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27)
130화. 불편한 재회 (1)
“…시중을 들겠습니다.”
월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기녀였다.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곱게 분칠된 얼굴과 향으로부터 이벽은 곧 그 사실을 이해했다.
“…괜찮소.”
잠시 후, 이벽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시중 같은 걸 부탁한 기억은 없으니 이만 나가도 좋소.”
“아… 제가 맘에 안 드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아니오. 술 정도는 내 손으로 직접 따라 마실 수 있소.”
“그, 그렇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월향이 일어섰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허나 문을 향해 멀어지다 말고 이내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이벽을 돌아보았다.
“저…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요?”
“…무슨 말이오?”
“그… 손님께 쫓겨나면… 제가 삯을 받을 수가 없어서…….”
“…….”
월향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리 와 앉아계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소협!”
일순 월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쪼르르 다가온 월향이 다시 이벽의 곁에 앉았다.
“…….”
분칠한 얼굴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이벽과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쪼르륵.
이벽은 잔에 술을 따랐다.
벌컥, 들이키자 차가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허나 심신의 어딘가에서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그것은 뜨거운 불길에 고작해야 물 한 바가지를 붓는 기분이었다.
“…하아.”
냉정함을 찾기 힘들다.
해서 술의 도움을 빌리고 싶었다.
허나 오늘의 술은 썩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앞서 파진성이나 송영영과 나누었던 술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값비싼 술일 테지만, 그 향은 오히려 역하게 느껴졌다.
이벽은 젓가락을 집었다.
음식 몇 가지를 집어 들었다.
“…….”
탁, 젓가락을 도로 내려놓았다.
음식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허나 값비싼 술도, 기름진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일 것이다.
상대해야 하는 적이 강대할수록 스스로의 심신을 차갑게 유지해야 한다.
허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절정을 넘어 상단전을 열고 목천의 영역을 열었음에도, 마음이란 여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려 하는 것 자체가 마치 죄인 양 느껴졌다.
언미희를 적의 수중에 빼앗겨버린 지금의 상황에 대해, 자기 자신을 벌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핫!”
시선이 부딪히자 화들짝 놀라며 월향이 시선을 피했다. 이벽은 그 몸짓의 의미를 이해했다.
“…같이 드시겠소?”
“아, 아뇨!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하면서도 월향은 밥상 위를 흘끗흘끗 곁눈질했다. 어쩐지 배 곯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리 와 드시오. 나는 별로 입맛도 없고 어차피 이 많은 걸 혼자 다 먹을 수도 없으니.”
“그, 그럼 조금만…….”
그제서야 월향이 다가섰다.
작은 동물 마냥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슥, 스윽.
음식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허나 접시가 비워지는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
이벽은 조금 놀랐다. 동시에 퍽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 몸짓과 속도는 분명 언미희를 닮아있었다.
동시에.
약간의 안쓰러움이 스쳤다.
허나 상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식의 마음을 품는 건 이상한 일이다.
“웁, 컥, 콜록……!”
“…천천히 드시오.”
사레가 들린 듯 월향이 황급히 소매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벽은 술을 따라주었다.
하아, 술잔을 들이킨 월향이 숨을 가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소협.”
“아니오.”
“소협께선 정말 따뜻한 분이시네요. 일개 기녀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월향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순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분칠로 가려진 그녀의 맨얼굴에서 천진함이 내비쳤다.
“저도… 소협께 한 잔 올리고 싶어요.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울 건 없지.”
이벽은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들이켠 순간, 놀랐다.
“어떤가요?”
“…나쁘지 않군. 아니, 맛있소.”
분명히 조금 전과 같은 술임에도, 스스로 따라 마신 것과는 전혀 맛이 달랐다.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자작하는 술은 너무 외로우니까요.”
“그렇군.”
이벽은 납득했다.
이곳에는 언미희는 물론 공손수도 파진성도 송영영도 없으므로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더 드릴까요?”
그리고.
두 사람은 술을 주고받았다. 몇 순배의 술이 돌자 방 안이 조금 더워졌다.
“소협께서는… 딸꾹! 강호에 이름 높은 고수이시죠? 에헤헤!”
“…고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래에 내 이름이 여기저기 많이 알려진 것 같긴 하더군.”
“그렇군요… 와, 대단해요!”
“…….”
“헌데 왜 그리 힘들어하시나요?”
흠칫, 이벽의 미간이 흔들렸다.
즉시 월향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왜애… 그렇게 강하면… 마음대로 살 수 있지 않나요~?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예요?”
“…….”
그저 술에 취했을 뿐, 무언가를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아마도 나보다 강하고 머릿수도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부담이 되어서 그런 것 같소.”
이벽은 적당히 답했다. 허나.
“그럼 도망치면 되지 않나요?”
다시 월향이 답했다.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소. 책임져야 하는 사람을 빼앗겼거든.”
꾹, 이벽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월향의 손이 그 주먹을 감쌌다.
“그렇군요. 저도 그래요.”
“무슨 뜻이오?”
“그게… 아버지가 빚을 져서요. 지금 옥에 계신데, 딸꾹, 다 갚을 때까지는 제가 여기서 일을 해야 하거든요~”
“…….”
“아,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이 동네는 무당의 구역이라 기녀한테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나쁜 놈들도 거의 없구요.”
그것은 과연 어떨까.
기녀는 술과 웃음과 기예, 혹은 그 이상을 파는 여인들이다.
이벽이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였으며, 그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또한 함부로 캐물을 수도 없다.
“좌우간…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는 건 별로 좋지 않아요. 안 그래도 힘들잖아요?”
슥, 월향의 손이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살결이 비치자 이벽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월향이 다시 손을 꺼냈을 때, 그곳에는 웬 대나무 막대가 쥐어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죽적(竹笛)이었다.
“부끄럽지만요. 제가 피리를 잘 불거든요~? 딸꾹! 소협께 꼭 들려드리고 싶어요.”
“…딱히 음률에 조예는 없소만.”
“괜찮아요! 편안히 들어주세요.”
술에 취한 월향은 어쩐지 조금 막무가내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다그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월향은 피리를 불었다.
“…….”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공기처럼 잔잔했다.
약한 취기 속에서, 이벽은 놀랍게도 초조함과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나쁘지 않다.
이벽은 눈을 감았다.
* * *
쿠당탕. 쿵쾅!
방문 밖의 복도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벽은 눈을 떴다.
“…….”
어느덧 아침이었다.
모처럼 편안한 잠을 잤다.
그것은 어쩌면 남궁세가의 손에 언미희를 빼앗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벽은 지난 밤을 돌이켜보았다.
기녀인 월향의 피리를 연주하는 실력은 문외한으로서도 퍽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음률이 마음을 다스렸다.
덕분에 이벽은 모처럼 깊은 운기에 빠져들었고, 그녀가 방을 나선 이후에도 이내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감사라도 표하고 싶군.’
덕분에 몸 상태는 퍽 좋았다.
쿵쿵쿵, 드르륵!
그때, 요란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주루의 주인인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소, 소협! 깨어나셨군요! 소, 손님이, 소협을 찾는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하오문에서 사람이 왔소?”
“아니, 아, 아닙니다. 그것이……!”
“…그렇군.”
여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으나, 창백한 표정으로 미루어 이벽은 그 뒷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찾아온 이가 하오문이 아니라면, 아마도 적의를 지닌 누군가일 테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간 적대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은 적지 않으므로, 대놓고 위치를 노출시킨 이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후욱, 이벽은 몸 안에 남은 일말의 주독을 내뿜었다. 검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세를 졌소. 가급적 이 이상 주루에 피해가 안 끼치게끔 적당히 해결하고 오지.”
“아, 아, 예……!”
이벽은 여인을 지나쳤다.
그리고 전각을 나서 대문 밖으로 향함과 동시에 일련의 무리들이 뭉쳐있는 것을 발견했다.
“흥, 애송이. 오랜만이로구나!”
“……!”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는 것은 제법 뜻밖의 얼굴이었다. 이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중천검 남궁천수.
남궁세가의 방계 출신 절정고수로, 호남 땅에 남궁세가의 분가라 할 수 있는 숭무관을 세우고서 금강회로 대표되는 호남의 사파무림과 충돌을 빚었던 인물이다.
‘…그렇군.’
‘남궁세가’의 방계 출신.
그 사실은 지금의 이벽에게 있어 그때와는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오랜만이오, 남궁 관주.”
이벽은 무리를 둘러보았다.
남궁천수를 제외한 나머지 면면들은 전혀 대단할 게 없어 보였다. 남궁세가도 아닌 숭무관의 제자들인 듯 하다.
“이리도 이른 아침부터 이곳 호북 땅까지 직접 왕래하시다니 대체 어쩐 일이시오?”
“이익, 닥쳐라, 이노옴—!!”
버럭, 남궁천수가 일갈했다.
“네놈, 네놈만 아니었어도……!”
“…….”
이벽은 분위기를 살폈다.
이른 아침부터 이만큼의 제자들을 긁어 모아왔다는 건… 숭무관이 계속 호남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터이다.
“…그렇군. 결국 호남 땅에서는 발을 뺀 모양이군. 미안하게 됐소. 허나 본래 사파의 땅이니 너무 노여워는 마시오. 마땅히 ‘지킬 힘’이 있으니 돌려받은 게 아니겠소?”
“이… 이 건방진 노오오옴—! 네까짓 게 감히 날 능멸하려 드느냐!!”
남궁천수가 재차 일갈했다.
허나 몇 번의 숨을 몰아쉰 뒤, 곧 안색을 회복했다.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 그래, 내 인정은 해주마! 그간 제법 화려하게 날뛰었더구나! 사파의 천박한 애송이 주제에 감히 ‘본가’와 척을 지다니 말야!”
“…….”
이번에는 이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용건이나 말하시오.”
“달리 뭐가 있겠나? 검을 버리고 순순히 따라와라. 내 남궁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네놈을 본가로 압송할 것이니!”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당신은 지금 숭무관주가 아닌 남궁세가의 무인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군.”
“흥, 우리 숭무관이 곧 남궁세가의 핏줄일진대 당연한 일이 아니겠—”
“독립 세력 운운하며 호남에 발을 들일 때는 언제고 참 입장 편안해서 좋으시겠소?”
남궁천수의 말문이 막혔다.
“…본가에 닿기 전까지만이라도 몸이 성하고 싶으면 말에 신경 쓰는 게 좋을 것이다. 애송이.”
눈과 눈이 부딪혔다.
일순 남궁천수에게서 묵직한 기운이 일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절정의 고수란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공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싫소.”
“…뭐, 뭐라?”
이벽은 팔짱을 끼었다.
“그야 머지않은 시일 내에 내 발로 직접 찾아갈 생각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오. 하지만 마침 잘 되었군.”
“…….”
남궁천수는 당황했다.
진심으로 기세를 내고 있음에도 애송이 놈이 전혀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골치 아픈 개방의 철면개는 물론, 다른 애송이들도 없이 혼자뿐이라는 얘기를 듣고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헌데.
“먼저 가시오, 관주. 그리고 남궁세가에 내 뜻을 잘 전해주시오. 내 대원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내 약속하건대 남궁세가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니.”
131. 불편한 재회 (2)
“…뭐라?”
남궁천수는 귀를 의심했다.
눈앞의 애송이가 꺼낸 말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 황당함의 범주마저도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대가를 치를 거라고? 그니까 우리 남궁세가가 말인가?”
“그렇소. 무슨 문제가 있소?”
“하, 하핫.”
남궁천수는 웃었다.
과연, 도가 지나친 헛소리를 들으면 화보다도 웃음이 먼저 나오는 법이다.
“하핫! 그니까 설마, 네놈 지금 협박을 하는 것인가? 사파의 애송이가 감히 대 남궁세가를 상대로? 하하, 푸하핫!”
“…….”
“하! 대단하군, 참으로 대단해!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비룡대주? 응? 사파제일 후기지수? 예끼! 설령 사패련주가 직접 찾아온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게 우리 대 남궁세가다! 하하하! 푸하하하! 크하하—”
“관주, 당신이야말로 대체 그 자신감의 근거는 뭐요?”
훅, 이벽의 기세가 발출되었다.
주변을 감싼 남궁천수의 기세를 밀어내었다. 뚝, 남궁천수의 웃음이 멈추었다.
“당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남궁세가의 무인들마저도 나를 껄끄러워하여 내 일행을 납치해 달아났소. 헌데 당신 ‘따위’가 날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오?”
“…뭐라?”
“그래, 내가 애송이는 맞지.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얼간이 같군. 왜 이리 소식이 늦소? 아니면 관주께서는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재주가 있는 것이오?”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호남의 정사비무에서 남궁환을 쓰러뜨렸을 때, 남궁천수는 대뜸 비무대에 올라 더러운 사술 운운하며 호통을 쳤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도’라고 스스로 믿어버린다.
“아니면… 남궁 관주께선 아직도 내 검이 삿되다고 생각하시오? 더러운 사술을 통해 실력도 없으면서 남궁환을 쓰러뜨렸다고?”
“네, 네 이—!”
흠칫, 재차 호통을 치려던 남궁천수는 그러나 말문이 막혔다. 애송이의 기운이 만만치 않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뭐냐 이 기운은?’
기운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피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서서히, 가슴 한켠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자라났다.
“남궁 관주.”
이벽이 다시 말했다.
“진짜 삿된 검이 뭔지 보고 싶소?”
“…….”
철컥.
남궁천수는 마침내 검을 잡았다.
“…고맙구나, 애송이.”
“뭐가 말이오?”
“일전부터 네놈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만, 차마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었지. 헌데 네놈이 오늘 이렇게까지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니, 이제는 어린애에게 과하게 손을 썼다며 천하가 나를 비웃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
이벽은 답하지 않았다.
정사를 막론하고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여러 중견고수들이 이미 비슷한 태도를 고수하다 이벽의 검 앞에 쓰러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저벅저벅.
숭무관의 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벽과 남궁천수를 동그랗게 둘러싼다.
“제자들과 함께 싸울 생각이오?”
“푸하! 네놈은 정녕 이 중천검이 그렇게까지 우스워 보이더냐? 걱정 말거라. 네 녀석이 꽁무니를 빼지 않는 이상 내 제자들은 검을 검집에서 뽑지도 않을 것이니.”
“그거 고맙군.”
“하핫, 끝까지 웃겨주는구나! 내 큰 웃음을 준 대가로 선공을 양보할 테니 마음껏 들어와 보거라!”
이벽은 검을 잡았다.
이미 조금 전부터 마음속에서는 적파심공이 흐르고 있었다. 억눌린 분노는 약간의 자극만으로 살기를 일으킨다. 허나.
“…….”
이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만월무변심공의 구결로써 기운의 경로를 휘었다. 혈기는 잠시 저항했으나, 이내 청강유엽공이 되었다.
채앵!
마침내 이벽이 쇄도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그리고 두 자루의 검이 본격적으로 얽혀들기 시작했다.
“오냐, 할 수 있는 걸 마음껏 해 보거라! 그래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후회가 없지 않겠느냐?!”
“…….”
이벽은 청강검식을 펼쳤다.
새삼 선우세가의 검을 쓰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제 실력을 숨긴 채 쉬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훅, 챙, 채앵!
“좋아 좋아, 과연 재미있구나! 그렇다면 이번엔 내 검을 받아 보거라, 애송아!”
차라락!
다음 순간, 남궁천수의 검이 전방을 넓게 휩쓸었다. 그리고 이내 범위를 좁히며 조여들기 시작했다.
‘대연검법인가.’
그것은 남궁세가의 뿌리에 해당하는 검법으로, 이미 남궁환과의 비무에서도 겪어본 바 있었다.
바깥쪽에서부터 몰아치기 시작하여 이내 안쪽으로, 조여드는 그물처럼 상대의 공간을 조금씩 깎아 먹는다.
그렇게, 종전에는 상대로 하여금 검을 휘두를 공간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핫! 어떠냐, 남궁의 검이?! 좀 전까지 잘도 지껄이던 주둥이가 퍽 조용해졌구나!”
“…….”
챙, 채앵.
이벽은 침착하게 맞상대했다.
확실히 빈틈투성이여서 단번에 제압이 가능했던 남궁환과는 그 압박감의 수준이 다르다.
이벽은 수세에 몰렸으나, 무리해서 판을 뒤집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남궁세가와 맞서야 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이것은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남궁가의 검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챙, 채앵!
“그래! 잘 버티는구나! 좋다!”
남궁천수가 호기롭게 외쳤다.
기실, 검이 오가는 사이, 남궁천수의 감정은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놈이 보기 드문 기재라는 것쯤은 이미 호남에서의 비무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사이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는지 기세는 만만치 않았으나, 막상 부딪히고 나자 일말의 불안은 사그라들었다.
‘그래봤자 후기지수일 뿐이다!’
놈의 검은 퍽 변화무쌍했으나, 결국은 보기 좋게 대연검법의 묘리에 말려들었다.
남은 것은 철저히 짓밟아놓을—
채앵!
‘응?’
헌데.
어느 순간, 기분 나쁜 끈적함이 검끝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궁천수는 공간을 조여드는 대연검법의 기세가 멈추었음을 깨달았다.
챙, 채앵, 챙!
놈의 검이, 검로를 펼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을 사수한 채 버티고 있다.
좀처럼 빼앗아지지 않는다.
‘어떻게?’
남궁천수는 이벽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의 검끝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읽히고 있다!’
오싹,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채앵!
남궁천수가 황급히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벽을 밀쳐내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애써 제압한 거리를 거저 돌려주다니, 인심이 후하시군, 그래.”
“하! 우쭐대지 마라, 애송아—!!”
섬찟함을 숨기며 남궁천수가 일갈했다. 타앗, 그리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후욱.
동시에 남궁천수의 검신이 희미하게 빛났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마침내 강기를 꺼내 든 것이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사술을 부리는구나! 더는 내 검에 자비를 바라지 말거라!”
쐐애액.
창궁무애검법이 빗발쳤다.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의 매와 같은 검로가 이벽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벽에게는 이미 남궁환으로부터 겪어본바 있는 검식이었다. 강기가 섞여들었다 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아니, 오히려.
강기가 끼어든 시점에서 흥미는 반감되었다. 훅, 다음 순간 이벽의 검 역시 빛을 내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삼식(回劍第三式).
유검(柔劍).
“허, 허억!”
다음 순간 이벽의 검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강기와 강기가 소리 없이 상쇄되는 것을 목도한 남궁천수가 숨을 삼켰다.
쐐액.
허나 이벽의 검은 끝나지 않았다.
남궁천수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이벽의 검끝이 직의 묘리로 재차 파고들었다.
“…이익!”
채앵, 콰아앙!
남궁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재차 강기를 일으킨 채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이벽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허나.
“커억!”
충돌의 여파는 어쩔 수 없었다.
한껏 튕겨 나간 남궁천수의 몸이 저만치에 착지했다. 비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는다.
“컥, 허억, 큭……!”
“…….”
어떻게든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흐트러진 호흡만으로도 이미 충돌의 우열은 명백하게 나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남궁천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리한 운용으로 내상을 입었다. 허나 그것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가, 강기를… 네놈…….”
“그럼 못 쓸 줄 알았소? 천하에서 당신 혼자만 절정고수요? 하기사 그러니 줄곧 그렇게 의기양양하고 계셨군.”
“…그, 그럴 리—”
“그럴 리가 있소. 당가의 당청도, 모용세가의 모용삭도 쓰러뜨렸지. 이제 와 당신에게 발목을 잡힐 이유는 없소. 말했잖소? 당신은 소식이 너무 늦다고.”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궁천수는 검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부르르, 잘게 경련하고 있다.
제아무리 천고의 기재라고 해도 상식이란 게 있다. 약관조차 되지 못한 절정고수 따윈 들어본 적이 없다. 허나.
‘…사술이 아니었다.’
검끝에 닿은 감각은 명백했다.
그 어떤 눈속임도 아니었으며 그 강기의 빛과 형태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저벅.
남궁천수가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침내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다. 이제라도 발을 빼야 한다.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속삭였다.
“혹 도망칠 생각이시오?”
허나 그때, 이벽이 말했다.
“그렇다면야 붙잡지는 않겠소. 어차피 더 보여줄 것도 없을 테니. 방계 핏줄에게 허락된 검이란 그 정도일 테지.”
* * *
“…네놈, 지금 뭐라고 했나?”
남궁천수가 말했다.
“순순히 보내드리겠노라 했소.”
“…….”
“아니면 달리 보여줄 검이 남았소? 당신이 남궁환처럼 제왕검형이나 혹은 다른 비전무공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제아무리 세가의 핏줄이고 우수한 재능을 지녔다 한들, 방계혈통에게 최상위 비전무공은 허락되지 않는다.
일찍이 선우세가의 서자 출신이었던 이벽은 무가에서 방계가 받는 취급을 잘 알고 있었다.
선우벽 역시 소가주로서 가주 선우각의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오직 청강검식만을 허락받았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말해봐라.”
남궁천수에게서 다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뭘 말이오?”
“한 번 더 같은 말로 나를 모욕해보란 말이다. 내 그 즉시 이 자리에서 네 녀석의 몸을 두 쪽으로 쪼개버릴 것이니.”
“…….”
‘모욕’이라.
“…뭐,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만. 그 이전에 어느 부분이 모욕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
이벽은 어깨를 으쓱했다.
“허나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당신이 세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세가가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으니 말이오.”
“크—”
탁, 남궁천수는 왼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과연, 지나친 헛소리를 들으면 역시 웃음이 먼저 나온다.
“크하, 크하하, 크하하하핫!”
“…….”
“이런 개,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버러지 새끼가—!! 내 오늘 네놈의 혓바닥을 뽑아 잘근잘근 썰어주마!!”
타앗!
돌연 남궁천수가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크앗, 크아아아아!!”
그리고 강기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검로고 초식이고,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다.
허나 강기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위협적이다. 이벽 역시 강기를 꺼내어 맞부딪혔다.
“헉, 허억! 내가, 이 중천검이, 네까짓 놈에게! 물러설 것 같으냐?! 벌레 같은 놈! 천한 쓰레기가!”
“…….”
허나.
강기의 부딪힘이 거듭될수록 거칠어지는 것은 오직 남궁천수의 호흡뿐이었다.
쾅, 콰앙, 콰아아앙!!
“…뭐, 다들 비슷하더군.”
이벽이 말했다.
“네, 네놈, 허억, 이이……!”
“우선은 나 따위 애송이가 절정일 리 없다며 부인을 하고, 그 다음에는 내력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이길 거라고 말야.”
콰아앙!
“커억!”
발검식 강의 묘리가 강기와 함게 펼쳐진 순간, 쿨럭, 남궁천수가 피를 토했다.
“헌데 유감이지만, 내력 싸움도 퍽 자신이 있어서 말이오. 어떤 의미로는 제일 자신이 있지.”
콰아앙!
그리고 회수되는 이벽의 검이 휘어졌다. 회검식 곡의 묘리로 스치자 남궁천수의 손이 찢어졌다.
피를 흩뿌렸다. 그리고.
휭휭, 타앙!
손을 빠져나간 남궁천수의 검이 허공을 날아 저만치에 떨어졌다. 땅 위를 구르다 이내 멈추었다.
“…….”
털썩, 남궁천수가 주저앉았다.
“…뭐, 너무 상심은 마시오. 당신네 직계혈통도 그렇지만, 떨어뜨린 검이야 다시 주우면 그만이니.”
이벽은 남궁천수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에서는 더 이상의 전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철컥,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또한 보내드리겠다는 말도 아직 유효하오. 인질을 붙잡힌 입장이니 내가 달리 어쩌겠소?”
툭툭, 이벽은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쪼록 잘 부탁하오, 관주. 안휘까지 살펴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내가 살려주었음을 항상 감사하시오.”
그리고 이벽은 돌아섰다.
그대로 포위된 공간을 가로질러 다시 주루의 대문을 향하던 찰나였다.
“크… 으아아악—!!”
등 뒤에서 남궁천수가 괴성을 내질렀다.
“아… 아직, 아직이다, 애송이!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숭무관의 제자들이여, 간악한 사도 놈을 붙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