는 일도 아닌데….히잇. 이제 이것만 마무리하면 되니까 다들 먼저 가세요.”
여자들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식사 시간보다 더 기다려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퇴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들이 겸연쩍게 웃었다.
여전히 박스며 비닐들이 늘어져있기 때문이었다.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낸 해인이 웃는 낯으로 손사래 쳤다.
“농담 아니라니깐요? 그 대신 내일, 저희 좀 늦어도 봐주시기 에용? 전력질주를 해도 버스 시간을 맞추기가 좀 힘들더라고요.”
“그거야 뭐….어렵나요?”
한 여자의 대답에 모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 헤헷. 내일 딴 소리 하심 안 됩니다요. 자자, 어서들 퇴근하세요. 저랑 윤설인 마저 정리하고 들어갈게요.”
“그럼, 미안해요. 먼저 갈게요.”
여자들이 은근슬쩍 가방을 챙겨들더니 부엌을 빠져나갔다.
목례로 그들을 보낸 윤설이 해인과 함께 뒷정리를 시작했다.
사실 윤설은 이런 일이 익숙지 않았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조선에서의 방식과 같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방식은 낯설어 그저 곁눈질로 벗을 따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해인이 친구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더니 그녀의 손에 든 상자를 가져갔다.
“윤설아, 힘들었지? 여기 좀 앉아있어.”
“아니다. 너 혼자 힘들 텐데 이리 주렴.”
“노노….이것만 밖에 내다놓으면 끝인 걸? 헤헷. 얼른 다녀올게.”
해인이 상자 여러 개를 착착 모아 양 팔에 들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벗의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윤설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남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가만 있자…. 해인이가 이걸 가지고 이렇게 쓸었지? 이건 싸리로 만든 것이 아니로구나. 신기하다.’
윤설은 부엌 한 쪽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가져와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언제나 아랫것들이 하던 행동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녀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슬픈 건 아니었다.
재밌고 보람도 있었지만 수고한 손길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계기도 되고 있었다.
윤설은 낯선 세상에서 깨닫는 것이 많았다.
부엌문을 겨우 박차고 밖으로 나온 해인이 낑낑대며 걸음을 옮기는 찰나, 어딘가에서 낯익은 음성이 훌쩍 튀어나왔다.
“아이고, 아가씨가 이렇게 무거운 걸 들면 쓰나? 이리 줘요.”
“예에?”
앞이 보이지 않아 버둥거리던 해인은 곧 제 손에서 떠난 상자들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상자를 가져간 존재를 향해 입을 벌린 채 당황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이는 바로 윤 매니저였다.
“매…매니저 님이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조금 전에 음식 팀을 만났거든요. 두 분만 안 보이기에 물어봤죠. 뒷정리 중이라고 해서….그건 그렇고 이 무거운 걸 혼자서 들려고 했수? 참, 대단하시네. 아이고, 이거 어디다 둬요?”
윤 매니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자 해인이 서둘러 그를 안내했다.
“저쪽으로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좀 놀라긴 했지만…. 헤헷. 감사합니당. 조심하세요.”
준이 어둑해진 길을 따라 부엌을 향해 걸어왔다.
음식 팀의 퇴근을 목격하자마자 바람같이 사라진 매니저를 뒤따르던 중이었다.
“휴우… 형도 참…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의도하지 않은 발걸음이었지만 준은 어느덧 윤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부엌 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그녀가 생각났다.
윤설이 서예 선생을 대신해 종종 촬영장에 나타나긴 했지만 부엌은 준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줄곧 머무는 곳인데다가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했던 의미가 큰 탓이었다.
열린 문으로 내부의 불빛이 새어나왔다.
‘형을 찾기 위해서 온 거야. 진정하자.’
들뜬 마음을 추스른 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실례합니다. 누구 계신가요? 형, 여기 계세요?”
형광등 불빛 아래, 열심히 비질을 이어 가던 윤설과 조심스레 매니저를 찾던 준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맞닿았다.
찰나의 순간, 서로의 얼굴 위로 당황이 스쳐가더니 곧 옅은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느낌….. 그리고 서로에 관해 조금은 안다는 안도감이 섞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정히 미소 짓던 준이 동그래진 눈으로 윤설에게 다가갔다.
“어? 윤설 씨, 청소하고 계셨군요? 이리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힘드시잖아요. 저, 청소는 자신 있거든요.”
준이 가녀린 손에서 빗자루를 가져가더니 금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곁에 선 윤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그가 비질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은 것만 같았다.
윤설이 다시금 그를 만류하려는 순간, 준이 허리를 펴며 싱긋 웃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어떠세요?”
“그, 그렇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윤설의 목례에 준 역시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싱크대가 어디에 있나요?”
“….시….싱크….”
“아….제가 손을 좀 씻고 싶어서요.”
그제야 알아들은 윤설이 서둘러 그를 안내했다.
정면에 우뚝 솟아있던 기둥 뒤로 싱크대를 비롯해 조리를 할 수 있는 기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준에게서 감탄이 스르륵 피어났다.
“와, 이곳에서 윤설 씨가 음식을 준비하셨던 거군요? 매번 정갈한 상차림에 감동하던 차였는데 직접 와보니 제법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아요.”
준을 뒤따라온 윤설이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상차림을 모두가 좋아해주는 건 기쁜 일이지만 준의 칭찬은 어쩐 일인지 유독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싱크대에서 손을 다 씻은 준이 뒤돌아보았다.
윤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놀랄 만한 일은 그 다음에 펼쳐졌다.
준의 발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발…. 또 한 발……
흠칫 놀란 윤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만히 떨고 있는 그녀의 이마 위로 준의 손이 닿았다.
윤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어 준을 바라보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이 다정한 손길에 의해 차분해지고 있었다.
윤설을 내려다보는 준의 얼굴엔 싱그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두근….두근….두근….
그녀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은 윤설의 두 뺨을 불그스레 물들이고 있었다.
달빛으로 물든 옥탑방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초는 벌써 오래 전에 꺼진 상태였지만 매트리스 위에 누운 해인도 바닥에 요를 깔고 누운 윤설도 계속해서 뒤척일 뿐이었다.
‘윤 매니저 님….오늘 정말 이상했어. 과분한 도움은 또 어쩔?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신 모습이 뭐랄까? 백마 탄 왕자 같았다고나 할까? 풉…. 왕자는 좀 웃기지만…. 그래, 아무튼 멋지긴 하셨어. 지금까지 날 도와준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지…. 아잉,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간지럽지?’
해인이 벽 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자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던 윤설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애쓰지 않았지만 낮에 있었던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피어났다.
순차적으로 이어지던 장면들이 마침내 한 순간 앞에 멈추었다.
제 이마에 닿았던 그의 손길이 떠오르자 윤설이 파르르 떨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떨림은 분명 두려움이어야 했다.
준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윤설은 겁을 먹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가슴에 피어나는 마음은 단지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나쁘지 않았고 두려운 건 더더욱 아니었다.
윤설이 이불 속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난 이곳 사람이 아닌 터…. 하루 빨리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을……’
윤설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또다시 떠오르는 생각을 막지 못했다.
‘헌데…. 그분께선 어찌 내게 그토록 잘 대해주시는 걸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