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34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여쭤볼 게 많은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오자마자 일 얘기냐? 지독하다, 지독해.”
신주환은 투덜거리면서도 우재의 랩탑을 끌어가 최근 인수 작업 중인 메디컬 회사에 대해 운을 뗐다. 이 건만 잘 성사되면 회사 창업자가 보유 중인 지분 99.5%를 단번에 끌어올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CAM파트너스가 손에 넣은 의료 기업만 다섯 개가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각광을 받지 못했던 의료 기기 시장의 집중 공략은 우재의 제안이었다. 최근 메디컬 AI 시장이 미래 고부가 가치 분야로 떠오르며, 그의 판단은 곧 엄청난 지분확보와 수익으로 연결되었다.
“하여간 껄렁껄렁하면서도 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다니까. 저녁엔 우리 집에 가서 오랜만에 집밥이나 먹자. 와이프가 너 나왔다니까 꼭 데려오라 하더라.”
“네, 그러겠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제대 직후 복학한다 했다지? 그래, 잘 생각했다. 언제고 졸업은 해야 되니 빨리 학기 마쳐 버리는 게 낫지.”
“제가 고졸이라 누가 싫다 해서요.”
“뭐? 누가?”
“학기 중에도 수시로 본사에 오갈 테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최대한 온라인 수강으로 집중시키면 시간도 많이 안 뺏길 겁니다.”
“그렇게 해라. 그나저나 누가 너보고 고졸이라 싫다 그러디? 여자가? 하하, 별소릴 다 듣겠네.”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는 잠시 어렸던 웃음기도 거두고 억양 없이 대꾸했다. 손에 이어폰의 말랑한 감촉이 만져졌다. 송은효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저씨, 그보다 여쭤볼 게 있어요.”
“어, 뭔데. 혹시 AUM 차트 볼 거면 이따 회사에….”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그 사고 말인데요.”
신주환은 그가 고인에 대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 사건의 경위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실상 의견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입 밖에 그 말을 꺼낸 순간, 당시 사고의 재조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음… 어려울 수 있지만 한번 알아보마.”
신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연우재가 원하는 대답은 늘 정해져 있다.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너무 옛날 일이라 불가능해’ 따위의 그런 답은 하나 마나다.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건 미리 양해를 구하마.”
“네.”
랩탑 커버를 닫으며 우재가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어투였지만 명령이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태생부터 언제나 정점에 서 있던 부류, 특유의 그 오연함은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앞에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다.
연우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송은효도 그걸 느꼈을지 문득 궁금했다.
그 애는 날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요즘도 내 생각을 하긴 할까.
* * *
마지막 달로 넘어가며 부쩍 추워진 날, 아침부터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기말고사는 끝났지만 아직 종강 전인 수업이 있었다. 장 집사를 통해 매달 추성희로부터 용돈을 받는 날이기도 했다.
“10만 원 더 넣었다. 어제 적금 만기돼서 시내 나갔다 왔잖니. 내가 주는 용돈이라 생각해.”
장미희는 주방에서 봉투를 건네주며 오늘의 날씨를 일러 주듯 덤덤하게 덧붙였다.
“네? 하지만….”
“넣어 둬. 물가도 올랐는데 어쩜 조카 용돈은 딱 차비랑 간신히 밥 사 먹을 정도만 주는지. 매 학기 꼬박꼬박 장학금을 타니 학비도 안 드는데, 용돈이라도 좀 넉넉히 챙겨 주면 좀 좋아.”
“집사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괜찮아요. 10만 원은 다시….”
“아유, 100만 원도 아니고 10만 원인데 그냥 받아. 한창 돈 들어갈 땐데 더 못 주는 게 미안하지. 학교 늦겠다, 빨리 가.”
그녀는 내 등을 살짝 밀었다. 돈이 늘 빠듯한 건 사실이었지만, 여름부터 카페 아르바이트로 조금 여유가 생긴 건 장 집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털어놓을까, 망설이다 결국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돌아서서 집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외삼촌, 외숙모도 안 주는 용돈을 왜 그녀가 준단 말인가. 홀로 가족을 부양하는 장 집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5만 원도 쉬이 쓰지 못할 것이다.
슬슬 새 아르바이트를 알아볼 때가 되긴 했다. 그동안 꽤 익숙해진 카페 일도 다음 주면 끝이다. 해가 바뀌면 정규직으로 채용된 바리스타 직원들이 새롭게 출근할 예정이었다.
역시 다른 카페 일을 알아볼까. 영어는 당분간 동영상 강의나 전화 스피킹을 하면서….
박하연과 서재은은 차라리 과외나 공공기관 기간제를 알아보라며 말렸다. 바깥의 일반 가게들은 매일 정해진 손님들만 상대하는 사옥 카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잡일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게 이유였다.
-진상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원래 사람들 상대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 않았어요? 그럼 훨씬 더 힘들 거… 응? 북 카페? 생각도 하지 마요!
대형 북 카페와 만화 카페에서 일해 봤다는 서재은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모텔 갈 돈 없는 애들이 와서 커튼 뒤랑 그, 방갈로처럼 만들어 놓은 텐트 있잖아요? 거기서 몰래 끙끙거리고 정액 흘리고 가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에요. 깔개랑 커튼 떼어 빤다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혀를 내두를 만큼 충격적인 얘기가 더 이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마음을 돌렸다. 북 카페나 만화 카페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확 트인 공간이 좋을 듯싶었다.
-너 정도면 과외 자리도 많을 텐데. 시간 대비, 돈은 과외가 제일 낫지 않아?
박하연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하고자 하면 확실히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페처럼 단발성 대화가 아닌, 일대일로 몇 시간씩 마주하는 건 상상만 해도 고역이었다. 아무리 비즈니스라도, 타인과 사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연우재와 단둘이 있는 순간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분명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데다 뭐든 제멋대로 했음에도, 타인과 단둘이 있는 데서 오는 긴장감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편했던 순간이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확실히 그랬다.
그는 내가 남들에게 하듯 저를 보곤 잘 웃지 않는다고 뭐라 했지만. 정작 웃으니 가식 미소는 다시 넣어 두라 진저리를 쳤지.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은효 씨, 어서 와요!”
매니저 서재은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수업이 끝나고 도착한 카페는 그날따라 한가했다. 연말이라 미뤘던 연차들을 쓰는지, 사옥 전체가 한산한 분위기였다.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할까요? 홀 정리는 내가 싹 해 뒀어요. 마침 손님도 없고….”
서재은은 홀과 스테이션을 다른 직원에게 맡기곤 나를 스태프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뭔가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분위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얘기일까. 카페 근무는 이제 주 5일 정규직이어야 하니, 방학 동안 일을 더 해 달라는 요청은 아닐 터였다.
“방학에 할 알바 구했어요?”
“아뇨, 아직이에요. 내일 완전히 종강되니까 이제 슬슬 알아보려고요.”
“그럼 내가 옮길 가게에서 같이 할래요? 나 사실 다음 주부터 친구가 소개해 준 데로 이직하는데 마침 한 명 티오가 났대요.”
“어… 다른 카페로 가시는 거예요?”
“카페는 아니지만, 네. 이태원이면 은효 씨 집이랑도 가깝지 않아요? 외국인 손님이 더 많다는데 은효 씨는 영어 잘하니까.”
“아아… 이태원이면 확실히 집하곤 가깝네요.”
“정확히는 한강진 쪽. 주택가라 평일에도 엄청 조용하더라고요.”
내심 반색했다. 어차피 학원도 쉬고 아르바이트만 할 거면 직주 근접이 좋다. 게다가 외국인 손님과 꾸준히 대화할 수 있다면 온라인 강의나 전화 영어 비용도 아낄 수 있으리라.
“둘째 주부터 시급이 최저 임금 2배예요. 한 달 뒤에는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도 지급되는데 그럼 최저 임금 2.5배까지도 될 것 같고요. 손님은 여기보다 더 적은 업종이니 은효 씨한테도 잘 맞지 않을까 싶은데.”
“네? 어떤 곳이길래…. 저, 혹시….”
아르바이트인데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라니? 설마 유흥업소나 마약 전달책, 이런 건 아니겠지.
“걱정 안 해도 돼요! 불법 이런 거 전혀 아니니까. 실적은 판매 수당을 말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