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72)
74화. 남촌 피습 (4)
사패련의 친선 비무회는 이벽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물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허나 파란은 끝이 아니었다.
흑천방에 의해 비룡대 결성 과정에서 배제될 뻔한 이벽을, 무려 사패련주가 직접 나서서 비호한 것이다.
본래는 하오문의 후기지수로 알려져 있었으나… 속사정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이후 이벽은 비룡대주가 되었다.
“…….”
비룡대에 합류할 것.
차기 패권의 흐름을 살필 것.
그것이 본래 암영각주로부터 59호 공손수에게 내려온 임무였다.
그리고 흑천방과 해남을 비롯한 모든 세력들이 사패련주에 반발하여 련을 떠난 이후에도 그 명은 철회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졌다.
각주의 명령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녀의 친부이자 암영각의 2호인 공손욱은 다시 임무를 내렸다.
“가까이서 그 아이의 실력을 가늠해 보거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패련 비룡대의 이름으로 잔존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런 게 의미가 있나요?”
공손수는 회의적이었다.
단 한 명의 무력 따윈 거대세력의 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심지어는 고작해야 후기지수일 뿐이다.
“그래, 너에겐 그렇게 느껴지겠지. 패왕의 명성을 귀로 들었을 뿐,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니까.”
“…….”
“허나 때로는 단 한 명의 압도적인 힘이 산을 부수고 바다를 열어버리기도 하는 법이란다.”
그녀의 아버지는 쓰게 웃었다.
“세력 같은 건, 진정한 강자가 마음만 먹으면 의외로 얼마든지 손쉽게 모여드는 법이거든.”
“…하아.”
“천하십대고수의 무게란 그런 거란다. 어떠냐 수야, 할 수 있겠니?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네 아빠. 뭐, 어려울 것 없죠. 어차피 각주님 명령으로 붙어 다녀야 하는 처지인데 맹우강이나 파진성보다야 천만 배 낫네요.”
그렇게 공손수는 비룡대에 합류했다. 크고 작은 몇 개의 사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빠뿐 아니라 각주님 역시 패왕가라는 이름에 그만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두침침한 통로를 따라 걸으며 공손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
패왕가의 혈족도 아니며, 패왕가의 출신도 아니며, 패왕의 무공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단지 패왕가주의 비호를 받는 후기지수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암영각은 대세의 선택을 보류했다.
사자패왕 혁무련.
철탑패왕 혁군악.
이대에 걸쳐 암영각의 탑을 오르고 사파무림을 평정한 그 거인들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틀리지 않은 판단이었죠. 뭐,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요.”
“…….”
“오라버니와 함께 호남무림을 구해냄으로써, 암영각의 분위기 역시 조금씩이지만 저희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어요.”
패왕가를 지지하는 남촌은 중립을 지키던 두 마을 중 하나인 동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 임무는 실패했군.”
“…네, 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벽과 비룡대의 행보를 막아서고자 하는 흑천방의 의지는 명확했고, 결국 공손수는 판단했다.
후기지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암영각의 도움을 구하고 말았다.
“물론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연히 오라버니 탓은 아녜요. 무엇인가 제가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는 것 같고 또—”
공손수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북촌장 백룡강에게 패배했다면 어차피 의미가 없죠.”
각주가 의견을 보류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뜻과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그다음의 강자인 2호의 의견이 중요시된다.
“본래 3호였던 북촌장 백룡강이 2호가 되었다면… 그리고 다짜고짜 우리 남촌을 습격할 정도라면, 이미 흑천방 측으로 갈아타는 것에 각주님의 묵인까지 얻어냈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렇군.”
이벽은 이해했다.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간 자신과 함께해왔던 공손수의 행동 역시 납득이 갔다.
다만… 생각할 구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애당초 암영각주는 자신에게 무얼 기대했던 걸까?
정확히 무엇을 확인하고자 판단을 보류했는가? 약관도 되지 않은 자신에게 천하십대고수와 같은 ‘압도적인 힘’을 바랬던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로 이제는, 암영각이 흑천방 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는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일 그렇다면… 자신은 왜 지금 여기에 있지? 천소연은 정말로 어째서 자신들을 데리고 왔나?
“드디어 도착했네요.”
그때, 공손수가 말했다.
어느새 통로가 끝이 나고 눈앞에는 비교적 널찍한 공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상 상황을 대비해놓은 듯, 몇 가지 도구들과 소모품으로 보이는 자루들, 그리고 침상이 있었다.
스윽.
이벽과 공손수는 업고 있던 두 사람을 침상에 눕혀놓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듯했다.
다만 호흡은 편안하다.
마비는 풀려가고 있다.
“하아.”
그리고 두 사람은 주저앉았다. 침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란히 한숨을 내뱉었다.
툭, 툭.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간혹가다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오라버니, 몸은 좀 괜찮아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그리고 이벽은 깨달았다.
말마따나 긴장이 풀리자 곳곳에서 고통이 올라온다. 특히나 석등에 당한 복부는… 가볍지 않다.
“…으아, 이제 보니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났잖아요. 그 버러지 같은 삼촌이. 어디 한 번 봐봐요. 얼른요.”
“…….”
슥, 이벽은 상의를 벗었다.
반강제로 벗겨지다시피 했다.
“…세상에.”
천소진의 암기와 모래에 당한 무수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딱지가 되어 굳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부 전체에는 피멍이 들어있었다. 시커멓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움찔.
공손수가 손을 대자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벌떡.
공손수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의 이곳저곳을 살피다가는 자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이리 와봐요. 약 발라줄게요.”
금창약과 마른 천이었다.
이벽은 순순히 등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공손수의 손끝이 이벽의 몸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섬세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정말 미안해요, 오라버니.”
“그 얘긴 그만해도 될 것 같군.”
“…….”
툭,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공손수가 이벽의 복부에 천을 둘렀다. 이벽은 가슴께에까지 다가온 공손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삼스럽지만 앳되다.
문득, 왕수련이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나이의 소녀일 뿐이다. 무인과 무인으로서 동정은 의미없는 짓이겠지만, 조금은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왜 패왕가를 따르지?”
“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강자 우선의 원칙이 암영각의 철칙이라면.
패왕가가 위축되고 흑천방이나 해남검파가 치고 올라온 시점에서, 그를 따르면 그만이다.
각주의 명령은 둘째치고.
어째서 공손가는, 남촌은 패왕가의 끈을 이렇게까지 저버리려 하지 않는 걸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는 지금까지의 제 삶이 좋았거든요.”
이벽의 표정에서 질문의 저의를 이해한 듯, 공손수가 답했다.
“당장 흑천방에 편승한다면 마을들끼리 싸울 일도 없으니 편하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요?”
“…….”
“흑천방주 맹철극은 결코 사파에 군림하는 것에서 멈추지는 않을 인물이에요. 정파와 대립하고, 적극적으로 무림을 어지럽게 만들어 기회를 엿보겠죠.”
목소리는 퍽 확신에 차 있었다.
“그거 아세요? 우리 암영각은 본래 사패련에 가맹하기 전까지는 무려 살수집단이었어요.”
“…그렇군.”
“허나 패왕가가 사파를 잡고 군림함으로써, 사파무림에는 평화 비슷한 게 깃들었죠. 패왕가의 그림자가 된 우리 암영각도 함께요.”
꾹, 공손수가 천을 묶었다.
“그리고 저는… ‘살수’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 * *
대강의 처치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잠시 숨을 돌렸다.
“이곳이라면 당장의 추적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고 나서가 문제겠지만요.”
공손수가 말했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동 안쪽에는 이벽과 공손수가 지나온 통로 외에도 몇 군데의 통로가 더 뚫려 있었다.
이곳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했던 경로를 생각하면 분명 추적은 쉽지 않을 터이다.
“일단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이곳에 있기로 해요. 오라버니도 잠깐 정도는 눈을 붙이세요.”
“…그러지.”
이벽은 순순히 답했다.
상처는 위중하지는 않았으나, 무시할 수준 역시 아니다. 혹사된 몸은 여차할 때 움직임이 무뎌진다.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내 조금씩 피로가 밀려왔다.
허나 잠에 빠져드는 대신 이벽은 눈을 감고서 내기를 다스리는 것에 집중했다.
우웅.
선천의 힘이 일었다.
복부 부근을 맴돌며 상처 입은 기혈을 어루만진다. 시시각각 내상이 눈에 띄게 아물기 시작했다.
새삼 놀라운 공능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다스리는 가운데, 이벽은 조금씩 시간을 잊어버렸다.
툭, 퐁당.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허나 이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부글부글.
떨어진 물방울이 모여든 웅덩이에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화아악.
급격히 수증기가 퍼졌다.
아니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다. 매캐한 냄새가 밀폐된 공동 안에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 독이에요!”
번뜩, 이벽은 눈을 떴다.
공손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 즉시 눕혀놓은 파진성과 언미희를 향했다.
화아악.
허나 그보다 독이 빨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저곳의 물웅덩이에서 독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큭, 콜록!”
공손수가 기침을 했다.
우우웅.
이벽에게도 독기가 스며들었다. 위협을 감지한 선천의 힘이 성난 듯이 몰아친다.
‘…독하다.’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마치 기혈에 달라붙듯 불쾌한 끈적함은 선천의 힘으로도 쉬이 떼어지지 않는다.
“오라버니! 어서 밖으로—”
“…아니, 이미 늦은 것 같군.”
쿠웅, 쩌저적.
그때, 공동 안에 진동이 일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천장에 균열이 일었다. 이내 한 부분이 무너져내리며 인영 하나가 가볍게 착지했다.
탓.
“하! 그래, 칭찬해주지 낙검신룡. 머리는 제법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이 몸의 독을 마셔버린 시점에서 도망은 무의미하거든.”
“…….”
단도를 든 젊은 사내였다.
짐작건대 서른 전후.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매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감돌고 있다.
훅, 시선이 공손수를 향했다.
“이런, 오랜만이구나 수 매. 얼마 못 본 사이 쑥쑥 자라서 완연한 여인이 되었어.”
“…백룡일.”
시선은 끈적했다.
큭, 공손수가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떻게 여길?”
“뭘, 이 오라비에겐 이 정도 추적이야 쉬운 일이지. 제법 잘 만든 은신처긴 하지만 땅속에서 마비향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니?”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후훗, 방심했구나, 수 매. 하여튼 무능한 서촌 놈들 때문에 흙 파느라 고생 좀 했지만… 다행히 보람은 있군.”
사내가 입술을 핥았다.
“…….”
이벽은 공손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호의를 지닐만한 상대는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독은 ‘진짜’다.
즉사에 이르는 치명적인 독은 아닌 듯하지만… 선천의 힘으로 태워버려도 그 즉시 다시 몸을 파고들었다.
공손수 역시 안색이 좋지 않다.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언미희와 파진성의 안색이 파리해지고 있다.
“공손수, 해독할 수 있겠나?”
“…죄송해요. 확신은 못 하겠어요.”
“흥, 수 매, 잘 알고 있잖느냐? 공손가의 해독약 따위로는 우리 백가의 독을 해독할 수 없음을.”
“…….”
공손수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이 오라비가 설마 사랑하는 수 매를 해치겠느냐? 그래, 우선은 ‘잘못 사귄 친구’들을 처리한 후에 얘기하자꾸나.”
이벽은 사내를 향했다.
“그렇다면 즉, 너는 해독제를 가지고 있단 뜻이로군.”
“흥, 글쎄?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어쩔 셈이지?”
철컥, 이벽은 검을 잡았다.
“하! 허세를 부리는군. 억지로 움직여봤자 네놈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만 갉아먹을 뿐이란 걸 모르겠나?”
“오, 오라버니 잠깐—”
“어, 수 매? 지금 뭐라고?”
번뜩, 사내의 눈이 일그러졌다.
“설마…, 지금 혹시 저놈을 가리켜 ‘오라버니’라 불렀나? 아니지?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