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66)
272화. 혜공의 두 번째 부탁 (1)
철면개, 그리고 혜공선사와의 대화가 일단락된 후 이벽은 개방의 본타를 나섰다.
그리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려옥, 정연화와 함께 바로 옆의 봉우리에 자리한 소림으로 발을 옮겼다.
“사, 사고……!”
“…연화야.”
소림의 약방에서.
정연화는 앞서 당가와 청성의 습격으로부터 함께 도망쳐 나왔던 금령사태와 재회하게 되었다.
허나 그녀는 일전에 입은 상처가 도진 채 몸져누워 있었다. 제 몸을 돌보는 것조차 잊고 밤낮을 달려 소림에 당도했던 탓이었다.
허나 남궁세가의 침공을 받게 된 개방과 소림으로선 아미에 지원을 보낼 여력이 없었고,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아미는… 어떻게 되었니?”
“괘, 괜찮아요, 사고! 은공께서… 비룡대주께서 우릴 구해주셨어요! 모두가 무사해요!”
“다행, 정말 다행이구나… 감사합니다, 대협. 저희는…….”
“…아니오.”
짧은 대화 끝에.
금령사태는 깊은 잠에 들었다.
물론, 목숨이 위험한 것은 아니며 그저 지쳐있던 심신이 마침내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탈진에 빠진 것뿐이었다.
꾸욱, 허나 정연화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
그리고.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려옥은 조용히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일행은 경내의 객당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과거, 이벽이 비룡대원들과 함께 며칠을 묶었던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
허나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정 내내 줄곧 정연화에게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던 당려옥조차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다.
일행에게 저녁 식사가 내어졌다.
“…그렇군요.”
둘러앉은 밥상 위로는 계속해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나 이내 당려옥이 말꼬를 틀었다.
“‘남궁세가가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라… 뭐, 우리 당가가 아미를 친 것과 비슷한 이유이겠죠?”
“…….”
이벽과 정연화는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당려옥이 스스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권왕께선 천하제일인이고, 그분께서 명하신다면… 우리는 어찌 되었건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려옥이 작게 웃었다.
황보세가, 그리고 권왕은 의혈맹의 실질적인 ‘왕’이 되었고, 나머지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가들은 모두 그를 따르는 가신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힘의 무게추는.
완벽하게 기울어버렸다.
그것은 물론, 의혈맹의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권왕이 ‘천하제일인’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우리 당가는 어떻게든 남서지역 무가의 중심으로서 약간이나마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요.”
“…….”
그것은 아마도.
독왕의 존재 덕분이었을 터였다.
‘힘이 있는 자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과거의 권왕은 이벽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황보세가를 중심으로… 동부의 남궁세가나 북부의 모용세가를 비롯한 다른 무가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어요. 그저 황보세가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밖에는요.”
“…그래서요?”
불쑥 정연화가 되물었다.
“딱히… 그뿐이에요.”
“그러니까 당가건 남궁이건, 황보세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일 뿐이란 말이죠.”
“…이익!”
타앙.
정연화의 숟가락이 상을 두드렸다. 무어라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소저는 혹시 언가를 아시나요?”
당려옥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순간 정연화의 말문이 가로막혔다.
“백리세가나… 신창양가는요?”
“…그게 무슨 말이죠?”
“한때는 오대세가에 들었거나… 그에 버금갈 만큼 큰 성세를 떨쳤던 무가들이에요. 허나 지금은 그 명맥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진 이름들이죠.”
당려옥의 눈이 조금 흐릿해졌다.
“당대의 권왕께서 의혈맹을 일으킨 이래… 함께하기를 거절했던 무림세가들은 오늘날 ‘이유도 없이’ 대개 그렇게 되었죠.”
“……!”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훗, 당려옥이 가볍게 웃었다.
“뭐, 솔직히 구질구질한 변명이지만요. 잃을 게 많아질수록… 협객이 되기는 어려운 법이거든요.”
당려옥의 시선이 이벽을 스쳤다.
“하지만… 설마 ‘그런 이’들까지 의혈맹의 범주 안에 한 데 엮이고 있는지는 정말로 몰랐어요. 물론, 몰랐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되진 않겠죠.”
그런 이들이란.
물론, 모란과 종인욱을 비롯한 ‘흑시’를 가리키는 말일 터였다.
다만 그들이 정말로 의혈맹의 일원이라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허나 당려옥은.
심증을 통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마친 듯했다.
“미안해요, 정 소저.”
그리고 당려옥이 말했다.
흠칫, 정연화의 안색이 흔들렸다.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물론, 알고 있어요.”
하아, 정연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밥상 위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당려옥이 진짜 악인이 아님을 알기에, 정연화는 더욱 화가 나는 듯했다.
“…….”
이벽 또한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이래저래 밥상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쿵쿵.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고리를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이벽이 말했다.
드륵, 이내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젊은 무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벅.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주.”
무승이 고개를 숙였다.
“…덕수 스님이셨군.”
이벽은 상대를 확인했다.
그는 정파무림의 오룡삼봉 중 하나로 손꼽히던 천수법룡 덕수로, 과거 파진성이 닭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는 빌미로 비룡대와 갈등을 빚다 이벽에게 두들겨 맞고.
이후 소환단을 흡수한 파진성에게까지 패배하고 말았던 비운의 사내였다.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그냥 덕수면 됩니다.”
“그럴 수는 없소.”
덕수가 쓰게 웃었다.
“사숙조께서 시주를 찾으십니다.”
“…….”
사숙조란 물론, 혜공선사였다.
“잠깐 다녀오겠소.”
이벽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두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덕수를 따라 객당을 나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경내를 가로지르는 한편, 이벽은 낮에 있었던 기억을 되새겼다.
철면개의 처소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혜공선사는 이벽이 찾고 있는 ‘또 한 명의 혈마’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 말했다.
“아직 확증은 없는 이야기이오만… 의혈맹은 어쩌면 마교의 힘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오.”
“……!”
이어지는 노승의 말은.
서천무존 정룡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허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한… 혈마란 혈교의 교주가 아니오? 허나 혈교는 과거, 마교와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그 휘하로 흡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니… 마교 세력이 혈마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
그것은.
무림의 역사 속에서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허나 마교는 이미 오십여 년 전 정사연합에 패배하여 종적을 감추었고.
오 년 전, 다시 나타난 것은 오히려 혈교의 잔당들이었다. 고로 이벽은 ‘그 연결고리’를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동시에.
이벽은 석연찮음을 느꼈다.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그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스승과 일전을 버렸던 그 ‘혈마’는.
결코 잔당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말을 꺼내는 노승의 표정에서, 이벽은 그것이 하고자 하는 말의 ‘전부’가 아님을 직감했다.
“서, 선사님, 잠시……!”
허나 그때, 철면개가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혜공이 말을 멈추었다.
“…끌끌끌, 그래. 백주대낮에 함부로 떠들 만한 얘기는 아닐지도 모르겠구려.”
“…….”
세 사람이 자리한 곳은.
소림의 바로 옆 봉우리이자 개방의 새 본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듣는 귀를 신경 쓰는 듯했다.
“시주, 내 시주와 일행을 소림으로 모실 터이니 편히 여독을 푸시길 바라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시 시간을 내서 마저 해도 괜찮겠소?”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혜공 선사는.
단순히 인사 차원이 아닌, 무언가 분명한 용건이 있어서 자신을 찾아온 듯했다.
그렇게 일행은 소림으로 향했고.
한나절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이곳입니다, 시주.”
그때, 덕수가 말했다.
이내 이벽은 눈앞에 놓인 산문을 바라보았다.
산문 안의 산문.
그것은 소림의 방장이 머무르는 주지승방의 문으로, 물론 북두천존 혜능선사가 머무르고 있어야 할 장소였다.
허나 혜능선사는 권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칩거에 들어갔고, 이에 빈 주지승방을 지키는 것은 그 사형인 혜공선사가 되었노라 했다.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은 학승이라 해도 어찌 되었건 혜공선사는 소림 최고의 배분이자 큰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
이벽은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허나 문득 덕수의 시선을 느꼈다. 이벽이 시선을 돌리자 흠칫, 덕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불현듯 덕수가 허리를 숙였다.
“시주께는… 반드시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지 않소?”
결과적으로.
과거의 덕수는 흠씬 두들겨 맞았고, 당연하게도 이벽은 그에게 악감정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허나 덕수는 허리를 펴지 않았다.
“과거, 오룡삼봉이라는 헛되고 세속적인 이름에 묶여… 스스로가 무엇이라도 된 양 조잡한 오만에 차 있던 제 눈을 뜨게 해주셨지요.”
“…….”
“심지어는 그러한 주제에 막상 사문에 위기가 닥치자… 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덕수가 쓰게 웃었다.
그 표정에서 이벽은 일말의 불안을 읽어내었다. 철면개는 ‘걱정할 것 따윈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허나.
전후 오십여 년간 구 무림맹을 지탱해왔던 취풍신개와 북두천존이란 두 기둥이 무너지고.
적들은 목전까지 이르렀다.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걱정 마시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소림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이벽은 힘을 주어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시주.”
다시 한번 덕수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이벽은 주지승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움찔.
“……!”
허나 그때.
불현듯 낯선 감각을 느꼈다.
부르르.
그리고 이벽은 당황했다.
문고리를 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문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압박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
허나 현재의 자신에게.
이 정도의 압박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이가 대체 누구인지, 이벽은 선뜻 생각해낼 수 없었다.
다만 어쩌면.
눈앞에 서 있는 문의 무게는 과거, 북두천존 혜능선사를 찾아왔던 그때보다도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끼이익.
이내 이벽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 암석이 깔린 넓은 연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년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허나 물론.
기암거석 같은 근육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북두천존의 등은 그곳에 없었다.
그 대신 연무장의 중앙에 앉아있는 것은 그저 고목처럼 메마른 체구의 노승이었을 뿐이었다.
외팔의 노승은.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허나 혜공선사는 무인이 아닌 학승이므로, 물론 내력을 운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후우웅.
“……!”
찰나의 순간,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정좌한 노승의 등 뒤로 언덕만 한 크기의 거대한 금빛 불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움찔.
다시 이벽의 몸이 흔들렸다.
황금처럼 빛나는 부처의 형상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압박감이 스쳤다.
우웅.
이벽은 선천의 힘을 일으켰다.
그 즉시 심신을 가다듬었다. 허나 그럼에도 눈앞의 불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로 그것은.
사술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등천의 영역?’
슥.
그때, 혜공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불상의 모습이 산산이 흩어졌고, 금빛 정광이 혜공의 작은 몸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오셨소, 시주?”
노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깨 위로 정광이 서렸다.
“…선사, 당신께서는.”
이벽은 할 말을 찾으려 했다.
허나 뒤이을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앉은 혜공선사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뭐, 오십 년씩이나 암자에 처박혀서 불법을 파고들다 보면… 일개 학승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일도 있지 않겠소?”
“…….”
“그보다… 나 역시 소협의 성취를 보고 싶군 그래. 괜찮으면 이 늙은이에게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시겠소?”
‘힘’이란.
물론, 등천의 영역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이벽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심안을 열었다.
사락사락.
그리고 나뭇잎이 몸의 주변을 둘렀다. 물론,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뭇잎이었다.
허나.
“…나뭇잎이라. 그야말로 무위자연의 흐름을 투영하는 도의 근본과 같구려.”
“……!”
혜공이 말했다.
다시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아마도 궁금한 게 썩 많겠지만… 그 이전에 시주, 내 옛날얘기 하나만 해도 되겠소?”
노승의 흰 눈썹이 팔자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