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19
“시끄러워서 깼구나, 이게 무슨 일이니… 구급차 불렀으니까 어서 내려가서 자. 응?”
“무슨 일이에요? 숙모에게 무슨 일 있어요?”
창문을 통해 들어간 직원들이 열었는지 동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용 여사가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나도 성인이니 더 조심할 것도 없다고 여긴 듯했다.
“둘이 말다툼하다 막내 사모가 발작을 일으켰어. 무슨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처럼 자기 데려가지 말라고, 살려 달라고 갑자기 허공에 대고 싹싹 빌고 그런 모양이야. 세상에, 얼마나 심약해졌으면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는지….”
“…….”
“상무님은 말리려다가 좀 다쳤고. 사모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다가 맞았대.”
구급차가 도착했는지 커튼을 걷은 거실 창이 환해졌다. 용 여사는 어서 들어가 자라고 한 번 더 이르고는 동관으로 바삐 향했다.
집기를 부수고 난장을 부린 게 문지혜였구나. 윤태경이 아니라.
나는 깜깜한 후원으로 나가 쭈그리고 앉았다. 길고양이들 울음에 이어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다시 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언제까지 그 상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부부의 파국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문지혜를 향한 연민에 가슴이 시렸다. 어쩌면, 그녀를 속박하는 족쇄에서 풀려나고 싶은 열망이 착란 상태로 이끈 게 아닐지.
나는 멀어지는 구급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윤태경을 떠올렸다. 그가 아내를 적당히 사랑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지나친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어 광기로 변했다. 그런 그의 감정을 뭐라고 규정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통제. 감금. 병적인 집착. 저열한 순정. 불순한 애정. 유해한 결혼. 피할 수 없던 악연.
확실한 건 하나였다. 윤태경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문지혜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느니 차라리 그녀를 죽이고 저도 죽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다. 그 또한 일그러지고 참혹할망정 사랑의 형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는 거야. 말로만 너를 사랑한다 하면서, 상대방의 바람보다 자기만족을 위하는 건 사랑이 아니지.
책에서 읽었는지, 방송에서 들었는지, 부모가 자녀를 올바로 사랑하는 법에 대한 강의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는 깊이 공감되었다.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사랑은 확실히 그런 것이어야 한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행복을 우선하는 것.
아직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 모르는 내가 이해하기에도 그랬다.
내가 문지혜라면 죽어서라도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것 같았다. 뭔가가 브레이크를 걸어야만 하는 이 관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막내 외삼촌이 유일한 구세주로 보였던 시절도 있었다. 조현애가 사람들 앞에서 날 구박할 때 내 편을 들었고, 학원비를 대신 내 주기도 했다.
어릴 적 이 집에서 유일하게 인간 같았던 윤태경이 떠오를 때면 안타깝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어쩌다 마주칠 때면 다정하게 내 안부를 묻곤 했다.
-잘 지내니?
그러고는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 쥐여 주기도 했다. 늘 100만 원짜리 수표였고 나는 정중히 받아 챙겼다. 어릴 적 액막이로 대신 맞은 맷값치고는 턱도 없이 작았지만.
문득 지하에 있을 조현애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 꿈에 다시 나타나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할머니. 알고 있나요? 당신이 날 액막이로 삼으면서까지 그렇게나 귀애했던 아들이 저렇게 망가졌어요. 아마 앞으로도 더 망가질 테고요.’
겉으로는 모든 걸 다 가진 듯 보이지만 그는 착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은 사랑이 아니게 되어 버린 광기에 휩싸여, 어떤 형태로든 나쁜 결말을 향해서 천천히.
그 나쁜 결말이 부디 문지혜에겐 해피 엔딩이 되길 기원했다.
* * *
새벽 5시가 되기도 전에 눈이 뜨였다. 윤태경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잠을 설쳤지만, 머리는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동관은 텅 비어 있는 듯했지만 주방에선 평소처럼 칼질 소리가 났다. 그러도 보니 오늘 윤부경이 싱가포르에서 귀국한다 했던가.
나는 문지혜나 윤태경의 안부를 묻지 않고 아침을 시리얼로 대강 때웠다. 그러고는 방으로 다시 돌아가 내일 있을 영어 수업 예습을 하고, 아르바이트 시간이 될 때까지 스트레칭을 했다.
마침내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때였다. 그날따라 유독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태울 듯 찔러 왔다.
“은효야! 잠깐만!”
장 집사가 황급히 현관 밖으로 나를 따라 나왔다. 손에는 업무용 휴대폰이 들린 채였다.
“회장님이 막 귀국하셔서 공항에 도착했는데, 너랑 통화 좀 해야겠다고 하셨대. 얼른 전화해 봐.”
“…큰외삼촌이요?”
“응. 아무래도 맞선 얘기 때문이겠지. 그 성형외과 원장. 어젯밤 소동은 너한테까지 언급하지 않을 거야.”
장미희는 휴대폰으로 단축 번호 1번을 누르기 직전,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긴장된 눈빛이었다. 당장 날을 잡으라는 명이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가 건네주는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일주일 전, 호텔에서 만섭 아저씨와 돌아오자마자 장미희와 용지연은 나를 붙잡고 맞선이 어땠는지 시시콜콜 캐물었다.
나는 그냥 밥 먹고 칵테일 한잔씩 하고,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었고, 나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진 않았다며 얼버무렸다. 어른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묻지는 않았었다.
“큰외삼촌. 은효입니다.”
정중하고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집안 사람들에겐 굳이 사회적인 가면도 필요치 않았다. 무색무취, 한 줌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기계처럼 대하는 것만이 최선의 응대이자 방어일 따름이다.
-어, 전 원장 말이야. 뭐가 잘 안 됐냐? 그 친구가 네가 너무 어리고 말도 잘 안 통해서 잘 안 맞는 거 같다, 뭐다 그랬다던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식사하고 얘기하다 헤어진 게 다예요.”
-야, 잘 생각해 봐!네가 뭐 말실수하거나 깨는 짓거리 한 거 없냐고.
“제 쪽에서 그런 적은 없습니다.”
쩔쩔매거나 얼버무리진 않았다. 최소한의 정중함은 갖추되 납작 엎드리는 건 금물이었다. 윤부경과 추성희는 상대방이 비굴해질수록 더 우습게 보고 밟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정말이야?
대꾸가 없자 윤부경이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아니야, 서른 넘게 처먹은 돌싱 새끼가 대가리에 총 맞았나.
-좋다. 그건 그렇고, 너 혹시 연수향 여사랑 아는 사이야? 대현그룹 회장 사모 말이다.
“네? …아뇨.”
대현그룹이라면 대현화학그룹? 연수향이란 이름은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았지만, 다른 그룹 사모님과는 안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성씨가….
-확실해? 하긴 네가 그 여자랑 아는 사이일 리가 없지.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이상한 말을….
윤부경은 못마땅한 듯 또 한 번 혀를 찼다.
-연 여사가 사모들 모임에서 이제 대학 1학년인 조카를 선 자리에 돌린다느니, 별로 안 좋게 보인다고 뭐라 한 모양이던데. 넌 정말 그 일에 대해 몰라?
“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다시는 그런 좆같은 선 자리에 나가지 않게 해 주겠다던 연우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 알았다. 아무래도 맞선은 당분간 보류하는 게 좋겠네, 쯧…. 아무튼 너 말이야, 밖에서 행동거지 조심해!어? 어설프게 연애질이나 하고 다닐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네. 그러겠습니다.”
고자 새끼야. 너나 추성희 몰래 텐프로 클럽에 드나들며 오입질하지 마. 히스테리에 강박성 성격 장애 쓰레기.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언젠가 실낱같은 증거라도 잡히면, 갚아 줄 날이 오기만 하면 바닥의 바닥까지 죄다 까발려 줄 것이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물론 추성희를 위해서는 아니다. 공감 능력 부족에, 선민의식 가득한 자기애성 성격 장애 성향자인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장 집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다시 집을 나섰다. 카페에 가는 동안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결국 연우재가 장담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갔으며, 앞으로도 순탄히 흘러갈 거란 예감에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연수향.
나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아 대현화학 회장 사모인 연수향을 검색해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한라그룹 연정호 회장의 큰누나였다. 연우재의 큰고모란 뜻이다.
일주일 전 연우재가 전화해 내 통화 목록에 멋대로 남긴 그의 번호가 떠올랐다. 저장하진 않았지만 삭제하지도 않았다.
카페에 도착해 늘 하던 대로 홀과 픽업대 정리를 하는 내내, 연우재의 번호가 뇌리 한구석에 붙박여 있었다. 차라리 그의 생각이 나지 않게끔 아주 바빠지길 바랐다.
바라던 대로 점심시간 주문이 평소보다 더 밀어닥치는 바람에, 매니저와 박하연을 정신없이 보조하며 진땀을 흘렸다. 1시가 지나고 간신히 여유가 생겼을 때였다. 매니저가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박하연과 내게 한 잔씩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은효 씨에겐 말을 안 했네요. 나 7월 마지막 주에 휴가 갔다가 8월부터는 광화문 지점 매장으로 출근할 예정이에요.”
“네? 아… 새로 생기는 별관 사옥으로 가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