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97)
304화. 독왕 당평세 (4)
“…….”
이벽은 침묵했다.
눈치조차 채지 못한 사이에 당평세의 독은 자신의 몸을 파고들었고, 이어지는 접전 끝에 이내 복부에도 일장을 허용하고 말았다.
접근전을 펼치는 내내.
이벽은 스스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실은 자신의 그러한 ‘착각’마저도 모두 독왕의 계산 안에 있었던 것이다.
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우우웅.
이벽은 마주한 당평세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 몸 안에 감춰져 있던 무수한 암기들이 어깨 위 허공을 빼곡하게 수놓고 있었다.
‘…만천화우.’
이벽이 무력화되었기에.
더는 주변의 식솔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지 않은 채, 독왕은 마침내 ‘큰 기술’을 꺼내 든 것이다.
“그러게… 대체 무슨 빌어먹을 오만함으로 독왕이 내어주는 차를 함부로 받아먹었나? 응?”
“…….”
과거, 이벽은 이미 독왕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만천화우를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독왕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독이 전혀 실리지 않았던, 그저 암기의 비가 쏟아질 뿐인 공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오 년 전의 이벽은 궁지에 몰렸고, 끝끝내 그 암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허나.
우우웅.
지금의 독왕을 감싸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암기들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지독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붓이 먹을 빨아들이듯, 암기는 독을 흠뻑 머금었다. 다음 순간, 그 끝이 일제히 이벽을 향해 기울어졌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딱히 없소.”
“그렇구먼. 그럼 잘 가게나 소협. 혹 저세상에서 소협과 소협의 조부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내 머리 숙여 사과함세.”
당평세의 쓴웃음이 감돌았다.
슥, 느릿한 손가락이 뻗어졌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수십 자루의 암기가 이벽을 향해 쏘아졌다. 타앙, 이벽은 그 즉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암기들이 이벽의 서 있던 자리를 두드렸다. 허나 으스러진 것은 고작해야 두어 자루에 불과했다.
“허헛! 아직도 그 정도로 움직일 여력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놀라게 해주는구먼!”
쐐애애애애액.
까딱, 당평세의 손가락이 흔들렸다. 이내 쏘아진 암기들이 방향을 달리하며 이벽을 추격했다.
타다다닷.
허나 이벽 또한 쉬이 격추당하지 않았다.
창공비검의 묘리를 경신법으로 풀어내었고, 이내 이벽의 신형 위로 여섯 개의 묘리가 교차하며 암기들을 피해내었다.
“과연, 이 독왕의 독에 그만큼이나 젖어 들고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여태껏 단 한 명뿐이었다네!”
쐐애애액, 후욱.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기실 당평세가 몇 마디 말을 늘어놓는 사이 이벽은 몸 안에서 선천의 힘과 독의 균형을 맞추었고, 다시금 독기를 묶어두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허나 그로 인해.
선천의 힘 대부분이 몸 안에 묶여버렸으므로, 일전을 펼칠 여력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반격은커녕, 지금과 같이 몸을 보호하며 경신법을 펼치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고로 남은 수단은.
달아나는 것뿐이다.
훅, 후욱.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늦었네! 내 가급적 고통 없이 끝내줄 터이니… 이만 단념하시게!”
허나 당평세 또한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사방의 암기가 폭풍우처럼 둘러싸며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타다다닷, 쐐애애액.
“…쿨럭!”
이벽은 애써 피를 삼켰다.
잠시라도 움직임을 멈추면 곧바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독과 암기의 폭풍우 속에서, 이벽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남은 힘을 끌어모아 창공비검의 절초를 펼친다면, 어떻게든 하늘 위로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정작 그 절초를 펼칠만한 여유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으며, 같은 이유에서 만월무변곡검 또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타다다다닷, 휘익.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벽이 검에 쏟을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움직임과 내력뿐이었다.
훅.
툭, 투둑.
이내 이벽의 검이 원을 그렸다.
유의 묘리에 휩쓸린 암기 몇 자루가 당평세의 통제에서 벗어나 땅에 떨어졌다.
위기 속에서 이벽은 실낱같은 빈틈을 유검으로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송영영과의 짧은 비무는.
상상 이상으로 도움이 되었다.
쐐애애액.
“허헛! 어림없다네!”
허나 제아무리 몸을 빼낸들.
그때 이미 나머지 암기들은 이벽을 앞지른 뒤 다시금 포위망을 형성한 상태였다.
그렇게.
포위망의 형성과 탈출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벽의 몸 안에는 계속해서 독기가 스며들었다.
‘…생각해내야 한다.’
이대로는 결국, 몸 안의 독에 야금야금 잡아먹힐 뿐이다.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불현듯, 저만치 당가의 식솔들 사이로 서 있는 한 명의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
그녀는 당려옥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창백한 안색을 한 당려옥의 입술이 미소와 함께 무어라 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이벽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앞서 흑시의 잔당들을 베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또다시 ‘인질을 자처’해왔다.
일순, 이벽은 갈등에 빠졌다.
허나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도움을 빌리는 것만이… 이 자리를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일 지도 모른다.
후우욱.
다음 순간, 판단을 마친 이벽은 유검으로 암기를 쳐내며 당려옥이 자리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훅, 콰아아아앙―!!
무아지경 속에서.
쳐내고 벗어나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당려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벽은 마침내 암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타아아앙.
그 즉시 땅을 박찼다.
당려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쐐애애애액.
“……?”
허나 몸이 쏘아지는 찰나의 순간, 이벽의 뇌리로 묘한 위화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된 거지?’
만천화우의 포위망으로부터.
돌연 너무 쉽게 벗어나 버렸다.
허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이리도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면, 당려옥을 인질로 삼아야 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흘끗.
찰나의 순간,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암기들은 여전히 자신의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었으나.
그 속도는 명백히 느려졌다.
그것은 마치, 정말로 이벽을 쫓는다기보다는 그저 ‘쫓는 흉내’를 내는 듯했다.
“…!”
그 순간, 이벽은 깨달았다.
“…훗.”
그와 동시에 웃음이 스쳤다.
몸 안에는 극독이 들끓었고, 늘 그렇듯 심신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허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은.
역시 그릇되지 않았다.
탓.
다음 순간.
이벽의 신형이 돌연 땅에 내려앉았다. 미처 당려옥에게는 닿지 못한 상태였다.
쐐애애애애액.
그리고 뒤를 추격하던 암기들이 마침내 이벽을 따라잡았다. 그대로 이벽의 전방위를 포위했다.
그렇게.
애써 벗어난 포위망 안에.
다시금 갇혀 버리고 말았다.
“…자네 미쳤나?”
그리고 당평세가 말했다.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애써 달아나다 말고… 왜 갑자기 자리에 멈춰버리나? 목숨을 포기하기라도 했나?”
“그렇소.”
“…뭐라?”
“갑자기 허무해져서 말이오.”
이벽이 어깨를 으쓱했다.
“노야의 말마따나… 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 실력을 내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는데 이 이상 무인으로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냥 죽이시오.”
“…하! 그렇단 말이지?”
후욱.
다음 순간.
당평세의 손가락이 까닥였다.
동시에 이벽의 미간과 두 눈, 인중과 심장, 명치, 단전을 비롯한 모든 사혈에 암기가 쏘아졌다.
“…아, 안 돼요, 할아버지!”
당려옥이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뛰쳐나가려 했다.
“괜찮소, 당 소저.”
“……?”
허나 이벽이 말했다.
멈칫, 당려옥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당혹스런 얼굴이 감돌았다. 이벽은 쓰러지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명백했다.
모든 암기들이 급소를 노리고 있었으되, 정작 정말로 몸 안을 파고든 것은 단 한 자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벽은.
다시금 당평세의 눈을 마주했다.
“죽여달라니까… 얼른 죽이지 않고 무얼 하시오?”
“…….”
* * *
무거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허나 그 상태로 일 각 가까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벽의 온몸을 포위한 암기는 단 한 자루도 몸 안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오직 당평세의 미간만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찌푸려졌다.
“역시 그랬군.”
이내 이벽이 말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소.”
“…허헛.”
조금 전.
만천화우에 쫓기던 이벽은 불현듯 당려옥과 눈이 마주쳤고, 이내 그녀를 향해 도주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벽을 추격하던 만천화우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속도는 서서히 느려졌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벽은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나 물론, 천하의 독왕이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다.
즉.
독왕은 ‘일부러’ 이벽이 벗어날 수 있게끔 암기의 움직임을 조절한 것이다.
“처음부터… 노야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피를 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 같군. 그렇지 않소?”
훗, 이벽은 웃었다.
이벽은 대화를 하고자 했고.
전투가 벌어진 후에도 어느 누구도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제 실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은.
독왕에게 허점을 내주는 결과가 되어, 무형지독에 당해버렸고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허나.
어떻게든 이벽을 해치지 않고 쫓아 보내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은… 당평세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그가 이벽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조금 전의 무의미한 대화로 이벽이 몸 안의 독을 추스를 시간을 줄 이유는 없었다.
“노야,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또 어디 있겠소?”
최선을 다해 싸우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서로의 목숨을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가와 당평세를 향한 이벽의 믿음이 결국 그릇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허헛.”
이내 노인이 마주 웃었다.
“허헛, 어허허헛!”
이후 한동안, 노인의 웃음소리가 장내의 침묵을 메웠다. 이내 머쓱한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자네는… 밑도 끝도 없이 어리숙하다가도 무공에 한해서만큼은 심신이 모두 괴물과 같군. 천하의 이 독왕이 방심을 한 모양이네.”
이내 선선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나는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네. 정확히는 ‘죽일 수 없다’고 봐야겠지.”
“…‘죽일 수 없다’라.”
“내 누누이 이야기했네만… 자네의 조부님이 아니셨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고, 당가 또한 없었네.”
이내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니 자네나 혹은… 자네의 옛 집안에 해를 끼치는 짓만큼은 나는 할 수가 없는 것이네.”
“…….”
“허나 그건 내 입장일 뿐이지. 어쨌거나 우리는 적이 아닌가? 다짜고짜 적진에 찾아와 대화를 하자니, 이게 무슨 어리석고 무책임한 짓인가?”
당평세가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야 조금 전에도 말했잖소? 상대가 노야이고 당가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굴고 있다고. 나는 내 판단을 믿었을 뿐이오.”
“…이 강호무림에서 사람을 함부로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네.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면서 어찌 무림인으로서 살아남길 바라나?”
훗, 이벽은 다시 웃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도, 노인은 끝끝내 이벽에게 충고와 훈계를 건넬 생각인 듯했다.
“그야 내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겠지. 그 정도는 알고 있소. 혈육이라 믿고 있던 누군가에게 등을 찔려본 적이 없지도 않소.”
“그렇다면―”
“그렇다 해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다면 그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다만… 만일의 경우에도 죽지 않게끔 노력해서 더욱 강해지면 되는 게 아니겠소?”
“……!”
일순 노인은 말문이 막혔다.
말마따나 이벽은 ‘강해졌다’.
또한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무골과 검에 대한 재능은 늘 경외의 대상이었던 오십 년 전의 ‘그분’을 그대로 빼다 박았노라 생각했다.
허나.
마음가짐만큼은 전혀 닮지 않았다. 선우명은 그저 홀로 자신의 길을 걷는 고고한 무인이었을 뿐, 이벽과 같은 협객은 아니었다.
허나 협객의 명줄은 짧다.
배신을 당하거나, 희생을 치른다.
그렇기에 그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아예 강호무림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거, 그만큼이나 검과 무에 미쳐있던 ‘검치’ 선우명마저도 이벽의 나이에 감히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어쩌면.’
핏줄 속의 재능과 더불어.
타인의 목숨에 지나치게 연연하여 화를 자초한다고 생각했던 심성이 오히려 지금의 성장을 이룩해낸 밑바탕이었다면.
‘무림인’이 아닌 ‘무인’이기에.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면.
“…허헛.”
당평세는 다시 웃었다.
찰나의 흡족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그 웃음은 결국 쓴웃음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렇군. 이제 좀 알 것 같소.”
그리고 이벽이 말했다.
“노야께선… 내가 당 소저를 데리고서 무림을 떠나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주기를 바라고 계셨던 거로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