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33
아무리 부당하고 불공평해도 환경은 일차적인 것일 뿐,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오롯이 자신이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가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할 터였다. 성격이 곧 사주팔자나 다름없다는 얘기처럼.
그 말에 이의는 없었다. 그래서 다들 매일, 크고 작은 번민과 고뇌 하에 살고 있겠지.
일상의 대소사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서. 이성과 감정 사이를 오가며, 최선의 선택을 통해 최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며.
나 또한 그랬다.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 마침내 가을이 저물어 가는 지금까지도 연우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내가 그날 잃은 건, 길 어디선가 떨어뜨렸을 이어폰 하나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개강하고 2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때만 해도 연우재를 온전히 지울 자신이 있었다.
아. 다들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였구나. 잊고, 잊히고. 결국 시간이 약이며 답이라는 진리가 뼛속 깊이 체감되었다.
오래 만나 절절하게 사랑했던 연인들조차 그렇게 극복하는데 내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심지어 그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는데.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내 감정과 사실은 철저히 분리되어야만 한다. 지난여름 동안, 내 삶에서 그를 정의할 단어는 딱히 없었다.
연우재는 과연 내게 무엇이었을까.
일부러 레벨에 맞지도 않는 내 수강반으로 들어와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스토커. 늘 일방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좋은 곳에서 밥을 사 주고 더치페이라고 입으로만 떠벌리는 욕쟁이. 맞선 자리를 파투 내 주었고 당분간 강제 맞선을 보지 않게끔 도움을 준 은인.
나를 진창에서 끌어내 주겠다고, 구원자를 자처한 사람. 내 몸 따위, 지나가던 개 좆털만큼도 관심 없다고 호언장담한 주제에 사실은 아니었다 고백하며 사귀자고 했다가 차인 남자. 그리고….
멋대로 키스하고, 처음으로 내 몸을 만진 남자. 변태 새끼. 개새끼.
그 개자식이 간간이 의식을 비집고 들어와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깡그리 잊히겠지,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하지만 쉬이 그리되진 않았다. 박하연이 개인 사정으로 청담동 사옥의 카페를 그만두면서, 서재은이 도움을 청해 왔다.
-은효 씨, 잘 지내죠? 학교 다니느라 바쁠 텐데 오전부터 불쑥 미안해요!
정기 로테이션에 따라 8월 초에 새로 왔던 매니저였다. 잠시나마 함께 일할 때 좋은 기억만 있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 올해 말까지 주 2일만이라도 좀 도와줄 수 없을까요? 금요일 오후부터 마감 타임까지, 토요일은 점심때만이라도요! 진짜 죽겠어요. 단순 알바가 아니라 회사 비정규직으로 불러야 되니까 위에서는 까다롭게 이것저것 따지고, 간신히 구해 두면 금방 그만두고….
-아… 네. 할게요. 중간고사는 마침 지난주에 끝나서 괜찮지만 기말고사 기간만 빼 주시면….
-그럼요. 그때는 다른 직원이랑 미리 조율해서 은효 씨 시험엔 지장 안 가게 할게요!
나는 얼떨결에 승낙하고 다음 주부터 나가기로 얘기를 마쳤다. 영어도 어드밴스까지 따 놔서 잠시 학원도 쉬는 참이니, 주 2회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숨 막히는 집에 있는 것보다 어디든 나가는 편이 백배 낫다.
8월말에 귀국한 추성희와 윤소담 덕분에 위층은 다시 번잡스럽게 변했고,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적하고 평온했던 여름이 거짓말 같다고, 장 집사와 용 여사도 혼잣말을 할 정도였으니.
잠깐. 그러고 보니 거긴….
카페가 있는 사옥은 연우재가 관리하는 건물이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는지.
상관없잖아. 군 복무 중인데. 잘은 몰라도 휴가는 몇 달에 한 번 며칠만 나오지 않나…?
휴가 중 건물 관리나 시찰 업무까지 할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소유든, 집안의 것이든, 연우재와 마주칠 가능성은 없을 듯했다. 제발 그러길 바랐다.
나는 과 휴게실에서 보고 있던 전공 서적을 덮고, 마침 안으로 들어오는 동기들과 잠시 수다를 나눴다. 2학기가 되자 조금씩 ‘친구’에 가까운 관계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직 ‘친구’라 부를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어쩌면 졸업까지 거리가 이 이상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웃사이더로 지낼 수만은 없으니까.
조금씩, 조심스럽게, 나는 바깥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단지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연우재와 알게 된 후로 타인들을 대하는 게 훨씬 편해진 것도 같았다.
* * *
심리학의 근간은 그 이름처럼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학문이다. 타인의 내면, 때로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당연히 인간의 이해, 그 자체일 것이다. 이건 중학생도 다 알 만한 얘기다.
냉정하고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따스한 시선으로, 그리고 애정을 기반으로 그 무수한 요인들을 알고자 해야 한다, 분석자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상담 심리학’ 과목의 교수님은 학회 세미나에서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었다.
인간만큼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며 모순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자신과 타인을 재단하는 기준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불공평하고 심지어 그걸 의식하지도 못하는 인지체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 인지 부조화의 가장 흔한 케이스는 습관적인 ‘내로남불’이었다. 편의점에 단 30분만 있어도 그런 예시는 쉽게 들려온다.
“씨팔. 그래서 내가 저녁값 절반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어. 오늘 즐거웠다, 다음에 또 보자, 그렇게 좋게 인사하면서. 그랬더니 뭐라 온 줄 알아?”
학교 앞 편의점에서 남자 둘이 컵라면을 두고 언성을 높였다가 슬쩍 톤을 낮췄다. 둘 다 학교 로고가 박힌 과 점퍼 차림이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온 거야. 봐 봐. 당연히 그쪽이 내는 줄 알았는데요? 씨발. 내 여친도 아니고 첫 만남에 내가 왜 사 주냐.”
-사귀지도 않을 건데 내가 왜 사 줘.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자고.
그리고 그런 예시 속에서도 나는 연우재와의 시간을 자꾸만 상기하고 있었다. 아무 연관도 없는데, 어떻게든 엮어서 회상의 핑계로 삼으려는 데 혈안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뻔뻔하네. 크크… 근데 야, 너도 좀 그렇다. 그냥 잊어버리지 그거 얼마나 한다고 기어이 반을 받아 내냐. 소개받은 건데 찌질하다고 소문내면 어떡해?”
“소문내라지? 생각 있는 애들이면 걔가 양심 말아먹고 내가 호구 될 뻔했다고 하겠지. 안 그러냐? 하긴 다행이다. 첫 자리부터 밥 얻어 처먹겠다는 애랑 사귀었다가 뭔 좋은 꼴을 보겠어. 난 무조건 사귈 때도 데이트 통장 만들어서 칼같이 관리할 거야, 공평하게.”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도시락 비닐을 뜯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뭔가를 듣는 것처럼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끼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어폰은 길에서나 학교에서나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쓸데없이 말을 시키거나 수작을 부리려는 남자들의 말을 못 들은 양, 무시하기 좋았다.
실제로 음악이나 강의를 들을 때는 주로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움직일 때는 이어폰이 주의를 흐트러뜨려서 즐겨 끼지 않는다.
“야, 그나저나 저기 봐 봐.”
아니나 다를까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척 도시락을 빠르게 비워 갔다.
“쟤가 걔지? 우리 학교 내추럴 뷰티. 야, 등짝만 봐도 몸매 죽인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 못 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근데 그 소문 맞아? 어디더라, 무슨 언론사 사장 딸이란 거. 친척이랬나.”
“외모 때문에 퍼진 헛소문이지. 그렇게 금수저 딸이면 여기서 4천 원짜리 도시락이나 까먹고 있겠냐. 차림새도 잘 뜯어보면 명품 하나 없던데?”
“씨바, 얼굴도 얼굴이지만 진짜 금수저면 내가 사귀고 싶다. 다른 건 됐고, 그 언론사에 낙하산으로 입사 좀 시켜 달라고.”
“와, 내로남불. 아까는 진짜 사귈 때도 데이트 통장 칼 관리 한다더니.”
더 듣기 싫어서 재빨리 도시락을 해치우고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했다. 거기서는 갓 퇴근한 여직원들이 조곤조곤 낮은 소리로 신입사원 평가를 곁들여 직장 내 기본 위계질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진짜 모르겠어요. 제가 볼 땐 개인주의보다, 일단 반골 기질이 강해요. 조직 자체에 안 맞는 성향이랄까.”
-너, 세상 살기 진짜 힘든 성격이야. 반골 기질이 은근히 강해.
-그건 연우재 씨가 더할 것 같은데요? 연우재 씨도 충분히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해 보이는데….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요.
이 근처 라운지에서 만났던 날, 그가 툭 내뱉었던 말이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근데 우리도 신입 때 생각하면 이런 말 하는 것도 내로남불일 듯?”
“맞아요! 저 주임님, 처음에 신입 OT에서 자기소개할 때 깜짝 놀랐잖아요. 그때….”
여자들은 깔깔 웃으며 한참 다른 화제로 수다를 떨다 자리를 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텅 빈 홀을 둘러보았다.
나는 언젠가 연우재가 랩탑을 펼쳐 놓고 있던 자리를 길게 바라보다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잊히지 않아서, 이만큼 힘이 들 줄은 몰라 당황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다.
* * *
판교에 이어 광화문 한가운데 준공된 CAM파트너스 제2 신사옥은 그야말로 화려한 철옹성 같았다.
고객의 돈을 굴리는 투자사만큼 겉껍질이 중요한 곳은 없다 했던가. 그에 충실하게, 외관과 내관 모두 돈을 겹겹이 바른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회장실만은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되는 건지, 현재의 월급 회장의 취향일 뿐인지, 무미건조할 만큼 꼭 필요한 가구만 완비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한 우재는 랩탑을 열어 실적 그래프를 무심히 훑었다. 한쪽 귀에는 몇 달 전 컴포트 서울 계단참에서 주운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의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 앞에 앉았다.
“야, 이 녀석. 너는 깍두기 머리를 해도 여전하구나. 누굴 닮아 이렇게 잘생겼냐, 참.”
“글쎄요. 회장… 아저씨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미국 밥 먹어도 구력은 여전하고.”
신주환은 껄껄 웃었다. 아들뻘인 청년이 웃음기 하나 없이 틱틱거려도 그저 반가운 모양이었다.
“용인 선영(先塋)에 아버지랑 어머니는 뵙고 왔겠지? 휴가도 안 나오고 주말에도 부대에 콕 박혀 있더니 이게 얼마 만이냐. 서울에 빚쟁이 숨겨 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나오질 않았어?”
“오면 못 참고 보러 갈 게 뻔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