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65
1065회. 그때 느낌이 딱 왔습니다
그야말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마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시선이 일제히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을 향했다.
동료를 잃어서 복수심에 불탈 만도 한데 병사들은 오히려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인간에게 마족이란 ―상대가 아무리 하위 마족이라 해도― 두려움의 대상인 까닭이다.
병사들은 이렇게 끝나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에스카토스 공작도 아나킨들에 대한 복수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아나킨 수십 명을 죽여 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생길 병사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그냥 보내는 게 나았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다.
주둔지 수호의 일등 공신인 엘리오 남작이 갑자기 저 혼자 마족들을 추격한 것이다.
“중대장님!”
파비안의 외침에 달려가던 엘리오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말고 돌아가! 나는 마족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어떻게 알아보시게요?”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지만 이미 엘리오의 신형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파비안은 중대장을 대신해 루퍼스 중대를 이끌고 왕국군에 합류했다.
왕국군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이 친히 루퍼스 중대로 다가왔다.
바짝 긴장한 파비안은 중대원들을 대표해 공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공작 전하!”
“전하는 무슨, 원수님이라고 해라.”
“예, 원수님. 저는 루퍼스 중대의 참모 파비안이라 합니다.”
“오! 균열의 기사 파비안이 경이었군. 만나서 반갑다. 그런데 중대장은 어디로 갔나?”
“마족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마족들을 쫓아갔습니다.”
“마족의 배후?”
에스카토스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에 관해 아는 게 없어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경도 그 이상은 모르는 모양이군.”
“예.”
“수고했다. 루퍼스 중대의 활약으로 반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너희들의 공은 잊지 않겠다.”
“아닙니다! 왕국의 기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형식적인 대답에 피식 실소를 흘리던 에스카토스 공작은 이내 돌아섰다.
공작 일행이 멀어지자 파비안은 기수인 레이 모건에게 슬쩍 물었다.
“제가 실수한 거 없죠?”
“없어. 뻔한 대답에 웃으신 것 같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레이 모건은 대답 대신에 파비안의 흉내를 냈다.
“아닙니다. 왕국의 기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티가…… 많이 나네요.”
파비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저렇게 날린 자신이 한심했다.
***
엘리오가 아나킨들을 따라간 것은 천자마와 금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가 볼 때 마족의 침략은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행동이었다.
‘우연은 마수까지만이지.’
마물의 출현도 의심스러운 판국에 오백 명이나 되는 마족이 균열로 들어왔다?
이건 그냥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거다.
엘리오는 마족들의 뒤에 천자마나 금사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아나킨들이 타메이온으로 넘어가자마자 그들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타메이온에 진입해 안도의 숨을 내쉬던 프롬푸트 족장이 한순간 굳었다.
엘리오는 자신의 통역 아티팩트를 믿고 말했다.
“어이! 마족들, 잠깐 서 봐. 내가 물어볼 게 있거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아티팩트는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보다 미세하게나마 도움이 된다.
프롬푸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 무엇이냐?”
엘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족은 꽤 길게 말했는데 아티팩트가 그걸 딱 두 마디로 압축한 때문이다.
그래도 대화가 되자 엘리오는 허공답보를 이용해 우두머리 아나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인간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프롬푸트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검사였구나!’
아나킨의 데스 워드를 깨부술 정도면 그 경지가 상당하리라.
“왜 균열을 넘어왔지? 왜 인간의 땅을 공격했냐고.”
“복수……한다.”
“무슨 소리야? 너희가 쳐들어왔으니까 복수를 해도 인간이 해야지.”
“복수……한다.”
“이런 젠장.”
엘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나킨의 우두머리의 말은 꽤 길었는데 통역은 계속 ‘복수한다’뿐이었다.
‘싹 다 죽여 버릴까?’
복수한다고 또 몰려올 걸 생각하면 이곳에서 처리하는 게 나았다.
갑자기 인간의 눈에 살기가 맺히자 놀란 프롬푸트는 몸짓까지 동원하며 말했다.
“인간…… 마법사…… 복수한다.”
아나킨의 말에 엘리오가 확인하듯 물었다.
“흑마법사를 만났어?”
순간 프롬푸트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아나킨이 허둥지둥하자 엘리오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아나킨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앞에서 복수 운운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복수의 대상은 주둔지의 왕국군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몇 달 전 타메이온에서 마주쳤던 흑마법사들이 떠올랐다.
인간까지 제물로 삼는 자들이니 아나킨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리라.
“흑마법사들이 너희를 공격했어?”
“인간 마법사…… 복수한다.”
엘리오는 이제야 늙은 아나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저들은 복수를 위해 균열을 나온 것이었다.
배후에 있는 게 천자마와 금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라니 김이 좀 빠졌다.
“돌아가. 다시 균열로 나오면 죽는다. 알았어?”
어딘지 평화로운 인간의 말투에 프롬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가도 된다’는 뜻 같았다.
늙은 아나킨이 눈치를 보자 엘리오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균열로 돌아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나킨들은 다시 모쿠바스를 향해 걸어갔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타메이온을 빠져나온 엘리오는 루퍼스 중대로 돌아갔다.
쑥대밭으로 변한 다른 숙영지와 달리 베르나르도 후작군 숙영지는 피해가 덜했다.
루퍼스 중대의 막사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멀쩡한 중대장 전용 막사를 보고 엘리오가 가슴을 쓸어내릴 때 파비안이 다가왔다.
“중대장님!”
“왜?”
“에스카토스 원수님께서 중대장님을 찾아오셨었습니다.”
“나를 부른 건 아니지?”
“예, 그래도 가 봐야 되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이 오라고 하지 않는데 찾아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물론 귀찮은 이유도 있지만 굳이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셨던 일은요?”
“일?”
“마족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본다고 하셨잖습니까?”
“아, 그거? 흑마법사들이 마족에게 뭔 짓을 한 것 같더라고.”
“또 흑마법사의 짓이었습니까?”
“아나킨의 늙은 마족이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맞아.”
순간 파비안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이종족의 언어도 통역이 됩니까?”
“전부 다는 아니고 드문드문.”
“와아! 아티팩트가 비싼 이유를 알겠네요. 중대장님은 그런 보물을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선물받았어.”
“저도 주변에 그런 거 선물해 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이런 귀한 걸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고?”
“중대장님이 보시기에 제가 그럴 정도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쩝.”
파비안이 부러운 눈으로 엘리오의 아티팩트를 보았다.
그러자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아서라. 지금 네 실력으로는 이런 거 가지고 있어 봤자 바로 빼앗긴다.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게 죄라는 말이 있잖냐. 언제 당한지도 모르게 죽을걸? 오래 살고 싶으면 보물을 멀리해야 돼.”
“듣고 보니 그렇네요.”
파비안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지라 반박하지 않았다.
은화 한 닢 때문에도 죽는 판국에 저 정도의 아티팩트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엘리오는 막사로 들어가 체인 메일을 벗어 두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피로감보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천자마와 금사의 흔적을 발견하리라는 기대가 무너진 게 컸다.
왕들의 하늘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적이 알아서 찾아왔는데, 지금은 모든 게 반대다.
천자마와 금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을 드러낼 수도 없다.
“하아!”
혼돈을 따라가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어째 처음 도착한 날이나, 남작의 작위를 받을 정도로 적응한 지금이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래서야 원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그렇게 엘리오가 탄식할 때 막사 밖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라고아 남작, 안에 있는가?”
엘리오가 막사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지 귀에 익은 소리지만 누군지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예!”
말과 함께 엘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오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작위가 높은 사람이 찾아온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불사조 기사단장인 엘런 파레스 백작이었다.
뒤이어 베르나르도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님?”
깜짝 놀란 엘리오는 정중하게 묵례를 해 보였다.
그러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쉬고 있는데 괜히 방해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소.”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엘리오가 의아한 얼굴로 베르나르도 후작을 보았다.
후작과 사적인 만남을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아닌 그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데 꼭 일이 있어야 하오?”
“그, 그건 아닙니다.”
“하하. 농담이오. 경이 마족 침공의 배후를 조사하고 있다 들었소. 수확이 좀 있었소?”
“아!”
그제야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의 방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마족 침공의 배후에 정말 누가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괜히 긴장했네.’
이전처럼 아랫사람을 시켜 불러도 되는데 왜 직접 찾아와 놀라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엘리오가 급변한 자신의 위상을 미처 알지 못해 생긴 일이다.
얼마 전까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에서 언터처블의 존재였던 엘리오는, ‘코드란테스 백작과의 결투’와 연이어 발생한 ‘마족과의 전쟁’으로 히르헤라 주둔지의 언터처블이 되어 있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불사조 기사단장을 앞세우고 찾아온 것도 그래서다.
“늙은 아나킨과 이야기를 해 봤는데, 마법사 이야기를 하면서 복수라고 하더라고요?”
“마족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이오?”
베르나르도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보았다.
통역 아티팩트가 모든 것을 다 통역하지는 않는다.
그가 가진 아티팩트가 볼품이 없는 대신 범용성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언어에 한해서다.
‘마족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급 아티팩트는 저렇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이 못 미더워 하자 얼른 설명을 보탰다.
“대화를 나눈 건 아니고요. 어쩌다 단어 몇 개를 통역해 주더라고요. 인간 마법사, 복수한다. 그때 느낌이 딱 왔습니다. 흑마법사가 마족에게 수작을 꾸몄구나!”
그제야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에서 의심이 걷혔다.
아티팩트의 범용성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가능한 범주 내에 속했기 때문이다.
“엘리오 경은 지난번 그 흑마법사들의 짓이라고 생각하시오?”
“증거는 없지만 느낌은 그렇습니다. 그자들 외에 타메이온을 출입할 인간은 없으니까요. 혹시 왕궁에서 은밀히 타메이온을 염탐했을까요?”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소. 게다가 우리 왕국에는 타메이온을 은밀히 출입할 기사와 마법사도 없소. 그런 능력자들이 있다면 여기 히르헤라 주둔지로 파견했을 게요.”
“하긴 그렇겠네요.”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빙벽의 균열을 지키기도 급급하니 타메이온의 염탐은 무리다.
“정말 그게 흑마법사들의 소행이라면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시오?”
베르나르도 후작이 심유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