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3
1013회. 엘리오 경은 귀관의 기사다
천막 안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기사들 모두 야인족 출신 신입 기사 엘리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인생의 목표가 봉작(封爵)인 기사들에게 명분 없는 싸움은 가장 기피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파비안이 기절한 순간 엘리오는 막사의 최강자로 군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분이야 만들면 된다지만, 능력이 안 되다 보니 박힌 돌들이 굴러온 돌의 눈치를 볼 수밖에.
기사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검의 손질에 매달려 있을 때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저녁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파비안을 연적하가 불러 세웠다.
“어이. 무슨 소리야?”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한참 동안 홀로 속앓이를 하던 파비안은 머뭇거림 끝에 경칭을 사용했다.
“그럼 같이 가야지. 나는 뭐 사람 아니야?”
말과 함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뻘쭘한 얼굴로 기다리던 파비안은 엘리오가 다가오자 얼른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파비안은 본의 아니에 엘리오와 나란히 걷게 됐다.
그런 파비안을 향해 엘리오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식당이 있는 거냐? 아니면 가져다 먹는 거냐?”
“기사 식당은 따로 있고, 평민은 배식만 해 줍니다.”
“요리는 잘 나오고?”
“아무래도 집에서 먹는 것만은 못하죠.”
“주로 뭐가 나오는데?”
“빵과 치즈, 햄, 스프죠.”
“치즈, 햄 그게 뭐야?”
“모르십니까?”
파비안은 엘리오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엘리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다른 건 몰라도 햄은 야인들에게서 유래된 건데…….’
야인 주제에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치즈는 양젖을 발효시킨 거고, 햄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였다가 훈제한 겁니다.”
“아하. 양젖과 돼지고기라는 거네?”
“안 먹어 보셨습니까?”
“비슷한 건 먹었을 거야.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비슷하니까.”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의 눈에 강호와 구주, 로디나 대륙의 인간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 비슷한 음식을 어딘가에서 먹어 봤으리라.
연적하가 몇 가지를 더 묻고 파비안이 답하는 사이 ―기사들의 식당으로 사용 중인― 대형 천막에 도착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연적하는 파비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야인을 싫어하는 파비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엘리오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끝내 식사 자리에서 엘리오와 마주 앉게 된 파비안은 체념한 얼굴로 묵묵히 빵을 뜯어 스프에 적셔 먹었다.
연적하는 작정한 듯 파비안이 먹는 걸 따라 했다.
잠시 후 파비안은 빈 식기를 반납하고, 광주리에 담겨 있는 밤톨만 한 갈색 덩어리 몇 개를 챙겼다.
“그건 뭐냐?”
“기사들에게 지급 되는 에너지 볼입니다.”
“에너지 볼?”
“커피 열매와 곡물, 동물 비계를 갈아서 뭉친 식량입니다.”
“그걸 왜 챙기는데?”
“마수가 식사 시간이라고 기다려 주지는 않잖습니까.”
“아! 그렇구나.”
연적하는 ‘에너지 볼’이 무림에서 사용하는 벽곡단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에너지 볼을 한 움큼 집어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구니째로 마하담(공간 창고)에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파비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많이 챙길 필요는 없습니다. 요리사들이 매일 새로 만들어서 내놓기 때문에…….”
“이걸 매일 만든다고?”
“병영에서 고기를 많이 먹으니까요. 그때 나오는 비계를 모아 에너지 볼의 재료로 씁니다.”
“아하. 그런데 이건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는 거야?”
“바짝 말린 걸 보관만 잘하면 반년은 갑니다.”
“이건 아침에 만들었으니까 아직 안 마른 거지?”
“그래서 맛도 훨씬 좋습니다. 몇 달 지난 건 진짜 살기 위해서 먹는 거지 못 먹습니다.”
“많이 쌓여 있는데 높으신 분들은 이걸 안 먹나 봐?”
“작위를 받으신 분들의 에너지 볼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달라?”
“거기엔 꿀이 첨가되어 맛도 영양도 훨씬 뛰어납니다.”
“와아! 작위가 좋네.”
연적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벽곡단 한 알에도 신분에 따라 첨가물이 달라진다니!
파비안이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다른 귀족들은 줘도 안 먹는 에너지 볼에 저렇게 감동하다니.
야인 출신이라는 점만 빼면 나름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래도 함께 식사를 한 때문일까?
막사로 돌아가는 파비안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엘리오 경은 왜 영지병에 지원했습니까?”
그는 다른 기사들처럼 엘리오도 작위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나? 싸우려고.”
“…….”
뜻밖의 대답에 파비안은 한순간 멍한 기분을 느꼈다.
“봉작(封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싸움이 목적이라는 겁니까?”
“어.”
“야인들은 전부 경처럼 호전적입니까?”
“여기서 야인이 왜 나와? 내가 그렇다는 건데.”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베르나르도 후작령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목적은 베르나르도 후작령이 아니라, 이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 데 있었다.
“역시 생각부터가 남다르십니다. 엘리오 경이 왜 그렇게 강한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파비안은 엘리오를 싸움에 미친 야인으로 여겼다.
“…….”
어딘지 의미심장한 말에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인지, 비웃는 건지 모를 발언이다.
천막 앞에서 문득 연적하는 베르나르도 후작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아까 후작은 저녁 식사 후에 찾아오라고 했었다.
“참, 후작님의 천막에 귀족들이 자주 모이냐?”
“저녁 식사 후에 종종 커피 타임을 갖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커피? 에너지 볼의 그 커피를 먹는다고?”
“먹는 게 아니라 물에 타서 마십니다. 심신을 지치지 않게 해 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그래? 알았다.”
연적하가 돌아서자 파비안이 급히 물었다.
“혹시 후작님의 커피 모임에 가려는 겁니까?”
“어, 왜?”
“거기는 작위를 받은 분들만 참석이 가능합니다.”
“나도 곧 받을 거야. 커피는 맛있냐?”
“그냥저냥 먹을 만합니다. 그런데 작위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어, 후작님이 조만간 받게 해 준다고 했는데, 왜?”
“아, 아닙니다. 잘 다녀오십쇼.”
당황한 파비안은 잘 다녀오라는 인사까지 건넸다.
“그럼, 이따가 보자.”
연적하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엘리오를 보던 파비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입영한 지 하루 만에 작위라니.
자신을 어린애 다루듯 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나이를 생각하면 그에게 꿀릴 것은 없다.
4년 후에는 자신도 그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강한 기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파비안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막사.
연적하는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후작의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로 다가갔지만 친위대 병사들은 처음처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마커스는 담담한 얼굴로 묵례를 하기까지 했다.
방문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도 알 수 있는 법.
그들의 그런 태도는 베르나르도 후작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연적하는 병사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가 입장하자 천막 안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불렀다.
“이리 오게.”
연적하는 후작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군용피복(軍用被服)도 지급하지 않았군. 그거야 뭐, 지휘관이 차차 챙겨 주면 되겠지.”
그러고는 이내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주목해 주시오. 여러분들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기사를 소개해 주겠소. 이 젊은 기사의 이름은 엘리오 라고아요. 오늘 전하께 남작의 작위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니, 머지않아 작위가 내려질 것이오. 지금은 소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니, 소위라 생각하고 대해 주면 되오. 엘리오 경,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게.”
그가 야인 출신이라는 건 어차피 알려지게 될 일, 베르나르도 후작은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 요청에 당황할 법도 한데 연적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산의 부족’ 출신인 엘리오 라고아입니다. 편하게 엘리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채찍질을 해서라도 잘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시오[指導鞭撻].”
아티팩트의 직역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야인 출신임을 알게 된 귀족들은 흠칫 놀랐지만 이어지는 채찍질 소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노예도 아니고, 기사에게 누가 채찍질을 한단 말인가.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말했다.
“채찍질이라니. 엘리오 경은 성벽(性癖)이 독특하군. 우리야 이해하지만 다른 자리에 가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여담이네만 맞는 걸 좋아하나? 때리는 걸 좋아하나?”
순간 귀족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연적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쓰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오스카 아비드 자작에게 말했다.
“당분간은 오스카 경이 엘리오 경을 맡아 주시오.”
귀족 간에 이름만 부르는 것은 결례지만, 때로는 친밀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편안한 표정을 보면 후작과 그의 관계는 꽤나 좋아 보였다.
“알겠습니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즉시 한 사람을 호명했다.
“데니스!”
그러자 귀족들 속에서 낄낄거리던 데니스 로빈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엘리오 경을 데리고 가서 잘 가르쳐 주도록.”
데니스 로빈 남작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데리고 갑니까?”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더 볼일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데니스 로빈 남작에게 말했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엘리오 경은 귀관의 기사다. 무슨 뜻인지 잘 알 테니 잔소리는 하지 않겠다.”
데니스 로빈 남작이 확인하듯 슬쩍 물었다.
“엘리오 경을 제 아래에 둔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엘리오 경은 곧 남작이 될 텐데요?”
데니스 로빈 남작은 중위다.
한 개의 중대에 중위는 하나인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남작이 되기 전까지 데리고 있으란 소리다. 작위를 받게 되면 엘리오 경의 재배치가 이루어 질 것이다.”
“송구하지만 다시 여쭙겠습니다. 조금 전 자작님께서 ‘엘리오 경은 귀관의 기사다’라고 하셔서요. 엘리오 경이 작위를 받기 전까지 저의 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데니스 로빈 남작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당사자들 앞에서 지휘권을 확실하게 해 달라는 소리였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인 베르나르도 후작이 엘리오에게 벌써부터 남작 대접을 하니 상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데니스 로빈의 편이었다.
어쨌든 작위란 국왕의 심중에 달린 것이라, 봉작을 받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나. 작위를 받기 전까지 엘리오 경은 자네가 거느린 기사 중에 하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엘리오 경, 자네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연적하는 아무래도 상관없기에 흔쾌히 답했다.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