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36
1036회. 그들은 중립적이라네
엘리오의 제안에 기사들은 일제히 파비안을 보았다.
파비안이 비록 천재 소리를 듣고 있지만 엘리오가 도달한 검술 경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파비안 역시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명예로운 기사다.
종자(從者)도 아닌 그가 엘리오 밑에서 3년간이나 검술을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겠습니다.”
파비안이 결연한 어조로 답했다.
그가 타메이온에서 본 엘리오의 검술을 떠올리면, 종자니 기사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엘리오와 파비안은 각각 검술과 글자를 상대에게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다.
***
다음 날.
코드란테스 백작가가 주둔지로 내려오고 푸토코아 백작가가 사흘간의 균열 감시 임무에 투입됐다.
그 덕분에 푸토코아 백작가와 엘리오의 갈등은 자연스럽게 봉합이 되었다.
주둔지 귀족들의 관심은 엘리오와 푸토코아 백작가의 싸움에서 제국의 코르보 마법 병단으로 옮겨 갔다.
7서클의 대마법사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과 마법 병단을 호위하는 기사단의 미녀 기사 애슐리 넬슨 남작이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
그만큼 히르헤라 주둔지는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에스카토스 왕궁의 2개 기사단과 북방 3개 영지 병력에 제국의 마법 병단까지 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균열 앞도 마족 싸이클롭스를 끝으로 잠잠했다.
빙벽 주위를 떠돌던 마수들이 호기심에 어쩌다 한차례씩 균열을 넘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틀 동안 마나를 회복한 대마법사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다시 균열 앞으로 나아갔다.
기막히게도 스쿠툼(빙벽)은, 그가 히르헤라에 도착해서 보았을 때와 비슷하게 갈라져 있었다.
푸토코아 백작가의 골리앗 중대장 롤프 프릿츠 남작이 설명하듯 말했다.
“얼음이 조금씩 부스러지더니 오늘 아침부터 저런 상태입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균열의 크기가 그대로인가?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가 있나?”
“처음 헤르헤라에 도착해서 봤을 때보다 더 커졌습니다. 열흘 간격으로 크기를 재고 있는데, 그때마다 한 뼘씩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열흘에 한 뼘이라는 건가?”
“예, 지금은 그렇습니다만 균열의 크기가 더 커지면 벌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균열이 커지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7서클의 ‘메가 아이스 월’로도 안 된다면 이제 남은 건 인공 구조물이다.
돌로 쌓은 벽이 스쿠툼(빙벽)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시도라도 해야 한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스쿠툼을 보았다.
성벽이 스쿠툼을 대신할 수 있을까?
‘불가하다.’
거대 마수 한 마리만 난동을 부려도 성벽은 무너질 터였다.
마족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성벽도 싸이클롭스의 해머질 한 번이면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싸이클롭스는 마족들 중에서 상위에 속하지도 않는다.
아니 마족이 아니라 5서클 흑마법사의 마법에도 뚫릴 수 있다.
그럼에도 성벽을 쌓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좋아하시겠군.’
스쿠툼을 성벽으로 대체하는 일에 북부 왕국들이 매달리면, 그만큼 남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북부 왕국들이 대수림의 어비스에 쏟는 관심도 줄어든다.
이래저래 황제에게는 손해를 볼 일이 아니었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갈라진 균열에 다시 한번 ‘메가 아이스 월’을 시전했다.
비록 며칠 못 간다 해도 균열의 복구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가 아이스 월’을 펼치자마자 ‘투둑!’ 하며 마법으로 만든 얼음과 스쿠툼 사이에 균열이 생겼지만, 다시 메가 이이스 월을 시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몇 번을 덧씌운다 해도 마법으로 만들어진 얼음이 스쿠툼에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대한 균열이 메꿔지자 골리앗 중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며칠 못 가지만 그래도 ‘메가 아이스 월’이 막아 주는 동안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서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환호하는 골리앗 중대를 뒤로하고 균열 앞을 떠나갔다.
그날 저녁.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엘리오를 코르보 마법 병단의 막사로 초대했다.
엘리오는 제국의 대마법사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게. 좋아하는 차가 있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가? 야인 부족들은 차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던데, 좋아하는 차가 없다면……. 커피는 어떤가?”
“좋습니다.”
“다행이군. 이리 와서 앉게.”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그의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켰다.
엘리오가 앉자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커피가 담긴 찻잔을 엘리오의 앞에 슬쩍 내려놓았다.
“에스카토스 공작에게 자네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서 따로 좀 알아보았네. 푸토코아 백작가와 문제가 조금 남아 있더군.”
“그거라면 빙벽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덮어 두기로 했습니다.”
“그랬군. 아쉽지는 않은가?”
“개인의 복수보다는 대륙의 안위가 우선이니까요.”
순간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왕국이 아니라 대륙을 거론한다?
왠지 그가 더 멀리 내다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인 출신이라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순간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엘리오가 베르나르도 후작가로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보니 큰 뜻을 품고 있었군. 자네에게 에스카토스 왕국이 좁을 것 같은데, 혹시 제국으로 진출할 계획이 있나?”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있습니다.”
엘리오는 부인하지 않았다.
천공성의 위치를 알려면 제도(帝都)에 있다는 ‘마법사의 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제국으로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예.”
“언제쯤 갈 생각인가? 물론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봉작을 받고 난 이후에 가겠지?”
그는 엘리오가 귀족의 작위를 받은 뒤에 제국으로 갈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대체로 그게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기도 했지만, 북부 지역이 너무 위험해서다.
북부에 자기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숨 걸고 스쿠툼(빙벽)의 수리에 매달릴 귀족은 없었다.
하물며 후방에 왕국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해 줄 제국이 있는데 누가 위험한 북부에서 뒹굴겠냐 말이다.
그런데 엘리오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균열 문제가 마무리되면 가려고요.”
“…….”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황당한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다.
자기가 대륙의 수호자도 아닌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균열이 매일 조금씩 더 커지고 있으며, 7서클 마법으로도 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예.”
“스쿠툼을 대체할 만한 것은 성벽밖에 없네. 북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스쿠툼의 길이를 생각하면, 몇 세대가 걸릴지 모를 일이지.”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균열을 만든 흑마법사를 없애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건 성벽을 쌓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네.”
“하지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죠.”
엘리오가 고집을 꺾지 않자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듣기로 자네도 ‘메테오 스웜’의 생존자 중에 하나라지?”
“예.”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마법사들의 마법은 한계가 있다네. 상위의 마법일수록 마나 소모가 크고, 마나를 다 소진하면 더이상 마법을 쓸 수가 없지. 마나의 밀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자기가 도달한 서클의 마법을 세번 연 속으로 펼치면 마나가 고갈된다네. 그럼 마나가 다시 회복될 때까지 마법을 쓰지 못하지. 흑마법사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메테오 스웜’은 분명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마법이었을 걸세. 그러니 ‘테르미누스’를 동원했겠지.”
“테르미누스요?”
“아! 자네가 타메이온에서 보았다는 흑마법을 말하는 걸세. 그건 악신의 권능으로 마기를 증폭시킬 때 사용하는 흑마법이라네.”
“악신이 있습니까?”
“창조신 마나 프트라스의 대척점에 있는 악신이 샤이틴이라네. 마족과 마물, 마수 들을 만든 신이지. 설마하니 창조신 마나 프트라스가 그런 걸 만들었겠나.”
“그렇군요.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인데요. 카마 데비아스(천자마)와 우샤스 운드라(금사)는 어떤 신인가요?”
“어떤 신이냐니?”
“그들의 성향이 마나 프트라스에 가까운지, 아니면 샤이틴에 가까운지가 궁금해서요.”
“재밌는 질문이군. 흠! 그 두 신을 마나 프트라스처럼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중립적이라네.”
“악한 건 아니라는 건가요?”
“카마 데비아스는 ‘천공성’, 우샤스 운드라는 ‘어비스’의 주인이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요?”
“그건 두 신들이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세. 천공성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비스처럼 대륙 어딘가에 있다고 하네.”
“타메이온이 아니라 대륙에 있으니까……. 인간과 밀접하다는 건가요?”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그런데 어비스는 모험가들의 선악을 가리지 않네. ‘모험가들의 도시’가 ‘범죄자들의 피난처’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 그 점에 있어서는 천공성도 마찬가지네. 흑마법사들이 천공성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도 그래서고.”
“천공성이야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 그렇다 쳐도, 모험가들의 도시는 인근 왕국에서 관리할 수 있지 않나요?”
“그곳에서 얻는 이익이 크지 않으니 그냥 방치한 걸세.”
“요즘은 남부 왕국들이 어비스에 관심을 쏟고 있다면서요? 병사를 파견해서 관리하지는 않나 봐요?”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가?”
“여기저기서요.”
“흐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남부 왕국들은 모험가들의 도시에 관여할 수 없네.”
“왜요?”
“제국에서 그걸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지. 남부 왕국에서 어비스에 군대를 파견하면 제국도 똑같이 할 걸세. 남부 왕국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제국의 군대가 남부에 발을 디디는 거라네. 그러니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남부 왕국들과 제국이 함께 군대를 보낼 수도 있잖아요?”
“상호 간에 그 정도의 믿음은 없네. 오십 년 전까지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같은 지역에 군대를 주둔할 것 같나?”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심지어 ‘대수림 출입 허가제’까지 들고나오는 남부 왕국에서 제국군의 어비스 진출을 용인할 리가 있나.
엘리오는 이내 대수림과 어비스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중립적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이곳에서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가 사악한 짓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뒤틀린 욕망(천자마와 금사)이 ‘왕들의 하늘’에서 풀려났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가 원하는 것은 뭘까?
‘혼란 그 자체는 아닐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목적을 모르겠다.
생각에 잠겨 있는 엘리오의 귓가에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야기가 조금 샜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네. 흑마법사는 히르헤라에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마법을 퍼부었네. 그 결과 마력이 고갈되었고, 어디에선가 재충전을 하고 있겠지. 한계 이상의 마력을 사용하면 재충전의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네. 짧으면 석 달, 늦어도 육 개월은 넘지 않을 걸세.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진 게 두 달쯤 전이라지?”
“그렇습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넉 달 후에 그 흑마법사는 활동을 재개할 걸세. 코르보 마법 병단은 그 전에 제도로 돌아가게 될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제도로 가서 황제 폐하를 만나 뵙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