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20
“맞아요. 어제 갑자기 통보받아서 하연 씨도 오전에야 알았지 뭐예요. 여기야 이제 몇 년 됐으니 알아서 잘 굴러가지만, 아무래도 새로 생기는 매장은 처음부터 관리할 것들이 많으니까.”
매니저가 투덜대자 박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말씀은 이렇게 하시지만 시설 관리팀 내부에서 승진돼서 가시는 거야. 축하드려요, 매니저님.”
“아, 그러신 거였군요. 저도 축하드려요!”
“에이, 축하는요. 그나저나 두 사람 이제 못 봐서 어떡해요? 너무 서운하다. 은효 씨는 8월까지긴 했지만… 나중에 광화문 올 일 있으면 꼭 연락 줘요. 내 사비로 커피 쏠 테니까!”
그녀는 제 후임으로 올 또 다른 매니저도 좋은 사람이라고 강조하곤, 시설 관리팀으로부터 호출을 받아 잠시 자리를 떴다. 박하연과 마저 정리를 하고, 남은 레모네이드를 한 손에 들고 건물을 나섰을 때였다.
또다시 연우재가 떠올랐다. 나는 고층 빌딩이 늘어선 길을 걷다 쇼핑센터 분수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도저히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
일주일 전 통화 목록을 살피는 손가락은 설탕물이 묻어 끈적거렸다. 친구도 연인도 없는 통화 기록은 텅 비다시피 했고, 방치된 번호는 금세 보였다. 나는 구석진 벤치에 앉아 번호를 눌렀다.
-이다음을 하고 싶으면, 연락해. 내 번호니까.
순간 그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스쳤다.
바보, 그걸 간과하면 어떡해!
첫 신호가 가자마자 당황해서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러자 휴대폰이 제 의지로 움직이듯 바로 벨이 되돌아왔다.
연우재였다. 집요하게 울리는 메아리는 멈추지도 않았다. 나는 심호흡 끝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송은효.
“…….”
-전화를 했으면 받을 때까지 좀 진득하게 기다려야지. 원래 대기음 두 번까지만 기다렸다 안 받으면 바로 끊어?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은 자, 잘못 눌렀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변명을 토해 냈다. 건너편에선 희미한 실소가 흘렀다. 내 거짓말을 알아챈 게 분명했다.
-그럼 끝까지 받지 말든가.
“그다음을 하고 싶어서는 아니에요.”
이번엔 연우재가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추리하는 건지, 알아들었지만 다른 이유로 입을 닫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내 의문은 금세 풀렸다.
-나도 별로 안 내키는데? 그때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거고, 네가 원한다면 그다음도 할 기분이었고.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
-왜 전화했어?
“연수향 여사님, 연우재 씨 큰고모님 맞죠? 대현그룹 사모님이요.”
-그게 궁금해서 전화했다가 잘못 눌렀다고 거짓말한 건가?
아차. 혀를 깨물 뻔했다. 하지만 이왕 들킨 거 뭐 어쩌라고.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재차 물었다.
“내가 당분간 선 자리에 나가지 않게 사모 모임에서 그… 언급을 일부러 하신…. 아무튼 윤부경을 막아 주신 그분이….”
자꾸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똑바로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연우재 씨가 혹시 연수향 여사님에게….”
-맞아.
그가 덤덤하게 시인했다.
-내가 고모한테 그렇게 소문내 달라고 부탁했어.
“…….”
-윤 회장 그 꼰대가 귀국해서 뭐래? 당분간 맞선 안 봐도 된다 그래?
“네.”
-혹시 말 바꾸면 나한테 얘기해. 더 확실히 조치를 취할 테니까.
“연우재 씨.”
나는 바짝 말라 가는 입속 점막을 혀로 쓸었다. 그와 나눴던 키스가 떠오르며 양 뺨이 델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연우재 씨 덕분인 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비록 제가 부탁하진 않았지만….”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지 꼭 토를 달아요.
“그런데 정말로… 궁금해서요. 저한테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예요? 저는 연우재 씨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보상으로 드릴 것도 없고요.”
-그렇지, 아무 사이도 아니긴 하지.
“다시 말하지만 그다음은 없을 거예요, 정말로.”
목구멍에 혹이라도 생긴 양 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쥐뿔도 없는 고아 더부살이일 뿐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자존감만은 지키고 싶었다.
-돌아가신 고모가 늘 말씀하셨어.
언젠가 박하연이 병환으로 사망한 고모를 떠올리며 내게 들려줬던 말이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도 절대 너 자신만은 팔면 안 된다, 하연아. 최소한의 자기애와 존엄성마저 팔아 버리면 사람은 그걸로 끝이거든.
남은 맥주를 비우는 하연의 옆얼굴은 어딘가 비장해 보였었다. 흠잡을 데 없이 예쁘고 가냘픈 선에도 불구하고, 절대 깨지지 않을 것처럼 강해 보였던 것은 그녀를 올곧게 키워 준 고모의 영향 때문이었던 듯했다.
-그래서 그동안 타협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텨 왔던 것 같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혹이 많았지만… 하나같이 기회가 아니라 위험으로 보였어. 그 당부 덕분에.
지금 이 순간만은 내게도 적용되는 말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휴대폰 너머의 연우재에게 재차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이유를 말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그 보상으로 뭘 할 수 있는지도. 섹… 남녀 관계가 되는 걸 빼고요.”
미성년자도 아닌데 왜인지 섹스란 단어를 내보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대면 중이면 쉽게 말했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발음조차 어려웠다.
-관심 없다고 했잖아. 참 내… 어디 남산 타워라도 올라가서 확성기로 크게 선언해야 믿을 거야? 난 송은효의 몸에 지나가던 개 좆털만큼도 관심 없다! 차라리 혼자 빼고 말지!
“…….”
-안 믿어?
“믿을게요.”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알고 싶어요. 원하는 게 섹…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지.”
-그렇게 궁금해?
“네.”
-지금 어디야? 학원 수업 없는 요일이잖아. W텍 사옥?
W텍 사옥은 15분 전까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카페 건물이었다. 그의 명의로 된 빌딩이기도 하다.
-근처요. 알바가 방금 끝나서 G쇼핑센터 앞에 있어요.
설마 만나자는 얘긴가? 나는 햇살에 시린 눈을 들어 빽빽한 빌딩 숲을 정처 없이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여기 어딘가, 연우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CAM파트너스의 강남 지사가….
-기다려. 지금 갈게.
“네? 지금 어디 있는데요?”
-도산대로 531.
“…….”
-안에 들어가 있어. 얼굴 안 타게.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뚝 끊겼다. 나는 그늘의 벤치에 그대로 앉아 도산대로 531을 검색해 보았다. 차로 5분도 안 걸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