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8_5
아이는 유독 또박또박한 말씨로 그렇게 말했다.
그 천진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테오도르는 급격히 파괴적인 기분이 들었다.
또한 동시에 감히 제게 음울해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반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아이가 제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테오도르는 그 어느 것도 기뻐할 수 없는 처지였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그 말에 새하얘지던 안색은 제 안의 깊은 후회로 남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상처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를 위해 자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꺼낸 말이란 데에는 아주 작은 반박의 여지도 없었다.
더군다나 에른스트는 제가 이브에게 카타리나의 거짓 임신을 알렸던 그날에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 제게 그 잔인한 거짓을 통고받은 것이다.
그것을 떠올릴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의 자신을 찢어 죽이고픈 충동이 들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옆에서 버티면서, 이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저를 보며, 이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억을 잃은 사이 저지른 짓거리들이 역겨워 밤중에 뛰쳐나가 토악질을 하길 수차례.
그 끝에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해치며 울부짖었다.
비록 카타리나와의 관계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을지라도, 모두 제가 저지른 과오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글쎄요. 누구였을까요.]제게 화풀이를 하듯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리던 에른스트는, 끝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것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기에 말 못 하는 것이라 애써 생각했다.
이제 와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단 확신이 드니, 무엇을 바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제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기쁨보다도 슬픔과 괴로움이 더욱 짙어졌다.
‘아직은 성급한 생각이야.’
테오도르는 최대한 아이와 관련된 생각들을 밀어 넣으며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아이가 그녀와 관계있다는 확신은 있지만, 정작 어떤 관계로 엮인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얼마 전 보았던 브리안 체르니시아만 하여도 그녀와 참 닮지 않았나.
체르니시아는 모두 그따위로 예쁘게 생겼으니, 어쩌면 그녀와 혈연으로 맺어진 먼 친척 아이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에른스트는 그 당시 조금 미쳐 있었으니까, 헛소리를 한 걸 수도 있다.
‘그만 생각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자, 차츰 마음이 평온해져 갔다.
어느덧 감정을 잠재운 그가 느른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의 흔적이 머문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가 멀쩡함을 확인한 기사들이 쉴 틈 없이 달려오느라 지친 말을 묶어 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테오도르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너희.”
“부르셨습니까, 폐하.”
“뭔데 이브의 공간에 멋대로.”
“네?”
테오도르는 정작 그 자신 또한 초대받은 적 없는 손님이란 사실을 잊어버린 채, 괜한 분노를 태웠다.
“당장 대문 밖으로 꺼져.”
사나운 일갈에 기사들은 영문 모른 채 저택 밖으로 쫓겨났다. 괴팍한 상관을 향한 욕설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다시금 조용해진 저택을, 테오도르는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이곳에서 발견한 도토리 한 알이 들려 있었다.
무심히 손으로 도토리를 굴리며 저택의 정원을 걷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럼 데릭은 누구지?’
생각하지 않으려 하여도 불현듯 떠오르는 불쾌한 의혹이 그의 기분을 몹시 저조하게 만들었다.
데릭은 누구고, 또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던 에른가 뭔가 하는 놈은 또 누구며…….
테오도르의 잘생긴 얼굴이 수심에 젖었다.
그가 저택 뒤뜰의 모퉁이를 막 돌 무렵이었다.
바스락-
멀리서 사람의 인영 하나가 후다닥 도망치는 게 보였다.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 즉시 가늘어졌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곧바로 단검의 형상을 갖추며 달아나는 인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퍼억!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영이 거꾸러졌다.
테오도르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자박.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선 테오도르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성력으로 만들어 낸 단검이 남자의 옷자락을 흙바닥 위로 박아 넣었다.
덕분에 남자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흙바닥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테오도르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뜻하지 않게 ‘데릭’을 발견했다.
“여기서 다시 만나네, 쥐새끼.”
이브와 함께 달아났던 프레데릭 왕자였다.
그의 애칭이 ‘데릭’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파악한 터였다.
[여, 연인입니다!]저 오물같이 생긴 놈이 정말로 이브의 연인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데릭 후보 1순위’가 아닌가.
이브를 닮은 아이의 아빠일지 모르고, 또 이브의 연인일지도 모르는 남자…….
순간, 테오도르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서늘한 미소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 쥐 같은 새끼야.”
미묘하게 욕설처럼 들리는 음성에 프레데릭은 ‘히익!’ 숨을 삼키며 덜덜 떨었다.
* * *
브리안과 나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셀린느의 도움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어.”
셀린느라면 나도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셀린느 레오브란테.
브리안의 약혼녀였던 여자.
내가 에른스트의 도움으로 페르디난트에 숨어 살아남았던 것처럼, 브리안은 그녀 덕분에 레오브란테에 몸을 의탁하였다고 했다.
그곳에서 쭉 숨죽여 지내다가, 몇 해 전 체르니시아의 복권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알게 되며 나를 찾아 움직였다고.
그것은 아마,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기 전 나와 사이가 좋았던 때를 일컫는 것을 테다.
당시의 테오도르는 어떻게든 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주고자 홀로 괴롭게 싸웠었지…….
“어쩌면 네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가족들은…….”
브리안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굳이 말을 잇지 않아도 뒷말을 알 것만 같아, 내 얼굴도 덩달아 흐려졌다.
“아무튼 너를 찾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에른스트 황자에게도 연락을 보냈는데…….”
“그럼 4년 전에 에른스트에게 편지를 보낸 게 브리안 오빠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게…….”
나는 에른스트에게 도착했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이후 갑작스럽게 알게 된 임신 사실에 황궁을 급히 떠나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게 브리안이 보낸 것이었다니…….
“일단 오빠 이야기를 계속해 봐.”
“원래는 황제의 약혼식을 틈타 에른스트 황자에게 한 번 더 접근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약혼식이 연기되면서 실패했어.”
“…….”
내 입술이 가만히 다물렸다.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약혼식을 망가뜨린 것은 나였다.
만일 약혼식이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브리안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다 황제 폐하의 호위 기사단장인 린든 경을 만났고.”
“아, 린든 경…….”
“폐하께서 은밀히 명을 내리셨대.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찾아오라고.”
“…….”
나의 입술이 다시 한번 다물렸다.
기억한다.
린든 경은 나와 테오도르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테오도르가 낙마 후 기억을 잃은 당시 그의 곁에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비밀리에 황명을 수행하러 떠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언제나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던 수석 호위 기사의 부재에 사람들은 자못 궁금해하곤 했었다.
수개월이 지나도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자, 황제의 명을 수행하다 비명횡사했다는 그런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었다.
역사 속에서 황제의 측근이 황명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나와 동료 기사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소문을 기정사실이라 믿었다.
차마 누구도 입 밖으로 먼저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테오도르는…… 내 가족을 찾아 주려 했었구나.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린든 경만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믿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주었다는 걸 고마워해야 할지, 그 결과 벌어진 일들에 원망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러다 세상이 뒤숭숭해지면서 잠시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는데, 며칠 전에 폐하께서 날 이곳으로 불러 약속하셨어.”
“…….”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고.”
브리안은 말했다. 황제가 정말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추진 중이라고.
“그리고 체르니시아를 위해 네가 필요해, 이보네.”
“내가?”
“네가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되어 주어야 해.”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가주가 돼야 한다고?”
되묻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본래 군터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체르니시아의 차대 가주는 리하르트 오라버니였다.
그러나 십수 년 전 나의 체르니시아가 시뻘건 화마에 삼켜지던 날, 리하르트 오라버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나와 브리안뿐이었다.
나와 브리안 중 한 명이 체르니시아를 이끌어야 한다면, 그것은 응당 브리안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리안은 그것이 나의 몫이라 주장한다.
“오빠는?”
“난…… 음…….”
내 물음에 그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셀린느와 식을 올리기로 했어. 그런데 지금 셀린느가 레오브란테의 가주거든.”
“아…….”
나는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긍했다.
셀린느와 결혼을 하면, 브리안은 레오브란테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럼 남은 체르니시아의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게다가 검기도 발현하지 못한 체르니시아의 주인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잖아.”
“…….”
그 또한 옳은 말이었다.
단순히 체르니시아의 전통 때문이 아니다.
체르니시아의 억울함이 밝혀지지 않은 지금, 가문의 복권을 위한 가장 합당한 명분은 바로 ‘검기’일 테니.
정확히는 ‘마물을 물리치는 힘’을 향한 사람들의 갈망을 이용하려는 심산이겠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단순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아닌 마물을 물리쳐 줄 영웅이야.”
그리고 브리안은 그런 나의 짐작에 쐐기를 박듯,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검기도 발현하지 못한 내가 체르니시아의 주인이 될 순 없잖아.”
“…….”
나는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이런 내 반응을 의아하게 여긴 브리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이보네……?”
“불가해.”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답했다.
“불가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도 봤다시피, 난 아이들도 있고…….”
“그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아.”
“…….”
브리안의 말이 옳았다.
내게 아이가 있는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빠가 테오도르인걸.’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된다는 건, 어떻게든 다시 테오도르와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황제가 미쳐 버렸다고 했었지.’
잠깐 마주쳤을 때, 테오도르는 실제로 눈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
[안녕, 쥐새끼야.]나는 그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사르르 웃으며 살기를 뿜어 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어린 황자 시절부터 흉흉한 소문을 잔뜩 몰고 다니던 남자였지만, 그렇게 회까닥 돌아 버린 눈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처음 보았고.
가뜩이나 그는 잡으면 죽여 버릴 기세로 나를 공격했었다.
그런 그가 나를, 욕설 가득한 편지를 남기고 그의 약혼식마저 망가뜨린 채 달아난 이브 로웰린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이브 로웰린에게 자신의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나는 아직도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잊히지 않았다.
내가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를 떠나게 하였던 바로 그 대화.
‘카타리나를 잃고 미쳐 버렸다는 그놈이 내 아기들을 해칠지도 몰라. 혹은 후사가 없으니, 옳다구나 하고 황궁으로 빼앗아 갈지도 모르지.’
내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아이들의 친부가 누구인지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다행히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모두 나를 닮아서, 외양만으로는 테오도르의 아이란 걸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나…….
‘린든 경이 돌아왔으니, 내가 이보네란 것을 알게 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파서 날 기억하지 못할까.’
나는 이제 와 차라리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을 이보네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겼으니까.
차라리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브리안이 나의 믿음을 저버리며 말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네가 여기 있는 걸 알아.”
“뭐?”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황제가 나를, 그러니까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응. 그래서 날 이곳으로 부른 거라 했어. 널 찾으려고.”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테오도르가 그날 내 얼굴을, 그러니까 이브 로웰린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날 이브 로웰린이 아니라 이보네라고 생각한 거지? 역시 둘이 동일 인물이란 걸 알아차린 걸까?’
테오도르의 곁에는 이제 린든 경이 있으니, 그가 말해 주었을 수도 있고…….
혹은 벼락처럼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걸 수도 있고…….
‘아니야. 아직 모르는 일이야.’
그러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도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인가 기대하였다가, 그것이 아님을 알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어쩌면 내가 검기를 사용했으니까, 그걸 알아본 것일 수도 있어.’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검기를 발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테오도르는 황자였으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혼자 추측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결국 테오도르를 직접 마주치기 전까진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보네, 지금이 가문을 다시 일으킬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
“하아……. 그래, 이 시기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다시 체르니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브리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계속 내 이야기만 했지.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건지.”
“그게…….”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나의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 * *
“그러니까.”
나지막이 내리깔린 음산한 목소리가 비틀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너는 그 여자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말끝을 뾰족하게 올리는 순간,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 위로 희번덕한 광채가 번뜩였다.
흡사, 사람을 눈빛으로 질식시킬 수 있는 마귀가 존재한다면 저런 눈동자를 지니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눈이었다.
나무 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프레데릭이 훌쩍훌쩍 울며 대답했다.
“네, 네! 정말,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닙니…….”
“거짓말 치지 마.”
테오도르는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네 부하 놈이 다 실토했어. 두 사람이…….”
이를 악물고 흘려보낸 목소리는 쥐어짜 낸 것처럼 볼품없었다.
“연인 사이라며.”
“저, 정말, 정말 아닙니다. 억울합, 흐윽…….”
프레데릭은 이 자리에 없는 로덴을 원망했다.
대체 그는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저를 이리 고통스럽게 만든 건지.
“그럼, 그건 뭐지? 네 이름으로 주문한, 아기 옷들.”
프레데릭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던 물건들을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두 눈에 힘이 부릅 들어갔다.
아기 옷과 아기 신발, 아기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형과 임부에게 좋은 찻잎들…….
[프레데릭 왕자님께서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던 아가씨가 있는데, 최근 그 아가씨께서 임신을…….] [여, 연인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리아 아뺘는 데릭이야!]순간 테오도르의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진 무언가는 아마도 그를 지탱하던 인내심, 내지는 이성일 것이다.
“네가, ‘데릭’이지?”
묻는 목소리에 살의와 광기가 실려 있었다.
“네가 ‘데릭’이고, 나의 이브를…… 감히, 나의 이브를…….”
테오도르는 당장 눈앞의 이 ‘데릭’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녀의 연인이 ‘데릭’이라면, 그리고 그녀의 아이의 아버지가 ‘데릭’이라면.
이 ‘데릭’이란 놈을 죽여 없앤 뒤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녀의 연인이란 자리도.
그녀의 아이의 아버지란 자리도.
“그, 그건 제 정혼녀가 아이를 가져서, 커, 흑……!”
“그러니까, 쥐같이 생긴 네놈이 내 이브를 임신시켰다는 거 아냐?”
“네, 네?”
프레데릭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젓고자 하였다.
그러나 밧줄로 꽁꽁 묶인 탓에 여의치 않았다.
“이, 이브라니요?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감히, 누굴 속이려고.”
프레데릭의 말을 혼자 살아남으려는 핑계라 여긴 테오도르가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어찌나 확신하는 목소리로 협박을 하는지, 프레데릭은 하마터면 제가 정말로 이브라는 여자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 실수를 한 것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어, 억울…….”
“억울?”
그러잖아도 사납던 테오도르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변모했다.
테오도르는 세상에 몹쓸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프레데릭을 쳐다보았다.
그 자신이 타인의 인성 운운할 만큼 썩 좋은 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가만 보니 저 프레데릭이란 놈은 저보다 더한 놈인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저 오물 같은 얼굴로 그녀를 홀려 놓고서…….
임신한 그녀에게 위험한 일까지 시키더니…….
이제 와 혼자 살겠다고 그녀를 모른 척하기까지 해?
“완전 쓰레기잖아, 이거.”
“흑, 흐윽…… 저, 정말입니다. 그런 여자 정말로 모릅, 모릅, 흐윽…….”
테오도르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삐딱하니 팔짱을 꼈다.
“그럼, 이 집엔 왜 나타난 건데?”
“네, 네?”
“이브와 정말 모르는 사이라면, 이 집엔 왜 나타나고, 왜 그녀와 함께 도망쳤는데?”
“그, 그 여자의 이름이…… 이브였습니까?”
프레데릭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꽤나 신명 나는 연기라고 생각하며, 테오도르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 명백한 의혹의 눈초리에 프레데릭은 흐엉엉 울며 항변했다.
“그, 그 여자에게 저는 그냥 삼십억 골드였습니다. 그날 칼리고르 왕성에서 처음 본 여자였어요. 이름도 이제 알았다고요.”
“삼십억, 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