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71)
176화. 피할 수 없는 결론
“…난처하군.”
당평세가 말했다.
그의 손이 수염을 쓸었다.
“자네를 사지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맹주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살려서 데려온 게 아닌데 말일세.”
“…….”
“십중팔구 죽을 게 뻔한 것을 왜 굳이 되돌아가려 하는가? 아님 뭐, 비룡대주께는 사패련을 되찾을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으신가?”
“…당장에 떠오르는 건 없소.”
이벽은 답했다.
“다만 책임이 있을 뿐이오.”
“…허어.”
“강호에 나와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었고 과분한 기대를 모았소. 어찌되었건 스스로 나선 일에는 책임을 질 방법을 찾아보기라도 해야하지 않겠소?”
관계의 책임은 필연이다.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설령 그렇게 화정촌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마음은 갈피를 잃어 결코 예전같은 삶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문득 이벽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 말은 하지 않을 수 없군. 비록 내게는 힘이 없지만… 권왕이 걸개를 해쳤다면 나는 그 또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소.”
“…….”
당평세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물결을 따라 배는 이따금씩 흔들렸다. 허어, 독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는 우선 서로의 입장에 대해 생각을 좀 하게나.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
독왕의 표정은 퍽 복잡했다.
허나 따지고 보면, 의혈맹의 일원이나 당가의 입장에서는 그리 복잡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사파의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적의를 드러낸다면, 일거에 목을 쳐서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허나 독왕은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벽을 살리기 위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노라 했다.
때문에 이벽은 궁금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묻겠소. 당 노야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살려주셨소?”
“…뭐, 간단한 이야기일세. 내게는 소협의 조부되는 분께 목숨빚이 있거든.”
“……!”
“그분께서 마교의 우호법을 베는 것을 내 직접 눈으로 봤다고 말하지 않았나?”
검치 선우명.
선우세가의 시조.
이벽은 권왕, 그리고 취풍신개와 함께 정자에 둘러앉아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즉, 바꿔 말하자면 그분이 우호법을 베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마교에 의해 목이 달아난 것은 나를 포함한 당시 우리 무림맹의 대원들이 되었을 테지.”
당평세의 눈이 아련해졌다.
“때문에 선우세가에는 줄곧 마음의 빚이 있었네. 그렇다 한들 자네의 부친이 당가의 도움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그 뜻을 존중하여 굳이 관여하지는 않았네만.”
“…….”
“자네와 자네 아비가 봉변을 당하고… 선우세가가 ‘지금의 꼴’에 이른 것은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고 있네.”
선대의 인연.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즉, 이벽을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한 것도, 다시 살아남게 한 것도 결국은 선우명의 그림자였다.
“꼭 지금이여야만 하겠나?”
그때 당평세가 다시 말했다.
“정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이 아니라 추후 실력을 키워 다시 강호로 나오는 게 낫지 않겠나?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네.”
“…그때는 늦소.”
이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는 단순히 흑천방이나 녹림이 아니오. 그 배후에 숨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혈교요.”
“……!”
“이미 개방도들이 놈들을 쫓아 천하각지를 들쑤신 것을 보고서도 당신들은 끝끝내 모른 척하겠지. 허나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이벽은 잠시 할 말을 고민했다.
허나 이내 노강호를 상대로 자신이 굳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음을 깨달았다.
“피가 흐를 거요.”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벽은 말을 맺었다.
“…….”
마침내 당평세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공기가 어깨를 내리눌렀고, 숨쉬기는 거북해졌다.
이벽은 잠자코 기다렸다.
뱃머리를 돌렸으되, 멋대로 나아갈 수는 없다.
자신의 뜻이 어떻건 간에, 결국 자신은 아직 당가에 억류된 입장이며, 독왕의 ‘방생’이 없이는 어디로든 갈 수 없다.
일각여의 시간이 흘렀다.
“역시 소협께선 협객이시군요~”
문득 당려옥이 침묵을 깼다.
“원, 그렇게 남 걱정으로 똘똘 뭉쳐가지고는 무슨 사파인이라는 건지. 그러고도 소협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
그리고 당려옥이 이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까워라.”
“…뭐가 말이오?”
“그냥 이쪽 얘기예요~ 선우협이 당신 절반만큼의 재능이나 실력이 있었더라면 잠시 고민이라도 해봤을 텐데.”
“……!”
흠칫, 이벽이 흔들렸다.
그리고 눈에 띄게 동요하는 이벽을 다시 일견한 당려옥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보였다.
“선우세가에서 은근슬쩍 혼담을 넣길래 단칼에 잘라버렸죠. 할아버지 말씀 때문에 좀 친절하게 대해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진짜.”
“…….”
“헌데 비룡대주께서 설마 선우씨의 핏줄이었을 줄은 제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쩝, 당려옥이 입맛을 다셨다.
“아깝다. 소협이 선우세가의 소가주로 계속 남아있었으면… 우린 어쩌면 서로 독 먹이고 걷어차는 관계가 아니라 ‘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는데.”
“…….”
이벽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쿡쿡, 당려옥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에요~ 저는 소협같이 여자관계 복잡한데다 빨리 죽을 것 같은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해요. 어딜 감히 꽃 같은 날 두고?”
그리고 당려옥은 나무통을 안아 들었다. 안에는 이벽이 건져 올린 잉어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뭐, 선우벽이나 잘 키워야—”
첨벙.
그때, 문득 ‘선우벽’이 나무통 위로 풀쩍 튀어 올랐다. 그대로 배의 난간을 벗어나려 했다.
“으악! 내 선우벽! 안 돼!”
탕.
이벽은 가볍게 튀어 올랐다.
당려옥에게로 다가서며, 팔을 뻗어 탈출을 시도하는 잉어를 다시 붙들려 했다. 허나.
뻐억.
“……?”
그 순간.
당려옥의 발이 이벽을 걷어찼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으며, 하물며 기가 실려있지도 않았기에 미처 피하지 못했다.
첨벙.
배 밖으로 밀려난 이벽이 물에 빠졌다.
부그르르.
“…….”
강물에 빠진 이벽은 저만치에서 ‘선우벽’이 꼬리를 치며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촤앗.
그리고 이벽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당려옥이 난간에 주저앉아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짓이오?”
“나 걷어찬 거 이제 쌤쌤이.”
당려옥이 킥킥 웃었다.
“…덕분에 잉어를 놓쳤잖소.”
“됐어요~ 자기가 자유를 찾겠다는데 억지로 가둬서 키워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봤자 얼마 안 가 말라죽겠지. 우리 선우벽은 알아서 잘 클 거예요.”
“…….”
당려옥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련없이 선우벽을 방생한 뒤 고개를 돌려 당평세를 향했다.
“할아버지, 아직은 이쪽 목숨빚이 더 많지 않아요?”
“…얘야, 그게 무슨 말이더냐?”
“에이, 모른 척하지 말아요. 오십 년 전 할아버지와 내 것까지, 목숨 빚이 두 개잖아요? 심지어 오라비들과 당청 숙부님까지 생각하면 더 많구요.”
“…험!”
당평세가 헛기침을 했다. 슥, 당려옥이 손끝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벽의 머리를 가리켰다.
“기왕에 살려놓은 거, 선심 조금만 더 쓰세요. 무언가 다른 방법은 없나요? 할아버지라면 뭔가 있잖아요?”
* * *
삐걱.
배는 운남 땅에 정박했다.
이벽과 당평세는 배에서 내렸다.
“그럼 힘내요 소협~ 뭐, 가급적 죽지는 말구요. 그리고 암영각의 그 빌어먹을 계집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때의 빚은 언젠가 꼭 갚겠다고요.”
“…신세를 졌소.”
“어머, 별 말씀을요. 후훗!”
당려옥은 스스로 노를 저으며 다시 물안개 너머 사천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타닷, 탓.
두 사람은 운남을 가로질렀다.
당평세의 경공은 쏘아지는 화살처럼 표홀했으나 취풍신개마냥 함께 달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평세는 ‘따라오라’고 했다.
그 의도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허나 어찌되었건 이벽은 청강유엽신법에 쾌의 묘리를 담아 발을 뻗으며 열심히 옆을 따라붙었다.
‘…편해졌군.’
문득 이벽은 직감했다.
당가에서의 회복을 마친 뒤 무공을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허나 경신법, 그리고 내력의 운용은 한 층 더 안정되어 있었다.
문득 취풍신개에게서 들었던 심, 기, 체의 설명을 떠올렸다.
‘쾌보’를 얻음으로써 이벽은 새로운 기교를 체득했고,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남으로써 체는 다시 한계를 경험했다.
앞서나간 ‘마음’을 따라잡는다.
허나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기에 여전히 충분한 힘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시당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해결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조차 이벽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내 조금 전에도 얘기했네만, 신 사패련주 맹철극은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에게 추포령을 내렸네. 허나… 가능한 한 생포하기를 원하더군.”
그때 문득 당평세가 말문을 텄다.
바람같은 속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는 도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편안한 목소리였다.
“어때? 자네는 맹철극이란 자가 자네를 굳이 산 채로 잡아오려 하는 이유를 알겠나?”
“…….”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내 당평세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맹철극은 혁군악을 베었다.
정문 앞에 그 잘린 목을 걸어놓았으며, 마침내 사패련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있었다.
즉, 혁군악이 맹철극에 패배하여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혁군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장악의 과정이 정정당당한 도전과 생사결에 의한 것이 아닌, 야습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걸어놓은 것이 ‘진짜’ 혁군악의 목인지조차 증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즉, 그치들은 그저 사패련이란 ‘장소’를 꿰찼을 뿐, 아직 사파 무림 전체의 ‘민심’을 장악한 것은 아니란 뜻이네.”
“……!”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세는 이미 넘어갔다고 볼 수 있네만… 좌우간 그들이 진정으로 사파무림을 장악하기까지는 아직 두 가지 정도 문제가 남아있다고 보네.”
당평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사파란 무림세력의 본질은 결국 강자존이 아닌가? 허나… 맹철극이란 자는 그럴 만한 힘을 사파인들에게 보여주지 못했지.”
말마따나.
맹철극은 혁군악을 꺾는 모습은 물론, 일찍이 패왕가가 지니고 있던 ‘모두를 압도하는’ 힘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그 역시 시간문제일 뿐, 결국은 모두가 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네만… 정파무림으로부터 사파의 영역을 위협받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구심점’이 필요한 법이거든.”
“…….”
“혁군악이 살아있기라도 하면 모르되, 이미 죽어버린 바에야 무슨 수가 있겠는가? 흑천방 역시 그러한 계산이 섰기에 행동에 나섰겠지.”
“…그렇구려.”
“허나… 그럼에도 문제는 아직 남아있네. 즉, 혁군악을 죽이고 패왕가를 불태웠다고 한들, 패왕가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네.”
“어째서 그렇소?”
허헛, 가벼운 웃음이 섞여들었다.
“왜겠나? 바로 자네 때문이지.”
“……!”
비룡대주, 낙검신룡 이벽.
약관조차 되지 못한 나이로 절정의 경지에 이른 명실상부 천하제일의 후기지수.
지난 반년간 혁군악의 존재를 등에 업은 채 각지에서 활약을 펼쳐온 그의 행보는 흔들리던 패왕가의 입지를 다시 다져놓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천하의 남궁세가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이내 남궁세가를 봉문시켰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며, 더 이상은 후기지수라 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설령 혁군악이 죽었다고 해도… 자네가 천하 어딘가에 살아있는 한 사파무림은 패왕가를 기억할 것이며, 동시에 흑천방의 입장에서는 가장 찜찜한 ‘불씨’인 셈이지.”
“…….”
“그러니… 행여 세력을 부풀리기 전에 어떻게든 자네를 끌어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네. 그리고 첫 번째 문제를 생각한다면, 아마 맹철극이란 자가 손수 자네를 상대할 생각이겠지.”
“…그렇구려.”
꿩 대신 닭.
패왕가의 불씨를 완전히 꺼트림과 동시에, 혁군악을 대신하여 스스로의 힘을 과시할 재물로 삼는다.
“신 사패련의 개파식을 뜨겁게 달굴 볼거리로서 어디 자네만큼 안성맞춤인 ‘제물’이 또 있겠나? 껄껄껄!”
“…….”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처한 입장 역시 비로소 서서히 와닿기 시작했다.
“자, 그럼 묻겠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네는 이제부터 스스로가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가?”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을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해결을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사패련이 지녔던 질서를 다시 되찾는 것이다.
허나.
패왕 혁군악을 중심으로 지켜지던 질서는 혁군악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벽의 생각은 미궁에 빠졌다.
“허헛, 천천히 생각하시게. 허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니 말일세.”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이벽은 계속해서 당평세의 뒤를 따르는 한편,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
한 시진 정도가 흘렀다.
그리고… 이벽은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