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72)
177화. 시작되었던 장소
이벽은 생각했다.
스스로가 패왕가의 ‘마지막 불씨’에 해당한다면… 어쩌면 그 불을 크게 피워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상대가 흑천방과 녹림, 혹은 혈교라면… 그를 밀어내기 위해선 최소한 나머지 사대세력에 해당하는 힘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벽은 문득 암영각주 천막심이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무슨 짓을 하든, 재주껏 죽지 말고 이 무림에서 알아서 살아남아 보게. 자네가 살아있는 한, 적어도 암영각의 칼이 패왕가를 겨누는 일은 없을 걸세.
아니, 그러나.
이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같은 약속의 배후에는 역시 패왕 혁군악의 거대한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린 지금에 이르러 그 약속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상황이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면… 하오문조차 자신을 팽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즉, 지금의 자신은.
그저 상징성을 지녔을 뿐,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완벽한 혈혈단신’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이벽은 비룡대원들을 비롯한 몇몇의 얼굴들을 생각했다. 소중한 이들을 데리고서 사지로 함께 걸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
다시 생각이 이어졌다.
이벽은 상상을 통해 많은 경우들을 계산해보았고, 스스로를 움직여보았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다.
당평세의 말마따나.
사태는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무척 단순하며, 고로 해내야 하는 일 역시 명백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건.
자신이 가진 패는 자신뿐이다.
따라서 사패련을 장악한 적을 몰아내는 것과 ‘민심’을 되찾는 것은 결국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맹철극을 베어야만 하겠군.”
마침내 이벽이 침묵을 깼다.
당평세가 이벽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렇네. 원한다면야 이쪽에서 직접 찾아가 주면 그만이지. 자네가 이미 남궁세가에서 했던 것처럼 말일세.”
“…….”
강자존. 따라서.
자신의 힘을 증명한다.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다면, 스스로 혁군악을 대신하여 맹철극을 베고, 사파무림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반대로 이용해준다.
꺼져가는 패왕가의 불씨를 피울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오직 그뿐이었다.
“…핫.”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홀몸으로 이미 적의 소굴이 되어버린 사패련에 향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물며 혁군악을 쓰러뜨린 맹철극을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평세도 마주 웃었다.
“물론 어려운 일이네.”
“…‘어려운 일’이라.”
그것을 그저 단순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나는 맹철극이란 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네. 다만… 그자가 정말로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패왕을 베었다면 무슨 짓을 한들 어차피 자네에게 승산 따윈 없어.”
“…….”
“허나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또한 내 생각이네. 애초에 그 정도의 무인이라면 자네 같은 자잘한 불씨에 그렇게까지 집착할 이유는 없거든.”
독왕이 수염을 쓸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맹철극이 이룬 경지는 패왕에는 미치지 못하되, 아마도 자네와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으리라는 게 내 판단일세.”
“…….”
이벽은 말의 의미를 헤아렸다.
절정을 넘어선 이른바 ‘초절정’의 영역에도 다시 벽이 나뉘는 것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천하십대고수와 그 외.
‘하늘로 나아가기 시작한 자’와 그저 ‘하늘을 목도했을 뿐인 자’의 차이.
그리고 자신은 후자에 속한 채 그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전부 이 늙은이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일세. 틀려봤자 고작 자네 한 명 죽기밖에 더 하겠나? 허허헛!”
“…….”
“뭐, 어쨌건 자네는 고집을 꺾지 않겠지.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자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승리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 정도일세.”
“…그게 무슨 말이오?”
허헛, 당평세가 수염을 쓸었다.
“어디, 주변을 좀 둘러보시게. 슬슬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나?”
이벽은 당평세의 말마따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물줄기나 산세 따위의 지형들이 퍽 익숙하게 느껴짐을 깨달았다.
“……!”
기분 탓이 아니다. 또한.
이곳은… 운남 땅이다.
탓.
그 순간, 이벽의 경신공이 멈추었다. 그러자 한발 앞에서 멈춰선 당평세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우리는 어딜 향하고 있소?”
허헛, 당평세가 수염을 쓸었다.
“잠자코 잘 따라오더니만 그걸 왜 이제 와서 묻나? 왜? 뭐가 갑자기 두려워지기라도 했나?”
“…….”
“걱정 말게. 그저 자네의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이니까. 하물며 지금의 선우세가 따윈, 식속들 전체가 덤빈다고 해도 자네에겐 위협거리 조차 아니지 않나?”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서서히 미간이 찌푸려졌다.
말마따나 ‘선우세가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지금의 이벽 안에서는 그저 빛을 바랜 과거에 불과했다.
허나 바꿔서 말하자면.
다시는 이어지고 싶지 않았다.
선우협을 베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선택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으며.
따라서 이벽은 그러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영원히 미뤄두고자 했다.
“대체 그 물건이란 게 뭐요?”
“미안하네만 그건 말해줄 수 없네. 자네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종류의 물건이라서 말일세.”
허헛, 당평세가 다시 웃었다.
“…일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던 것 같소만, 선우세가는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하물며 놓고 온 물건 따윈 아무것도—”
“그래? 그렇다면 지금 자네의 태도는 더욱 앞뒤가 안 맞는군. 상관이 없다면 더욱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
당평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보게, 부디 어리숙해지지 말게. 단호해져야 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자네가 감히 수단을 가리고 있을 처지라고 생각하나?”
탓.
그리고 당평세는 다시 길을 나섰다. 말마따나 노인의 뒷모습은 퍽 단호했다.
이벽은 잠시 멈칫했으나 결국은 뒤를 따랐다.
선우세가에 대체 무엇이 있어 지금부터 자신이 걸어야 할 행보와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당평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말마따나 수단을 가리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다.
“…….”
‘단호해져야’ 한다.
다시 익숙한 풍경들이 이어졌다.
허나 급작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음이 하릴없이 엉켜 들던 찰나였다.
어느 순간, 앞장서던 당평세의 몸이 훅 방향을 틀었다.
“…뭐요?”
“응? 뭐가 말인가?”
“그쪽은 세가가 아니오.”
“나도 아네.”
“……?”
“내가 자네의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간다고 했지, 언제 선우세가로 간다고 한마디라도 했는가? 허허헛!”
당평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말이네. 자네 집안에서 골육상쟁이 일어나는 걸 부추기고 싶은 마음도 없고.”
“…….”
“허헛! 허허헛!”
* * *
타앗.
당평세의 발걸음은 이내 선우세가가 아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
이벽은 할 말을 잃었다.
안도감과 황당함이 동시에 스쳤다. 허나 잠자코 뒤를 따르는 한편 당평세의 뜻을 헤아려보고자 생각에 잠겼다.
마냥 실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선우세가야 어찌 되었건… 지금의 자신은 ‘단호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망설임은 검의 흔들림을 낳는다.
퍽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으나, 돌이켜보면 결국은 어리석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
‘적을 죽일 각오.’
이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허나… ‘잃어버린 물건’이란 게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무렵, 어느 산기슭의 초입에서 당평세의 걸음이 멈춰 섰다.
“이제부터 가야 할 곳은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부디 앞장서시게나.”
“……!”
곤명, 서산.
선우세가와 그리 멀지 않은 산으로, 그 역시 이벽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소였다.
잊어버리려 한들 잊어버릴 수 있을 리 없다.
“…알겠소.”
그제야 목적지를 이해했다.
이벽은 당평세를 지나쳐서 앞장을 섰다. 산길을 벗어나 수풀을 헤치며 빠르게 산을 올랐다.
그리고 이내 저만치의 나무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이 스며드는 것을 발견했다.
부스럭.
나무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두 사람 앞에 흡사 칼날처럼 좁고 길게 뻗어진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여기인가?”
“…그렇소.”
“허헛, 저무는 해가 장관이로군. 제법 운치가 있는 곳이야.”
이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절벽은… 일찍이 선우세가의 소가주였던 선우벽이 최후를 맞이했던 장소였다.
선우벽은 함께 사냥을 나섰던 선우협에게 기습을 당해 중상을 입었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허나 결국은 이와 같은 막다른 절벽에 다다르고 말았고, 식솔들의 화살을 맞은 채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래, 자신이 죽임당한 장소에 다시 돌아와 본 기분은 어떤가?”
“…….”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악몽 속의 그 날을 떠올렸다.
혈육의 배신. 가벼워진 목숨. 날아드는 화살. 처절한 감각들이 공기 속에 남아있는 듯했다. 허나.
“…별다를 건 없소.”
이벽은 퍽 멀리 돌아왔고,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으되 그저 잔향과 같은 씁쓸함만이 감돌았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저 아래를 들여다보게. 자네가 잃어버린 물건이 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지도 모르지 않나?”
당평세가 손끝으로 절벽을 가리켰다. 이벽은 잠자코 절벽의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휘오오.
날카로운 바람이 솟구쳤다.
이벽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와락,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잃어버린 물건은커녕, 까마득한 아래로는 안개에 휩싸여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
허나 곧 이상한 기분이 스쳤다.
추락은… 선우벽의 끝이자 이벽의 시작이었다.
이 절벽을 뛰어내리지 않았더라면 낙검문의 스승과 사형제들, 그리고 비룡대를 비롯한 소중한 인연들을 얻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화정촌의 얼어붙은 계곡 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뒤 이벽은 낙검진천신공의 힘을 터득했으며.
숭산, 혜공선사의 암자가 자리한 절벽에서 취풍신개의 훈수를 받아 목천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얻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기에 앞서, 이벽은 대개 추락을 경험해야만 했다.
“어때? 뭔가가 좀 보이나?”
“…잘 모르겠소, 노야. 대체 이런 짓에 무슨 의미가—”
훅, 채앵!
그때였다.
등 뒤에서 암기가 날아들자 이벽의 검이 반사적으로 쳐내었다. 허나 충격을 미처 이겨내지 못했다.
치이익.
이벽의 몸이 밀려났다. 그리고.
후우욱.
순식간에 디딜 곳이 없어졌다.
이벽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
찌지직.
허나 당황할 이유는 없다.
그 순간, 이벽은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느려진 시간 속에서 오른발의 용천혈을 비웠다.
타앙.
절벽의 표면에 흡착시켰다.
쾌보를 통해 몸을 밀쳐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
다시 절벽 위로 올라선 이벽은 당평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나 곧 말문이 도로 막히고 말았다.
당평세는 저만치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평온한 얼굴로 이벽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우웅웅.
그 등 뒤에는 어느새 무수한 암기들이 벽을 이룬 채 날카로운 끝을 이벽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지금부터 나는 자네를 그 절벽으로 떠밀어서 ‘다시 한번’ 죽일 생각이라네. 뭐, 독은 안 쓸 생각이네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지.”
“…이유가 뭐요?”
“그야 물론, 자네로 하여금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게 하기 위함이지. 그렇게만 된다면야… 최소한 ‘동급’의 무인에게 패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
허헛, 당평세가 웃었다.
“다만 목숨을 걸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지. 어디, 독왕이 먹여주는 떡이 마냥 달기만 할 거라 생각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