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85
“권수현이 사망했다면, 일가 모두 뉴욕으로 출발했겠군요.”
통합 신명교 고 권태섭 초대 교주의 장손이자, 2대 교주 고 권명한 총재의 아들. 그리고 그 후계자로 암암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장남 권우혁과 권이결의 아버지. 권수현의 죽음이 일으킬 파장은 ‘뉴욕의 재활 센터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한국계 부호의 최후’ 그 이상일 터였다.
-네. 권우혁 대표도 몇 시간 전 출국했습니다.
“권이결도요?”
-네. 같은 전세기입니다. 일가가 모두 함께 이동 중인 걸로 확인됐어요.
사적인 이유로 권우혁보다 권이결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더 이상 송은효 주위를 맴돌지 않는데도 여전히 안심되지가 않았다.
권이결은 송은효를 구하겠다고 사이비 소굴에 자진해서 뛰어든 것도 모자라 제 몸을 던졌다. 키우던 개에도 애착이 없을 사이코패스 새끼가 저 아닌 타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자연사는 확실한가요? 권수현 말입니다.”
-네, 그러잖아도 궁금해하실 것 같아 현지 재활 센터와 병원 관계자에게 접촉을 시도 중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뇌졸중 발병으로 인한 자연사는 확실해 보입니다만.
이대호의 음성 저편으로 종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에 말씀하신 천희중 건도 좀 더 알아볼까요? 워낙 촘촘하게 얽혀 있어 시간은 다소 걸릴 겁니다.
“네. 그렇게 해야죠. 천희중의 죽음만으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살극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와 생전에 티끌만큼이라도 연관됐던 세력가들 모두 샅샅이 파 보세요. 특히 윤성일보 전 회장 윤택근과 조현애, 그들과의 밀착 관계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도 확보해야 합니다.”
강요로 이루어진 반쪽짜리 자살이든, 교묘히 진행된 타살이든 상관없다. 그걸로 윤성일보를 잡고 끌어내릴 명분이 있는 한.
-알겠습니다. 진행 상황에 따라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대호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시구나, 정말로.”
윤성일보 일가를 확실히 조져 버리겠다는 상사의 의지는 의심할 나위 없이 굳건했다. 천희중이 조현애의 심적인 스승을 자처하며 어떤 만행까지 저질렀는지 알게 된 후로는 더욱.
“이 인간은 정말 죽어도 싸지. 아무리 윤 전 회장 전처 소생의 외손녀라도 그렇지,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그런 어린애를….”
액막이라니 끔찍했다. 17년 전이면 그리 오랜 과거도 아니건만.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진저리를 치다, 다시 울리는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상사가 뭔가 잊은 듯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예, 팀장님.”
-뭔가 얻어 내면 윤성일보에 슬쩍 떠보면서 딜을 제안하세요. 자세한 건 파일로 보내죠.
“그러겠습니다.”
이대호는 영상 통화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거래를 제안하는 연우재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 너머에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간을 보는 과정에서 윤곽이 잡히게 된다 해도 한라그룹과 CAM파트너스의 이름에 한 번 더 가려지게 될 터였다.
“윤부경에게 말씀이시죠?”
-아뇨.
상사의 이어지는 말에, 이대호의 손끝에서 빙빙 돌아가던 펜이 멈췄다.
-윤성미디어의 윤 상무요. 윤태경.
* * *
청연(晴煙)이 보인 지 오래지 않아, 쾌청하던 겨울 하늘은 어느새 탁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비행에 차질이 생길 만큼 심하진 않았다.
이결은 일가 소유의 전세기에 착석하자마자 머리에 헤드셋을 건 채 두 눈을 감았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거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죽은 듯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권수현의 부고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떼거리에 섞여 일가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게 피로할 따름이었다.
그가 아니라도 장례식은 미어터질 것이다. 어차피 수천, 수만 명의 신명교 신도가 병원에 진을 치고 고인을 애도하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는 외형적으로 늘 반듯했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후계자로 철저히 단련되면서 자연히 밴 단정함, 입가의 온화한 미소는 타인의 호감을 사고도 남았다. 정신이 붕괴되고 약물에 중독되어 결국 폐인이 되어 버리기까진 그랬다.
하지만 그와 형 우혁에 대해서는 달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도 지독하게 비틀린 자아를 표출하며, 아들들 앞에서 아내를 향한 소유욕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그 비밀을 알기 전부터도 그랬던 걸 보면, 사람의 직감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본능은 처음부터 알았던 거지. 나와 형이 당신 자식이 아니란 것을.
반면 조부 권명한은 형제에게 늘 자애롭고 따뜻했다. 그에 대해서만은 나쁜 기억이 없었다. 좋지 않았던 것은 자살하기 전의 어머니, 그리고 생전의 아버지에 얽힌 것들뿐이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권명한은 우리가 제 자식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어떻게 진실을 접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유경이 털어놓지 않았을까.
-아버님, 어디 계세요? 오늘 나가실 때 옷차림이 어떠셨어요?
-출장이요? 말씀도 없이, 갑자기 가셨다고요?
어머니 정유경은 늘 시부 권명한의 동향을 살폈다. 섬뜩할 만치 파고들기 일쑤였다.
-네, 오 비서님. 아직도 아버님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어떻게 된 거죠? 함께 계신 게 아니었나요? 내일이 어머님 기일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권명한에게 무섭도록 집착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가 장기 출장을 떠나고 어머니와 할아버지 단둘이 있던 거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심장이 정지해 버릴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권우혁이 눈을 가리고 반강제로 침실에 데려간 후, 그 뒤로도 그 혼란스러웠던 정경은 뇌리에 오래도록 잠식해 사라질 줄을 몰랐다.
권명한은 동년배의 어른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큰아버지라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버지 권수현과 닮은 얼굴에, 그보다 훤칠한 키, 2대 교주로서 재단을 크게 키우고 세력을 전례 없이 확장시켰던 카리스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환심과 호감을 사는 미소, 여유롭고 중후한 분위기엔 세월이 훑고 간 주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리디어린 여 비서조차 미혹될 만큼.
그가 목격했던 구부간(舅婦間)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잘 알았다. 권명한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화를 내다 안겨서 오열하기까지,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자를 눈앞에 둔 여자일 뿐이었다.
-애미, 목소리 낮춰라. 애들 깨겠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적어도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그만. 이제 제발 그만하자.
-아뇨. 그만둘 수 없어요. 절대. 난 그만두는 방법 자체를 몰라!이렇게 매일 당신을 보고 듣고 느끼는데 어떻게 멈출 수가 있어요.
-유경아.
-나는 몰라… 이 감정을 어떻게 멈추는지. 10년 전 그날 이미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비서로서 당신을 보필하는 내내, 당신이 나를 속이고 아들의 맞선 자리에 날 들이밀 궁리만 했을 때도 징그럽게 멈추질 못한 이 마음을!
-널 속인 게 아니었어. 난 처음부터 널 내 아들의 짝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결국 당신 아들과 결혼했죠. 당신 옆에 있으려고!
울음이 터지고 조부는 당신의 며느리를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서류상 아들의 여자이나, 최소 두 번은 동침하고 임신시킨 제 여자를 달래기 위해.
권우혁과 자신은 그 부도덕한 관계에서 태어난 결과물이었다. 구부간의 배덕한 접점, 부도덕의 산물인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선을 넘었는지, 조부가 천륜을 저버렸을 땐 아들 권수현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는지.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마저 저버릴 만큼 욕망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인지. 그만큼 그 또한 어머니에 대한 감정, 혹은 육체적인 갈망이 강렬했는지.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 권우혁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시부가 아닌 남자로서.
만일 사랑했다면 아들과 결혼시키기 전부터였을까? 혹은 그 후에 감정이 생긴 건가. 만약 전자라면 대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해?
형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집안의 적법하고도 정당한 핏줄이란 사실이지.
-형은… 우리가 이 집안에서 후계자로 떳떳하게 설 수 있다 생각해?
-떳떳하지 못할 건 또 뭐 있어. 아버지가 알고 보니 난임이었든, 하필 시부와 자부(子婦)가 배를 맞춰 붙어먹은 날에 너랑 내가 생겼든…. 우리 선택인 건 단 하나도 없었는데.
날씨 얘기를 하듯 덤덤하게 이어지는 다음 말엔 그조차도 머리끝이 쭈삣 섰다.
-아버지도 그렇지. 마누라가 제 아비랑 빠구리 떠서 생긴 애새끼들이 제 새끼인 줄 알고 지극정성 키웠다가 뒤통수 맞은 충격도, 그래서 약에 절어 망가진 것도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권우혁은 세상에 사랑 따윈 없다고 못을 박았다. 어머니가 시부에게 가진 감정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소유욕과 집착일 뿐이었다 주장하면서.
-우린 그냥 태어난 죄밖에 없어.
달칵, 금속음과 함께 연기 한 줄기가 눅눅해진 공기 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너도 이제 힘을 키워. 그림쟁이 행세는 취미로 하고.
뭐라 떠드는 것들의 입은 찢어 주고 힐끔거리는 것들의 눈알은 파내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을 힘을 의미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들에겐 태생부터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이상, 이 화려한 시궁창 속에서 어떻게든 군림하며 생존하기 위해 발악해야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