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81)
389화. 다섯 명의 천마 (1)
“그래, 송구한 일이오만… 사실 은 이 늙은이 역시 천마의 씨앗이 심어진 몸이라오.”
노승, 혜공선사가 말했다.
“오늘날까지 각각 정체를 숨기고 있던 다른 ‘네 명의 경쟁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지.”
터어어엉.
그 순간, 혜공의 등 뒤로.
네 개의 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혜공의 왜소한 어깨 너머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관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나무처럼.
모든 관들은 반듯이 세워져 있었으며, 굳게 닫혀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시신’들의 정체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물론.
아무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현재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이곳 숭산의 봉우리는 실재하는 장소를 본따 만들어진 진법의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전부 노인의 마음대로일 터였다.
다시, 이벽은 혜공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노인이 환야와 동일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진법을 펼칠 수 있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 나아가서는.
노인은 ‘정도맹의 비장의 무기’로서 권왕과 의혈맹을 제압하기 위한 만류일원진을 설치했다.
허나 조금 전.
월향이 음공을 펼친 순간, 진법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 반응하며 권왕과 혈마, 그리고 이진천의 시신을 일으켜 세웠다.
즉, 애당초 처음부터.
만류일원진은 그와 같은 ‘뒷면’을 숨기고 있었으며, 월향의 배후에 있었던 것 또한 눈앞의 노인이었던 것이다.
이내 이벽은 이해했다.
월향이 말한 ‘천하만민을 구원으로 이끌 천마’라는 것은 결국 송영영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환야였다.
“…….”
허나 그 말인즉슨.
눈앞의 노인은 스스로가 송영영에게 ‘죽임을 당할 것’조차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흘흘.”
혜공이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이벽은 대체 어디서부터가 노인의 계획이었던 건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면 선사께서는… 오 년 전 그때부터 이미 나를 이용해왔던 셈이군.”
분명한 것은 자신 또한.
그 계획의 ‘장기말’이었다.
과거, 혜공은 이벽에게 ‘영웅’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며 혈교의 자취를 뒤쫓게 했으며.
또한 스승의 원수인 혈마를 쫓아 무림으로 돌아온 이벽에게 ‘깨달음’을 전수해주며 의혈맹이 마교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부정하지는 않겠소. 흘흘!”
“…….”
이벽은 다시 침묵했다.
말인즉슨 당금의 천하무림 뒤에 숨어있을 뿌리 깊은 어둠에 대해 경고하던 본인이 바로 그 어둠의 한 갈래였던 것이다.
“허나 물론… 내게도 그래야만 할 이유는 있었다오. 또한 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시주를 이 자리로 부른 것이고 말이오.”
“…그저 나를 이용해 ‘경쟁자’들을 끌어내려 한 것이 아니오? 내가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소?”
허나 이내 이벽은.
그 이상 생각해본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금 단순해졌다.
상대는 많은 것들의 원흉이며.
또한 현재, 검은 불꽃으로 말미암아 송영영의 몸을 안쪽에서 차지하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벨 수 있나?’
고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진법 안의 공간이며, 상대는 육신을 지니지 못한 허상에 불과하다. 허나.
형체가 있건 없건.
낙검이 벨 수 없는 것은 없다.
또한 이 진법은, 그리고 그러한 진법을 이루고 있는 마기(魔氣)는 노인의 정신이 깃든 본체였다.
고로 베고자 한다면.
능히 가능할 터였다. 허나.
후룩.
노인이 두 손으로 찻잔을 들이켰다. ‘비어있어야 할 오른손’이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에 붙어있었다.
“흘흘, 그야 시주의 입장에선 악적이며 원수에 불과한 이 늙은이의 변명 따윌 들어줄 이유는 없겠지.”
그리고 다시 혜공이 말했다.
“허나… 애당초 이 늙은이가 이 몸에 눌러앉지 않았더라면, 외려 이 몸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을 거요. 물론, 시주의 입장에서야 선뜻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오.”
“…….”
“또한 시주께서도 이 모든 일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하여 이 늙은이가 육신을 잃고도 입멸하지 않고 이 안에 눌러앉아 있는지 퍽 궁금하지 않소?”
불현듯 이벽은.
과거, 소림에서 목도했던 혜공의 ‘황금빛 불상’을 떠올렸다. 그 쇠락한 육신에서 펼쳐졌던 등천의 경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벽이 겪어왔던 그 모든 절대자들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육신을 잃은 노인은, 외려 그렇기에 마기와 하나가 됨으로써 쇠락한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진심으로 싸우려 한다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애당초 노인 또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대뜸 진법 안으로 자신을 불러들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할 터이니… 시주께선 스스로 판단하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행하시면 될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오?”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시주께서는 이 늙은이를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시주의 선택에 따라서는, 이 ‘가엾은 몸’을 돌려드릴 의향 또한 있소이다.”
“……!”
“허나 내 이야기가 시주에 귀에 거슬린다면, 언제든지 칼을 뻗어 이 늙은 목을 쳐도 좋소. 흘흘!”
* * *
우우웅.
그 순간 공간이 진동했다.
이벽은 그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두 사람이 자리한 봉우리를 제외한 ‘주변의 풍광’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번쩍, 퍼어어억.
“커어억―!”
숭산 일대의 절경은.
삽시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변했다. 허나 그것은 제남에서 펼쳐지고 있을 ‘지금의 전쟁’이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는.
그 풍경은 엄밀히 말하자면 전장이라기보다는 외려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번쩍, 퍼어억.
‘단 한 명’의 인영에 의해.
무수한 이들이 죽어나고 있었다.
저벅, 퍼어억.
시커먼 영역으로 둘러싸인 인영은 마치 초원을 걷듯 전장을 거닐었고, 그 눈빛과 손끝이 닿는 곳마다 ‘검은빛’이 명멸했다.
번쩍.
“…커어억!”
그리고 빛이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목숨 한 개가 사라졌으며, 공격을 막아내기는커녕 최후의 단말마를 남길 수 있는 이들조차 소수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천하에 내린 재앙’이었다.
이내 이벽은 인영의 정체가 다름 아닌 오십 년 전, 중원을 짓밟았던 ‘바로 그’ 천마임을 직감했다.
또한.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처럼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은 오십여 년 전, 천마를 치기 위해 결성되었던 정사연합의 ‘최정예’ 고수들이었다.
후욱, 파라락.
“…아미타불!”
그때였다.
가사를 흩날리며 날아오른 인영이 천마를 향해 쇄도했다. 새파랗게 젊은 무승이었다. 허나.
우우우웅.
무승의 오른손에는.
성취를 증명하듯 찬란한 황금빛의 힘이 응축되고 있었다. 그 즉시 일권이 천마를 향해 뻗어졌다.
후우우욱, 퍼어엉.
번쩍, 콰아아아아아아앙.
허나 그 순간.
천마의 검은 빛이 마주 쏘아졌고, 두 빛은 허공에서 잠깐의 대치를 이루며 충돌했다.
아니, 그러나.
대치는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이내 황금빛은 산산이 흩어졌으며, 검은빛이 무승의 몸을 두드렸다.
퍼어억.
“커…어억―!”
그 즉시.
무승은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여타의 무인들처럼 즉사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순식간에 중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저벅.
그리고 천마가 다가섰다.
멀어져가는 무승의 의식이 천마의 흐릿한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의식이 끊겼다.
“…….”
그와 동시에.
일대는 어둠에 잠겨 들었다.
“내 오래된 기억이라오. 기실 ‘천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기도 하지. 흘흘.”
다시, 혜공이 말했다.
젊은 무승의 정체는 과거 소림 제일의 기재라고 알려져 있던 오십 년 전의 혜공선사였다.
말마따나.
혜공은 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고로 이벽 또한 갈등에 잠겼다.
허나 당장 눈앞의 혜공을 베어낸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송영영을 무사히 살려내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자신이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송영영의 몸을 돌려줄 수도 있다고 말한 노인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거짓이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로 이벽은 조금 더 부동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저 당시의 나는 스스로의 최후를 직감했소만… 뭐, 알다시피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소.”
다시 혜공이 설명을 이었다.
허나 그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천마가 그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려 아주 운이 나쁜 일이었다.
“…허억, 헉!”
얼마간의 사경을 헤맨 후.
다시 눈을 뜬 혜공은 놀랍게도 마교와의 전쟁이 정사연합의 승리로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뿌리 깊이 틀어박혀 있더군.”
“…….”
“시주, 혹 얼마 전 이 늙은이와 ‘혈마와 혈교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소?”
돌연 혜공이 질문을 던졌다.
이벽은 굳이 답을 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소림에서 혜공이 해주었던 이야기라면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혈마는 ‘타인의 몸으로 스스로의 경험과 기억을 전이시키는’ 저주받은 술법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술법을 통해 까마득한 세월 동안 수많은 몸을 갈아타며 사실상의 영생을 이어왔노라 하였다.
“그리고 백 년 전, 마교와 혈교는 세력다툼 끝에 하나가 되었지. 물론, 그 배경에는 ‘각자의 우두머리’가 한 몸으로 합쳐지는 비사가 있었고 말이오.”
또한 그 당시 혜공은.
그러한 ‘억측’을 이야기했었다.
즉, 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천마는 자신의 몸을 혈마의 ‘다음 육신’으로 제공하였고.
그 결과.
천마와 혈마는 ‘한 몸’이 되었다.
“…….”
그리고 이벽은.
노인이 스스로의 과거를 이야기하다 말고 돌연 혈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 당시, 천마는 혈마의 모든 것을 흡수했소. 물론, 혈마로서는 천마의 육신을 차지하려 했을 뿐, 설마 스스로가 천마의 정신에 ‘잡아먹힐’ 거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그리고 그 말인즉슨.
혈마가 지니고 있던 그 모든 사술과 지식들이 오롯이 천마에게로 전승되었음을 의미하며.
물론 그중에는 ‘몸을 갈아타는 술법’ 그 자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당황했지. 어찌 안 그럴 수가 있겠소? ‘죽었다’고 알려진 천마가… 내 머릿속에 버젓이 살아있었으니 말이오.”
툭툭, 노인이 머리를 두드렸다. 다시 이야기는 혜공 본인에게로 돌아왔다.
* * *
천마는 혜공을 죽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혈마의 기억으로부터 흡수한 ‘사술’을 이용해 스스로의 정신을 혜공의 머릿속으로 전이시켜 두었다.
또한 그 이유는 명백했다.
애당초 천마가 마교 세력을 이끌고서 중원무림을 친 것은 마교천하나 무림일통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스스로.
‘보다 강해지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미 천하제일인이었소.”
“…….”
“조금 전 보여드렸다시피… 천하를 통틀어 그의 단 한 수를 받아낼 수 있는 이조차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었지.”
말인즉슨.
‘더 강해질 여지’가 없다.
허나 그것은 ‘보다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온 천마에게 있어서는 외려 삶의 의미를 잃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천마는 중원을 쳤다.
그렇다고 한들, 자신과 대적할 수 있을 만한 맹적이 있으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나마 중원에서 찾고자 함이었다.
“…….”
그리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피가 흘렀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말하기 어렵소만… 그 과정에서 천마는 ‘원하던 가능성’을 찾고 말았소.”
정파 무인들 중에는 아주 드물게나마 천마의 일 수를 받아내는 이들이 없지 않았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물론, 천마가 아직 ‘익힌 적이 없는’ 정도의 무학이었다.
허나 맹점이 있다면.
이미 마도의 길을 통해 ‘무학의 끝’에 다다른 천마는, 그와 같은 정파의 가르침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다.
보다 엄밀히는.
그저 비급을 훑는 것만으로 모든 원리를 쉬이 이해해버릴 수 있었기에, ‘수련’과 ‘극복’을 경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 두 가지가 없고서는.
천마의 손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공은 결국 정파무공의 탈을 쓴 마공에 불과했다. 때문에.
“새파랗게 어린 몸으로 자신의 한 수를 버텨낸 소림의 후기지수를… 천마는 자신의 ‘다음 육신’으로 만들어버렸던 게요.”
혜공이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