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29)
235화. 선우세가
사 년 전.
선우세가의 외당주 선우굉, 소가주 선우협, 그리고 두 명의 장로를 포함한 세가의 무인들이 이벽을 쫓아 기어코 회택까지 찾아왔었던 일이 있었다.
허나 일련의 충돌 끝에.
이벽은 그들을 살려 보내주었다.
해묵은 은원을 순순히 털어내었고, 더는 ‘어떤 관계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들과 부딪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허나.
저벅.
이벽이 문으로 다가섰다.
“정지! 귀하는 누구시오?”
“본가에 용무가 있다면 신분과 목적을 밝히시오.”
당연하게도, 문을 지키고 선 두 명의 무인들이 이벽을 가로막았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하오문에서 나왔소.”
“…뭐, 뭐요?”
슥.
이벽은 품에 손을 넣었다.
수호령주를 꺼내려 했다. 허나.
“머, 멈춰라, 이놈―!”
무인들의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철컥, 철컥, 검 손잡이를 쥐었다.
“무슨 꿍꿍이속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하오문이라 말하지 않았소? 패를 꺼내지도 못하게 하면 어찌 신분을 증명한단 말이오?”
저벅.
두 무인 중 하나가 다가왔다.
“하! 하오문이라고? 대체 사파의 찌끄러기가 우리 대 선우세가를 왜 찾아온단 말인가?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단단히 경을 칠―”
허나 다음 순간.
보다 가까이에서 이벽의 얼굴을 바라본 무인의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어?”
이내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신… 아니, 너……?”
“…나는 하오문의 이벽이고, 그쪽의 ‘가주’께 용무가 있어 찾아왔을 뿐 다른 어떤 의도는 없소.”
이벽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 기별을 넣어주시오.”
“크, 크으, 으으……!”
끼이익. 쿠웅!
다음 순간, 질겁한 무인이 그 즉시 몸으로 밀치듯 대문 안으로 뛰쳐 들어섰다.
쿠웅,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우당탕.
“비, 비상! 비상!”
“무, 무슨 일이냐?!”
한동안.
문 너머에서 소란이 일었다.
“…….”
이벽은 남은 한 명의 젊은 무인을 바라보았다. 그 안색 역시 창백해져 있었다.
“서, 선우… 벽.”
무인이 침음성을 삼켰다.
귀신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얼굴은 낯설지 않았으나 상대의 이름까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지나가도 되겠소?”
“으… 으으!”
“…….”
철컥, 끼익.
이벽은 스스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덧 마당에는 수십의 인파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물론, 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저벅저벅.
어쨌거나 이벽은 걸어 들어갔다.
“허어……!”
“저, 정말로…….”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허나 이벽은 그중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모두가 과거의 얼굴들일 뿐이었다.
소란 속을 똑바로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며, 가는 길 또한 잘 알고 있으므로 안내 같은 것이 필요하지도 않다.
한동안 누구도 이벽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벽의 걸음걸음마다 길이 열렸다. 허나.
저벅.
“…비룡대주.”
마침내 앞을 가로막은 건.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세가의 외당주이자 ‘가주 대리’인 선우굉이었으며, 과거 이벽의 검에 배를 관통당하기도 했던 바로 그 자였다.
“오랜만에 뵙는군. 안녕하시오?”
이벽이 무심하게 말했다.
선우굉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상처가 퍽 위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사히 회복하신 모양이군. 다행이오.”
다시 이벽이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딱딱하게 굳은 선우굉의 눈매가 힘겹게 호선을 그었다.
“…그래, 오랜만에 뵙는구려 조카님. 덕분에 이 몸이 용케 잘 살아있다네. 조카님께서도 강녕하셨는가? 그간 많이 장성하셨―”
“그게 무슨 말이오?”
다시 이벽이 답했다.
“나는 하오문 수호대의 이벽이지, 당신의 조카가 된 기억은 없소. 무언가 착각하신 게 아니오?”
“……!”
훅, 이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뭣보다 내가 당신들과 같은 혈통임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난처해지는 건 그쪽이 아니겠소?”
푸르르, 선우굉의 뺨이 흔들렸다.
‘핏줄’이란 명분으로 은근슬쩍 상하관계를 정립하려 했으나 애송이는 넘어오지 않는다.
허나 이내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그래, 그렇다면야 이 몸이 사람을 착각한 모양이구려. 실례가 많았소. 헌데 하오문도께서 본가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조금 전 가주를 뵈러 왔노라 뜻을 밝혔소만. 아무래도 전달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군.”
“그야 물론 전해 들었소. 그래서 무슨 이유로 가주님을 뵈려 하는지, 지금 묻고 있지 않소?”
선우굉의 미소가 짙어졌다.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곳은 선우세가요. 옛일이야 어찌 되었건, 객으로서 찾아오셨다면 부디 예의를 지켜주길 바라오.”
“…이상한 일이군.”
이벽은 팔짱을 끼었다.
“나는 하오문의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이곳에 찾아온 것이고, 분명 가주께 전달을 부탁드렸소. 그리고 그쪽은 가주가 아닌 걸로 알고 있소만.”
“…….”
“나를 만나고 만나지 않고는 가주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당신이 먼저 나서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지 않소?”
물론.
이벽은 오래전 독왕 당평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가주였던 자신이 숙청되고 소가주의 자리가 선우협에게 넘어갔던 것처럼.
가주는 내력을 잃었고.
이 자는 ‘가주 대리’가 되었다.
즉, 실질적인 가주에 해당한다.
허나 이벽은 생각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므로, 자신이 찾는 이가 될 수 없었다.
“나야말로 정중한 손님 대접까지 바라지는 않소만… 공연히 길을 막지는 말아주시오. 가주님의 처소라면 물론 잘 알고 있으니.”
“노오오옴―!!”
그때였다.
주변을 둘러싼 무인들 속에서 누군가가 일갈했다.
“보자 보자 하니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더러운 가문의 수치 주제에… 목숨을 건졌으면 조용히 숨어 살 것이지 예가 어디라고 감히 큰소리를 치느냣!!”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장로에 해당하는 중년인 두엇이 인파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뭣들 하느냐―!! 대 선우세가가 고작 저런 천한 핏줄에게 모욕당하는 꼴을 두고만 볼 셈이더냐!!”
철컥, 철컥.
이내 여기저기서 검을 잡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벽은 무심한 얼굴로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선우굉을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주?”
흠칫, 선우굉의 눈이 흔들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미 사 년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나는 당신들과는 어떤 은원도 없소. 허나.”
“…….”
“오늘 이 순간 은원이 새로 생긴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겠소?”
찰나의 순간.
선우굉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 한순간의 실수로 숨통을 끊지 못한 녀석은 괴물로 자라났고, 마침내 세가의 가장 큰 후환이 되고 말았다.
또한.
선우굉은 패왕가의 애송이를 생각했다. 사 년 전의 경고라면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분명히 혼자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차라리 지금,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베어버리고 시치미를 뗀다면 어떻게든―
“부디 잘 생각하시오. 당주께서는 많은 목숨들을 책임지고 계시지 않소?”
허나 그때였다.
다시 이벽이 말했다.
오싹.
눈이 마주친 순간, 선우굉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미 아문 배의 상처가 다시 고통을 호소했다.
‘이, 이놈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당주! 명령만 내리시오! 제 놈이 발로 찾아왔지 않소?! 이참에 놈을 베지 않으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닥치시오!!”
선우굉이 장로의 말을 끊었다.
“이 자는… 하오문도라고 하지 않았소? 이 일로 인해 사파세력과의 갈등이 번진다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소?! 아니면 좀 닥치란 말이오!!”
“……!”
선우굉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흠칫, 길길이 날뛰던 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변의 기세는 누그러졌다.
“잘 생각하셨소. 현명하시군.”
다시 이벽이 말했다.
잠시간 분을 삭이는 듯, 선우굉이 호흡을 씨근거렸다. 허나 지금의 상황에서 달리 어쩔 방법은 없다.
이내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한 말씀이오만 가주께서는 이곳에는 안 계시오.”
“……?”
이벽의 눈썹이 흔들렸다.
“퍽 이상한 일이군. 세가의 주인께서 세가에 없으면 대체 어디에 계시단 말이오?”
“…근래에 건강이 좋지 않아 속세와 거리를 두고서 정양하고 계시오.”
“…핫. 재미있군.”
이벽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주께서 계신 곳까지는 이 몸이 직접 안내해드릴 테니… 부디 순순히 따라와 주시오. 부탁드리겠소.”
* * *
타닷.
이벽은 선우굉을 따라 세가를 나섰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인근의 산자락이었다. 얄궂게도, 이벽이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재미있군. 과거의 소가주를 해치웠던 바로 근처에 그 아비인 가주까지 처박아두었단 말이오?”
“…….”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남의 집안일에 딱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은 마시오.”
이내 두 사람은 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신법을 펼치는 한편, 이벽은 생각했다.
내력을 잃고 빈 껍데기가 된 가주를 죽이지 못하고 이런 곳에 처박아 둔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갔다.
독왕 당평세는.
과거, 선우세가의 시조이자 전대 가주였던 검치 선우명과의 인연을 계기로, 선우세가의 일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고로 아마도 선우굉은.
소가주를 쳐내고도 당가와 독왕의 눈치를 보아 가주의 목숨만큼은 쳐내지 못했던 것일 테다.
“…….”
선우세가의 2대 가주 선우각.
이벽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차가운 눈빛을 회상했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의 눈’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몸종 신분이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선우벽은, 검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친자식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고로.
세가를 누가 손에 넣고 주무르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라 믿어왔던 선우협이 ‘누구의 핏줄’이건.
화를 낼 이유는 없었으며, 지저분한 이야기들에 대해 딱히 더는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다만.
확인해야 할 사실을 확인한 뒤,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확인해야 할 사실.’
혈마의 뒤를 쫓기에.
이벽은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그것은 목천의 힘을 한 번 잃어버리고 이내 다시 되찾았음에도, 여전히 ‘하늘로 나아가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오문주 월향은 말했다.
―소협께서도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전 수호대주께서는 ‘선우세가의 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과거 이진천은.
스스로 선우 씨임을 부정했다.
허나 그는 선우세가의 무공에 있어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었으며.
과거, 이벽은 그의 창공비검을 통해 정말로 자신과 ‘피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낙검.’
등천의 경지. 그리고.
창공비검이 아닌 창공비검.
―어째서 그분이 선우세가의 비전에 뿌리를 두고 계셨는지는… 이제 와서는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되었지요. 다만.
―…다만 무엇이오?
―선우세가의 시조, 검치 선우명의 친자인 선우세가주 선우각이라면… 세가의 비전이 외인에게 유출된 ‘비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
말마따나 이진천이 선우세가의 무공을 지녔다면, 그에 대한 단서를 선우세가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과거, 선우굉과 장로들을 상대로 이벽은 청강유엽신법과 연엽보가 ‘결합’된 경신법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그 경신법이 선우세가의 무공에 비롯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고로.
선우세가에 대해.
선우세가의 무공에 대해.
그리고 등천의 경지나 이진천의 마지막 일검에 대해 무언가 ‘숨겨진 사실’이 있다면.
그것을 알만한 이는.
선우세가주 단 한 명뿐일 테다.
“…….”
심지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마에 대한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혈마의 뒤를 쫓고 있던 이진천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은.
역으로 혈마의 정체를 추적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선우세가주 선우각은.
‘힘에 대한 단서’임과 동시에… 현재로서는 ‘혈마의 뒤를 쫓을 유일한 단서’인 셈이었다.
물론, 허탕을 칠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었다. 허나 부딪혀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가주께서는 저곳에 계시오.”
그리고 그즈음이었다. 선우굉의 목소리가 이벽의 상념을 깨었다.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