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17)
120화. 언가의 가주 대리
“첫 번째.”
공손수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거지들이 왜 모여있었을까요?”
“…무슨 뜻이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사흘 전부터 이미 거지들은 이 거리에서 종적을 감췄다고 했었죠. 시신을 살펴봤을 때 죽은 시기와도 얼추 일치했어요. 즉, 전원이 분타 내부에 꾸역꾸역 모여있다가 한꺼번에 당했단 뜻이죠.”
공손수는 설명을 이었다.
말인즉슨, 현내의 모든 거지가 유독 그날따라 아무 이유도 없이 동냥질도 내팽개치고 분타 내에 모여있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두 번째, 누명개 장로 말인데요. 정확히 우리의 목숨이 경각이 달한 순간 출구를 뚫고 구해주었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오라버니도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지부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 제법 고생을 했잖아요?”
“…본래부터 위치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나?”
철면개와는 달리, 본래 이 근방에서 산적들의 뒤를 쫓고 있던 누명개라면 진량현 분타의 제자들과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혹은 이벽과 일행들이 뒷골목에서 죽어가던 거지를 발견하여 분타의 위치를 전해 들은 것처럼, 어딘가에서 따로 단서를 얻었을 수도 있다.
“맞아요. 다만 제 생각에는 본래부터 이쪽 지부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몰살 앞에서 그렇게 태연할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리고.”
공손수가 말을 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거지 말인데요. 우리에게 분타의 위치를 알려주었던.”
공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죽었대요.”
“…….”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허나 돌이켜보면 이미 발견했을 때부터 회광반조를 일으키고 있었기에, 피하기는 어려운 결과였을 테다.
“하지만 왜 거기 있었을까요?”
허나 공손수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애당초 상처를 입었다는 건 분타 내의 싸움에 휘말렸단 뜻인데, 그 사람이 발견된 위치는 정작 뒷골목이었죠? 분타의 입구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데… 대체 그 몸으로 왜 굳이 거기서 사흘씩이나?”
이벽은 할 말을 잃었다.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지어는 뿐만이 아녜요.”
공손수가 다시 손가락을 펼쳤다.
“분타 내외를 샅샅이 뒤졌지만… 생존자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죠. 그러니 우선 참사로부터 탈출에 성공했던 건 단 두 명뿐인 셈이에요.”
“…두 명?”
“네, 우리가 발견했던 그 거지, 그리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앵화촌까지 달려와서 참사 소식을 전해주었던 전령이 있었잖아요?”
“……!”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둘 중 한 명은 우리를 이 진량현까지 오도록 유도했고, 다른 한 명은 친절하게도 분타의 위치까지 안내해준 셈이죠.”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쉬었다.
“뭐,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몇 개 더 있지만… 일단은 이 정도만 할게요.”
골목에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이벽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미심쩍게 느껴지는 일들이지만, 하나하나를 따져보자면 충분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허나…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모이면 우연의 공산은 줄어들고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이벽은 그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어렵게 결론을 내었다.
“누명개 장로를 의심해야 하나?”
“…그렇다기보다는요.”
박박, 공손수가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은 줄곧, 우리가 누군가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꽤 오래 전부터.”
“…….”
“흑천방은 겁도 없이 칼을 뽑았고, 의혈맹은 뒤를 물고 늘어지고, 산적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길목에 나타나고…….”
피식, 공손수가 작게 웃었다.
“…물론, 그저 제 생각이 과한 걸 수도 있어요. 본래 의심병이 한 번 도지기 시작하면 지나가는 똥개도 늑대처럼 보이는 법이니까요.”
의심병.
허나 이벽은 그 역시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룡대가 사패련을 나선 이래 지난 몇 개월간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의심하지 않으면 마음은 편하다.
허나 정말로 놓쳐선 안 될 무언가를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슬슬 돌아가지.”
“네. 배고프네요~”
저벅.
두 사람은 골목을 벗어났다.
이내 큰길로 나서자 여전한 인파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거리는 평화로웠지만 함께 녹아들 수는 없었다. 이벽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발목을 붙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남아줘서 다행이군.”
“네?”
이벽은 공손수를 돌아보았다.
“네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너를 붙잡은 건 내게는 분명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
공손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피식, 이내 작은 웃음이 번졌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대화는 멎었다.
두 사람은 다시 의원으로 향했다. 각자의 생각 속에 북적북적한 인파를 헤치며 묵묵히 나아갔다.
끼익.
그리고 의원 내에 마련된 임시 처소로 돌아왔을 때, 파진성과 송영영이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케헤, 늦었잖아? 따로따로 나가더니 왜 같이 들어와? 둘이서 대체 뭘 하고 온 거냐고?”
“…두 사람이야말로 왜 같이 있는데요?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정신 차렸대, 우리 부대주.”
“…….”
* * *
—…남들 눈에 바보 같아 보일수록 생각을 포기하지 않아야 비로소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정도를 이야기했다.
일찍이 천하일절의 권법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쳤던 진주언가는 마교와의 싸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혈족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혹은 폐인이 되었고 세가의 터전은 불에 탔으며 무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직계혈통의 비전무공마저도 실전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마지막 후예였다.
허나 아버지는 그런 선택을 했던 윗대의 선조를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불에 탄 터전에서 그러모은 비급과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어른들의 지도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무공을 익혔고, 그것만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 아버지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진주언가를 다시 세웠고 마을 평범한 처녀였던 어머니와 혼인하여 일가를 꾸렸다.
그렇게, 언가주가 되었다.
허나 그곳은 커다란 대문도, 엄격한 규율도 없는 일개 동네 무관에 가까웠다.
그것은 물론 한때 강호를 호령하던 세가로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영락한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집과 터전, 그리고 목숨.
심지어는 무공을 잃었을지라도.
천하의 마교를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대쪽 같은 정신이 남아있다면 언가는 건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셈에 약했고 매사에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천하의 어느 세력을 가더라도 능히 환영받을 만한 힘을 지니고도 그저 마을의 무관주로 남았고, 힘이 필요한 잡일에는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절정고수가 아닌 마을의 일원으로서 조용히 늙어갔다. 그리고.
언미희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럼 다녀오마. 올 때에는 당과라도 잔뜩 사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네, 아버지. 걱정 안 해요.
삼 년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산적토벌에 나섰다.
마을 인근의 산에 산적들이 들어앉아 오가는 이들의 목숨을 해하고 재물을 강탈했다고 했다.
허나 고작해야 작은 마을의 일에 대신 나서주는 이들은 없었으므로, 이내 아버지가 마을의 장정들과 함께 직접 나선 것이다.
언미희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한, 아버지는 천하제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나이였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일개 산적들에게 당할 리는 없었다. 허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떠난 장정들 역시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그중 일부는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언미희는 가주 대리가 되었다.
아버지를 수소문해볼 여력조차 없이, 얼마 남지 않은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하나뿐인 남동생은 복수심에 차 가르쳐주는 이도 없이 불완전한 가전 무공에 집착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다.
동생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
언미희는 당장에 큰돈을 구해야 했다.
집을 판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도시의 큰 의원에 동생을 의탁했고, 큰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저잣거리를 헤매었다.
평생을 무가의 딸로 자라온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역시 권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때 이미 일류의 무인이었지만, 동시에 채 어린 티도 벗지 못한 소녀에 불과했다.
더러운 목적으로 접근한 악적들이 있었고, 이내 그녀는 악적들을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네가 했니? 어쩜 대단하구나.
—……….
—걱정 마. 죽어도 싼 녀석들인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난 지소약이라고 해.
그때의 인연으로 언미희는 하오문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를 익힌 여인이 가장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일은 기루의 호위 역할임을 알게 되었다.
언미희는 천향루주이자 하오문의 곡정지부장인 지소약의 제자 겸 호위가 되었고, 천향루 내에서 유일하게 기녀가 아닌 ‘아가씨’가 되었다.
그렇게.
언가의 가주를 대리하는 언미희의 권각은 사파무림의 저잣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취객이나 삼류 악적들 따위를 상대로 쓰이게 되었다.
허나 치욕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자신이 무력을 팔았듯, 웃음과 기예, 혹은 그 이상을 파는 기녀들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자신과 그녀들의 차이는 그저 물려받은 재능과 무공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을 뿐이다.
언미희는 세상의 이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이벽을 만났다.
—…처음으로 살인을 했을 때, 저는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습니다. 상대가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는데도요.
—괜찮소, 나는.
—…공자는 강하시군요.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소?
지소약을 호위하며 함께 사패련으로 향했고, 이내 관계는 비룡대주와 비룡대원이 되었다.
함께 강호로 나서게 되었다.
이후의 여정은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으나, 언미희는 이벽에게서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또한.
—저기 언니, 부대주 하실래요?
—야! 한 번만 붙어보자, 케헤헤!
이내 함께 부대끼게 된 사파 출신의 일행들에게도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었다.
정사의 구분에 생각보다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또래의 무인들과 함께 강호를 유람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피를 묻히고 목숨을 위협받는 고된 여정 속에서도 언미희는 문득문득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이벽을 따르게 된 것은 본의가 아니었으나, 결코 그르지는 않은 길이라는 확신이 싹트게 되었다.
지소약의 허락이 있는 한.
동생을 지키는 일과 닿아있는 한.
가능한 한 끝까지 비룡대의 여정에 함께하며, 이벽의 결말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푸욱.
—어, 공자……?
허나.
성가의방에서의 일전에서 이벽은 팽가 무인들의 목을 베었고, 언미희는 그 피를 뒤집어썼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방적으로 습격을 당한 입장이었고, 파진성의 상태는 위급했으며, 일행은 명백히 열세에 있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고자 적의 목숨을 베는 것에 아무런 문제는 없다. 다만.
팽가의 무인들 역시 누구의 가족이었을 테다.
호북에는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는 팽가의 어린 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언미희는 문득 혼란에 빠졌다.
마음에 작은 균열이 일었고, 그 균열은 시간과 함께 곳곳으로 뻗어나가며 피비린내를 자아냈다.
이후.
의방과 소림을 거쳐 이곳 진량현에 이르기까지, 언미희는 자기 자신의 깨어진 마음과 줄곧 씨름을 했다.
피비린내가 짙어질수록 육신을 혹사했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고 나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다시 나타났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후우욱.
아버지는 괴물이 되어있었고, 정도를 추구하기 위해 단련되었던 주먹은 자신에게로 휘둘러졌다.
그 순간.
언미희는 균형을 잃어버렸다.
무너짐과 함께 죽음을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