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98)
305화. 심독
“그렇군. 이제 좀 알 것 같소.”
이벽이 말했다.
“노야께선… 내가 당 소저를 데리고서 무림을 떠나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주기를 바라고 계셨던 거로군.”
“…….”
그리고.
이벽이 내어놓은 그러한 결론에 대해, 당평세는 섣불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허나 이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애당초 서천무존 정룡과의 대치 이후 이벽은 당려옥을 당가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거부한 것은 오히려 당평세였다.
그리고 지금.
궁지에 몰린 이벽이 당려옥을 향해 방향을 튼 순간, 독왕의 암기는 은근슬쩍 추격의 고삐를 늦추었다.
이는 즉.
이벽이 눈치조차 채지 못하게, 당려옥을 ‘도로 내어주려 한 것’이다.
“또한 내 생각에.”
다시 이벽이 말했다.
“무인과의 재능과는 별개로… 무림인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은 노야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소.”
“……!”
당평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물론, 전후 강호무림의 천하를 지탱해왔던 열 명의 절대자 중 한 명에게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허나 이벽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가 노야와 당가를 믿은 것만큼이나… 무턱대고 나를 믿고 있던 것은 노야도 마찬가지가 아니오?”
비단 당려옥 뿐만이 아니었다.
당가주 당명오와 이벽이 일전을 펼치게 될 것을, 당평세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허나 그럼에도 당평세는 한발 늦게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당가의 식솔들이 모여있는 한복판에서 이벽에게 기습을 가했다.
그것은.
설령 일전을 벌인다 해도, 이벽이 식솔들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으리란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내 말이 틀리오?”
“…허헛. 어허허헛!”
당평세는 재차 웃었다.
다시금 소소한 깨달음이 노인의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자신은 은인의 모습을 빼닮은 핏줄에게서… 자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비추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어떡하시겠소?”
다시 이벽이 말했다.
서로에게 서로를 해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더는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허나.
이벽의 신형은 여전히 독왕의 암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아직까지도 당평세에게는 이벽을 순순히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이내 당평세가 운을 떼었다.
“말했듯이 자네를 죽일 수 없네.”
“…….”
“그리고 죽일 수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살길을 열어 주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네.”
살길을 열어준다.
오 년 전, 권왕에게서 목숨을 구해주었을 때에도 독왕은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다만 제아무리 어르고 꾸짖어본들 자네의 ‘죽음을 향한 행보’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네. 그러니…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군.”
훅.
당평세가 팔을 휘저었다.
후두두두둑.
그러자 이벽을 둘러싸고 있던 암기들이 일제히 땅에 떨어졌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거두어졌을 뿐이었다.
정작 그 암기를 허공에 묶어두었던 당평세의 무형지독은 조금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우우우웅.
외려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빠르게 일점으로 모여들었다. 주변을 점령한 극한의 독기가 뭉치고 다시 뭉쳐져서.
벼리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한 자루의 암기’가 되었다.
“…!”
이벽의 눈이 잘게 떨렸다.
무형의 독이 모여 형체를 이룬다.
그것은 조금 전, 자신이 만월무변곡검을 통해 무형지독을 구슬의 형태로 짓눌러놓았던 것과 비슷한 무리였으나.
그때와 달리, 고작해야 바늘만 한 형태로 압축되어 있음에도 기운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으며.
응축된 독의 양은.
오히려 몇 배 이상이었다.
“어떤가? 퍽 흥미롭지 않나?”
“…살벌하기 짝이 없구려.”
그리고 다시, 조금 전과 유사한 문답이 오고 갔다. 허나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입장은 뒤바뀌어 있었다.
“심독(心毒)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네. 자세한 의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
허헛, 당평세가 수염을 쓸었다.
“뭐, 자네쯤 되는 이를 제압하려면… 육신을 파고들기도 어려운 만 자루의 암기를 다루는 것보단 이것 하나가 오히려 낫겠지 싶군.”
극한으로 압축된 무형지독은.
그 자체로 한 자루 암기의 형상을 띤 채, 적의 육신을 넘어 마음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별개의 독’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 어떤 강대한 무인이라라 해도…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저마다의 약한 부분을 품고 있게 마련이며, 하물며 그 어떤 검이나 갑옷으로도 보호할 수 없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네를 ‘기절’시키도록 하겠네. 그러니…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게나.”
“…그렇구려.”
이내 이벽은 말뜻을 이해했다.
‘적의 가장 약한 곳’을 찌른다.
그것은 그야말로 지난 수십 년간 천하제일의 독인으로 일컬어져 온 사내가 다다를 수 있는 도달점과 같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그러한 것이 파고든다면… 과연 스스로가 얼마만큼이나 저항할 수 있을지, 이벽은 가늠할 수 없었다.
“강호무림의 머리 아픈 일들이 모두 정리되고 나면… 내 그때 가서 자네를 다시 깨워주도록 하겠네.”
우우웅.
심독의 암기가 진동했다.
이벽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노야, 권왕이 그렇게 두렵소?”
“……!”
“아니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인들이 두려운 것이오? 대체… 노야께서는 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그렇게까지 확신하고 계시오?”
“…….”
당평세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 노인은 드러난 ‘진실’ 앞에 절망했다. 허나 협객으로 한 목숨을 내던지기에는… 짊어진 목숨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늙은이와 젊은이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허나 늙은이의 오지랖이라 할지언정…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자네가 당금의 강호에 대해 무얼 얼마나 알고 있건…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네.”
스으으.
암기가 서서히 떠올랐다.
이벽의 미간을 겨누었다.
“부탁이니 저항하지 말게. 공연히 어설프게 맞거나 혹은 의식을 붙들고 버티려 노력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니.”
“…그렇구려.”
이벽은 암기를 바라보았다.
피하거나 막아내려 한들, 극한까지 일점으로 압축된 심독의 끝은 나뭇잎의 방어마저 쉬이 파고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시도해볼 수는 있다.
허나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설령 이대로 무사히 달아난다고 해도 결국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셈이다.
심지어 노인은.
‘죽이지 않겠노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독왕이 그렇게 말했다면, 사실상 목숨을 잃는 일만큼은 절대로 없을 터였다.
그것은 역시.
과할 만큼 자비로운 손속이었다.
“잘 알겠소. 한 번 버텨보지.”
“…말로 하면 귀에 안 들어오나?”
이벽은 마음을 정했다.
당청이 그랬고 당명오가 그랬듯.
독공의 고수를 승복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결국 그가 갈고닦아온 독을 파훼하는 것이다.
“기실 썩 자신은 없소만… 뭐, 이 이상 무의미한 치고받기를 반복하는 것보다야 외려 빠를 것 같구려.”
훗, 이벽은 웃었다.
심독을 극복해낸다.
어떤 의미로는 이대로 접전을 이어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허나 또한 생각했다.
혜공선사는 세월을 내어주었고, 그 결과 이벽은 지닌바 심공들을 하나로 묶어 적파직검과 만월무변곡검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열흘 간의 참선은.
말 그대로 ‘압축된 세월’과 같았다.
그 세월이 독왕의 절기와 마음속에서 부딪혔을 때,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쉬이 밀리지만은 않을 터였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내가 노야의 심독을 이겨내고 스스로 눈을 뜬다면 그때는 나와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를 나눠주시겠소?”
“…자네, 아직까지도 그런 얘길―”
“딱히 내 말만을 일방적으로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오. 노야의 말마따나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면… 알고 계신 걸 좀 가르쳐줘도 되지 않소?”
또한.
어떻게든 당평세와 대화를 열 수 있다면… 충분히 감안할 만한 위험이기도 했다.
“…….”
당평세는 잠시 침묵했다.
후우,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어차피 의미 없는 약속이 될 테지만 말일세.”
“감사하오, 노야.”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오고 갔다.
이내 노소 간에 복잡미묘한 미소가 스쳤다. 이토록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도 흔치 않을 터였다.
“거듭 말하지만 제발 무리하지는 말게. 결코 버텨볼 만한 고통이 아닐걸세. 자칫하면 죽지는 않더라도 심마가 끼어 광인이 될 수도―”
“잘 알겠으니 얼른 하시오. 피차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지 않소?”
“…후우.”
톡.
다음 순간.
마침내 독왕의 암기가 이벽의 미간을 두드렸다. 허나 전혀 날카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이마에 와닿은 듯한 감각이었다. 허나.
우우우웅.
다음 순간.
이벽의 상단전이 격하게 진동했다. 이 순간, 수천수만의 목숨마저 가볍게 앗아갈 만한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풀썩.
그리고 이벽은 주저앉았다.
동시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부르르르.
경련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와 동시에 뼈마디가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고통에는 익숙하다 못해 찌들다시피 한 이벽이었으나, 이내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듯한 비현실감이 엄습했다.
우우우웅.
다시 선천의 힘이 진동했다.
어둠 속에서, 이벽은 가까스로 의식을 붙들었다. 허나 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심독에 맞서 선천의 힘이 움직임과 동시에, 이미 접전 중에 몸 안에 스며들었던 독기 역시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심독과 무형지독.
상단전과 하단전.
두 갈래 선천의 힘이 각자의 독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 * *
당가의 대문 밖.
그곳에는 여전히 백 명을 거뜬히 넘기는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든 채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당가를 따르는 남서지역 무가의 무인들로, 모두가 남궁세가의 괴멸, 그리고 비룡대주의 행보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한달음에 몰려든 것이다.
허나 그러한 머리숱이 무색하게도 장내에는 퍽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모든 면면에는.
창백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당도한 비룡대주 이벽이 대문을 지나 당가의 내부로 들어간 지도 어느새 두 시진 가까이가 흘렀다.
그리고.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 너머에서는 흡사 천지를 찢어발기는 듯한 충격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굉음과 전해지는 기세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들 간의 충돌이 시작되었음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허나.
소란은 돌연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느덧 한 시진 가까이 당가의 안쪽에서는 고요한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꿀꺽, 무인들은 침을 삼켰다.
어쨌거나 소란이 가라앉았다는 것은 무언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당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또한 굳게 닫혀있는 그 문을 바깥에서 먼저 두드려 볼 용기를 지닌 사람 또한 없는 듯했다.
침묵 속에서 식은땀만이 흘렀고, 이내 서서히 해가 저물며 찬바람이 무인들의 몸을 차갑게 식혀놓았다.
끼이익, 쿠웅.
허나 그때였다.
마침내 대문이 움직였다.
“……!”
일제히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문 너머로 한 명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퍽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어찌 되었건 그 중년인의 정체를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당대의 당가주.
십절군자 당명오였다.
“가… 가주님!”
“어, 어떻게…!”
“…우리 당가를 염려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한달음 만에 이 자리에 모여주신 뭇 동도들의 의기에는 내 가주로서 감사를 표하겠소.”
꾸벅, 당명오가 허리를 숙였다.
“허나… 모든 위기는 끝났소.”
“……!”
“본가의 선대 가주께서 몸소 놈을 상대하셨고… 더는 우리의 안위를 위협할 이는 어느 누구도 남아있지 않소.”
“도… 독왕께서 친히……!”
“여, 역시 그랬구려!”
여기저기서 탄성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거운 공기가 삽시간에 걷혀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어찌 되었건, 독왕의 존재는 그 이름만으로도 의혈맹 남서쪽의 무가들에게 있어선 가히 절대적인 존재감을 지니는 것이다.
슥, 저벅.
허나 그때였다.
돌연 한 명의 인영이 무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앞으로 나섰다. 성큼성큼 당명오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팽 대협, 오랜만에 뵙는구려.”
당명오가 말했다.
말마따나 등 뒤로 커다란 도를 비껴 멘 사내의 정체는 팽가의 실세이자 참마대의 대주인 참마일도 팽무옥이었으며, 당명오와는 초면이 아니었다.
허나.
당명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또한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못 본 사이, 얼굴은 해쓱해졌으며, 기골이 장대하던 체구 역시 다소 움츠러든 듯했다.
슥, 팽무옥이 포권을 했다.
“…당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나 역시 반갑소, 대협. 헌데 내게 달리 무슨 용건이 있으시오?”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비룡대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당명오의 미간이 흔들렸다.
팽무옥이 재차 허리를 숙였다.
“물론, 가주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놈은 우리 의혈맹의 철천지원수가 아닙니까? ‘위협이 끝났다’는 말만으로 선뜻 돌아설 수는 없는 본가의 입장을 헤아려주십시오.”
당명오는 잠시 침묵했다.
희미한 기척 속에서, 마주한 팽무옥의 변화는 비단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가 아님을 이해했다.
서서히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래, 어떻게 해주길 바라오?”
번쩍.
팽무옥의 눈이 붉은빛을 내었다.
“놈의 시신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요. 어려울 것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