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84)
87화. 도주 (1)
“글쎄요, 송구합니다만 의혈맹이 왜 그렇게까지 소협을 원하는지는 저로서도 아는 바가 없군요.”
제갈성이 말했다.
“하지만 팽가를 비롯해 인근의 무가들이 이번 임무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압니다. 때마침 황보세가와 ‘핏줄’을 엮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
요지는 이러했다.
의혈맹은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당대 황보세가의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다.
당대의 가주인 권왕(拳王) 황보혁은 채 오십도 되지 않은 나이로 당당히 천하십대고수의 일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의혈맹주이기도 하다.
그 위세 앞에서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남궁이나 당가마저도 다소 빛이 바래는 입장이다.
헌데, 그러한 황보혁의 막내딸이 때마침 혼기가 찼다.
그리고 때마침 호북에 발을 들인 사파의 어린 수괴 비룡대주 이벽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 의미는 퍽 의미심장했다.
“즉, 공을 세워서 눈에 띄면, 황보세가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게 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
황보세가와 피를 섞는다.
그것은 핏줄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무림세가, 그리고 의혈맹의 특성상 단순한 혼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혈맹’이 되는 것이다.
“뭐, 남궁이나 당가, 모용은 굳이 나서지 않는 것 같지만… 오대세가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치고 있는 저희 제갈가는 체면이나 차리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단 거지요.”
그것은 퍽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좌우간 한시바삐 이 호북을 벗어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별별 무가들이 중원 전역에서 꾸역꾸역 몰려들 테니까요.”
제갈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꾸벅,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언젠가 이 신세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철면개의 몽둥이에 찜질을 당해 팅팅 부은 몸을 절뚝거리며 제갈성은 사당을 떠났다.
퍽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헌데 정말 저대로 그냥 보내줘도 되는 건가? 비룡대주의 뜻이라지만 영 찜찜하구만 그래.”
철면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괜찮을 거예요. 그러한 상황이라면 다른 세가가 공을 세우게 돕는 건 제갈세가에는 오히려 안 좋은 일일 테니까요.”
공손수가 답했다.
“뭣보다 가뜩이나 무력에서 열세란 평을 받는 제갈세가인데, 오라버니에게 깨졌다는 걸 굳이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죠?”
“쩝, 듣고 보니 그렇긴 하구먼.”
그리고 철면개와 비룡대 일행은 그날 하루를 사당에서 묵었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황은 예고도 없이 급박해졌다.
허나 이대로 하남까지 강행군을 달리기엔 파진성의 부상이 문제였다.
상처는 결코 얕지 않았다.
그저 응급처치를 마쳤을 뿐, 가능한 한 빨리 의원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고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다시 길을 돌려 강서, 혹은 호남으로 돌아가거나 그도 아니면 이 호북땅에서 의원을 찾아가거나.
거리를 생각했을 때는 돌아가는 쪽이 빠르겠지만, 수배령이 떨어진 이상 배 위에서 습격을 당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옆 도시에 성가의방이란 곳이 있네. 우리 개방과도 친분이 있으니 일단은 그쪽으로 향하는 게 어떤가?”
“…….”
철면개가 말했다.
물론 위험부담이 없지는 않다.
허나 일단 그곳까지 도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비교적 안전한 상황이 될 것이다.
정사를 막론하고 언제나 의원의 신세를 지게 되는 무림인 특성상 의가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강호무림 내에서의 철저한 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냥 안심하고 있다간 적들에게 둘러싸여 버리겠지만… 약간의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사이에 개방과 소림으로부터 원군을 불러들일 수 있다.
일행은 철면개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케헤, 의원은 무슨 얼어 죽을! 살갗 좀 긁혔다고 일일이 의원 찾다간 무림인 어떻게 해 먹냐?!”
이튿날, 의식을 차린 파진성이 다짜고짜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파진성, 무리할 필요는 없다. 급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 우선은 상처를 다스린 후에—”
“야, 대주. 아니, 이벽.”
“뭐지?”
덥석.
파진성이 이벽의 멱살을 잡았다.
“빡치는 소리 하지 마라. 앙?”
“…….”
“내가 짐꾼을 했으면 했지 또다시 짐짝이 되는 꼴은 죽어도 못 참는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네놈한테 지켜지는 게 내 역할이냐고? 앙?”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파진성이 화를 내고 있다. 목소리에는 전에 없이 진심이 담겨있었다.
“잔말 말고 그냥 가던 길 가자고. 나 괜찮다니까? 소림인지 나발인지, 가서 땡중들이랑 술이나 한잔하면 다 나을 거라고.”
저벅저벅.
그때, 공손수가 나섰다.
파진성에게로 다가간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이내 냉막한 시선으로 파진성을 마주했다.
“케케! 잘 있었냐 쥐방울?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이라면 안 해도 된다. 어디 허약한 게 뱃멀미나 해대고—”
짜악!
공손수가 파진성의 뺨을 때렸다.
“…뭔 짓이야 이런 씹—”
짜악! 짜악!
짜악! 짜악!
짜악! 짜악!
파진성이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공손수의 손이 작렬했다. 파진성이 저항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짜악!
공손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황망함 속에서 이벽은 문득 거지꼴의 파진성을 비룡대원으로 받아들였던 첫날을 떠올렸다.
그때에도 지금과 같았다.
‘아니… 어쩌면 같지 않다.’
짜악! 짜악! 짜악!
“컥, 커헉, 컥!”
“그, 그만해요, 소저!”
보다 못한 언미희가 나서서 공손수를 뜯어말렸다. 그제서야 손이 멈추었다.
“아, 아프다고 씨바……!”
“아파요? 그럼 죽어요.”
“…….”
“말 안 들을 거면 죽어요, 그냥. 어차피 병든 채로 업고 가나 시체로 업고 가나 우리에겐 다를 게 없으니까.”
공손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파진성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그래도 내가 너 감싸려고 대신 이 꼴 났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누가 지켜달래요? 내가 짐짝이에요? 내가 파 소협한테 지켜지려고 여기 있어요?”
“…어.”
일순 파진성의 얼굴이 띵해졌다.
“잘 들어요. 칼 맞아도 내가 맞고 죽어도 내가 죽어요. 나대지 마요. 그리고 다쳤으면 말 좀 처들어요.”
“…….”
“아오, 이걸 진짜 그냥 확!”
* * *
일행은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성가의방이 자리한 감리현으로, 본래 나흘이면 족히 도착할 만한 거리에 해당했다.
허나 의혈맹의 여러 세력들이 눈에 불을 켜고서 일행을 노리고 있는 이상 여정은 은밀해야만 했다.
자연히 길은 험악해졌다.
때로는 절벽과 같은 산길을 넘어서기도 했고, 허리를 넘나드는 하천을 맨몸으로 건너기도 했다.
멀쩡한 이에게도 힘든 길이다.
하물며 중상을 입은 파진성에게는 더욱 고될 수밖에 없다.
“케… 케헤헤, 시원한걸?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야. 해남의 사나이에게 물이란 나고 자란 고향과 같지. 암!”
“…….”
불가에 앉아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파진성은 허세를 부렸다.
일행은 이벽이나 철면개의 등에 업히기를 권했지만, 파진성은 단호히 거부했다.
의원을 찾아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로 ‘짐짝’이 되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 말은 잘하네. 하기는 생긴 게 물고기를 닮긴 했죠. 빨리 물로 돌아가던가 불에 구워지던가 하면 좋을 텐데.”
“…….”
휙, 공손수가 불 속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한 마디를 흘렸다.
파진성의 충혈된 시선이 대번에 공손수를 향했다. 그러나 공손수는 아는 체조차 하지 않는다.
“…저 두 사람, 괜찮을까요?”
언미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파진성이 부상을 입은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정 내내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제대로 된 대화는 전혀 오고 가지 않았으며, 지금처럼 시선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요.”
그러나 이벽은 생각했다.
두 사람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이벽은 오히려 이전보다 단단하게 엮인 끈의 존재를 느꼈다.
과거 혁대웅이 범을 상대로 시간을 끌려다 중상을 입었던 때를 떠올렸다.
제갈소미는 벌컥 화를 내었다.
신뢰란 때때로 서툴게 표현된다.
“…헹, 싹퉁머리하고는.”
드잡이할 기운도 없다는 듯, 파진성이 불가에 드러누웠다.
좌우간에 본인이 주장하는 것만큼 파진성의 몸이 그리 괜찮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제갈성이 남긴 말마따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뒤를 쫓는 적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버틸 수만 있다면,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갈 길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행은 강행군을 계속 이었다.
여정은 고되었으되, 다행히도 그 이상 적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부랴부랴 호북으로 모여든 개방의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의혈맹의 무사들과 충돌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일행을 쫓는 의혈맹의 여러 세가들이 좀처럼 서로 협력을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야 황보세가의 막내딸은 한 명뿐이니, 섣불리 공을 나눠가질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호북 지역 내에서 비룡대의 행보에 관해 중구난방의 헛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하오문의 교란 공작이었다.
비록 사파무림 내에서처럼 세가 강하지는 않더라도, 이곳 호북 땅을 비롯해 하오문도는 천하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다.
개방과 하오문.
강호를 대표하는 이대 정보 세력인 합심하여 혼선을 유도하자 이내 누구도 그들을 추적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칠 주야가 지나갔다.
일행은 마침내 감리현 인근까지 다다랐다.
터벅, 터벅.
“헤, 헤헤, 케헤헤…….”
“…….”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파진성이 또다시 저만치로 뒤처져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세기도 어렵다.
파진성은 절대로 아픈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차마 모른 척해주기도 어려울 만큼 상태가 안 좋아졌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달아오른 열로 후끈함이 느껴질 지경.
더 이상은 무리다.
“업혀라. 파진성.”
“시, 싫다. 소, 손대지 마라.”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군.
이벽이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
뻐억—!
“케헥.”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파진성의 신형이 주르륵 허물어졌다.
어느새 공손수가 파진성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목덜미를 두드려 기절시킨 것이다.
쓰러지는 파진성을 공손수가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에효, 이 등신 머저리.”
“…….”
“얼른 가죠, 오라버니. 이 성가신 짐짝은 제가 업을게요.”
“괜찮겠나?”
“그럼요. 걱정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신법 하나는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안 뒤처질 자신 있으니 서둘러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