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68
1068회. 왕좌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애나 로건의 반응을 지켜보던 파비안이 덧붙였다.
“우리 중대장님의 수련법은 지나치게 디테일 합니다. 제 느낌에는 마나와 영기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저의 경우 대략적인 위치만 생각해도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님은 꼭 혈관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럼 마나를 혈관에 녹이라는 표현을 다르게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을까요?”
“어쩌면 그건 통역 아티팩트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대장님이 통역 아티팩트로 대화하는 건 아시죠?”
“예.”
“결론은 중대장님이 말씀하시는 신체의 특정 부위로 마나를 이동시키면 되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혈관이니, 마나를 녹여 보내니, 그런 거에 집착할 필요 없습니다. 중대장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산 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많다.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
“아!”
문득 머리를 강타하는 깨달음에 애나 로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면 파비안의 말이 맞았다.
혈관에 마나를 흘려 보내는 목적은 양쪽 다리로 마나를 이동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혈관에 마나를 녹여 보내라는 말로 인해 지금까지 끙끙 앓고만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아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셈이다.
통역의 한계 때문인지, 영기와 마나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면 알리라.
왠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조언 감사했어요. 다음에 또 봬요.”
마음이 급해진 애나 로건은 파비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파비안이 멀어져 가는 애나 로건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지? 중대장님 보러 온 것 같은데 그냥 가네. 진짜 조언만 구하러 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던 파비안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새로 배운 검술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게 병사 하나가 찾아왔다.
“파비안 소위님! 중대장님이 찾으십니다!”
“알았다.”
파비안은 즉시 롱소드를 검집에 넣고 돌아섰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균열 감시에 투입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왜 부르는지 모르겠다.
***
루퍼스 중대장 막사.
휘장을 열고 들어간 파비안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군례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중대장님.”
“푸토코아 백작에게 좀 다녀와야겠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뭘 하면 됩니까?”
“배상으로 알바 누베스 산맥의 소유권을 달라고 해. 당장.”
“언제 주겠다고 날짜를 약속하면요?”
“약속은 필요 없어. 당장 주지 않으면 내가 목을 부러뜨리러 간다고 해. 네가 가서 받아 오든지, 푸토코아 백작이 죽든지 둘 중에 하나야.”
“예, 그런데 저 혼자 갑니까?”
“왜 무서워?”
“무서운 건 아닌데…….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무서운가 보네?”
엘리오가 실실 웃으며 보자 파비안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기사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푸토코아 백작에게 충성하는 귀족이 저를 죽이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겁이 나면 1소대를 데리고 가.”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네가 내 참모인 걸 아는대도 죽이려 들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고지식하고 단순한 귀족의 눈이 돌아가면 뭔들 보이겠습니까?”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귀족가에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결투의 패배자 측에서 홧김에 승자의 심부름꾼을 죽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귀족이 그렇게까지 무식하다고?”
“욱하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귀족들 중에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1소대로 되겠어?”
“개인이면 좀 만만하게 보는데, 부대가 왔다는 인식을 하면 손 못 댑니다. 그때는 진짜 백작가를 몰살시켜도 할 말이 없게 되니까요.”
“기사 아카데미에서 그런 것도 가르치냐?”
“귀족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면 터득하게 되는 생존의 지혜입니다.”
“가 봐.”
“예!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가려던 파비안이 뒤늦게 생각난듯 한마디 했다.
“아! 아침에 애나 로건 경이 찾아왔었습니다.”
“왜?”
“중대장님이 마나를 혈관으로 흘려 보내라고 하셨다면서요? 그 일로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나한테까지 안 오고 그냥 간 걸 보면 네 조언으로 충분했나 보네?”
“제가 잘 지도했습니다.”
“그랬으면 됐지. 그런 얘기를 나한테 왜 해?”
“중대장님은 애나 로건 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
엘리오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머리를 긁적이던 파비안은 조용히 떠났다.
홀로 남은 엘리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놈은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왜 임자 있다는데 자꾸 여자 얘기를 하지?”
파비안의 입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천자마와 금사에 대한 분노도 커져 갔다.
‘내가 이 개만도 못한 것들을 찾기만 하면…….’
대화도 필요 없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구천검령으로 요절을 내고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푸토코아 백작군 진영.
파비안의 전략은 주효했다.
푸토코아 백작가의 귀족들은 파비안을 쏘아보았지만 욕까지 하지는 않았다.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루퍼스 중대의 명성이 높았기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푸토코아 백작의 막사로 안내된 파비안은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저는 루퍼스 중대 참모 파비안입니다. 저희 중대장님이신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의 명으로 찾아뵀습니다.”
“배상을 받으러 온 거냐?”
“예.”
푸토코아 백작이 서기인 휴고 라모스 남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휴고 라모스 남작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봉투를 들어 파비안에게 내밀었다.
“알바 누베스 산맥의 소유권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있음을 증명한다는 서류다.”
파비안은 두 손으로 공손히 서류를 받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암살까지 청부했던 푸토코아 백작이 이렇게 선선히 나오니 조금 의외였다.
“감사합니다. 중대장님께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후 돌아서려는 파비안에게 푸토코아 백작이 말했다.
“파비안이라고 했지?”
“예.”
“작위를 받고 싶으면 언제든 푸토코아로 와라. 마나 유저라도 남작 정도는 가능하니까. 너희 중대장은 영주지만 남작이라 작위를 줄 수가 없을 게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베르나르도 후작가로 가서 작위를 받았음을 비꼬는 말이다.
파비안은 울컥했지만 감히 받아치지 못하고 조용히 돌아섰다.
‘미친놈.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루퍼스 중대로 돌아온 파비안은 곧바로 엘리오 남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으며 툴툴거렸다.
“말씀하신 배상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푸토코아 백작 말입니다. 좀 미친 거 같습니다.”
“왜?”
“그 어린놈이 저에게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작위를 받고 싶으면 언제든 푸토코아로 오랍니다.”
“그게 뭐 어때서? 좋은 말이구만. 요즘 누가 너 같은 마나 유저에게 작위를 줘? 최소한 소드 비기너는 돼야 작위를 받는다면서?”
“아! 참! 나! 그게 진짜 작위를 준다는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빗대서 중대장님을 조롱한 겁니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에 가서 작위를 받았다고요.”
“그게 뭐 어때서? 그 귀한 걸 공짜로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 준다는데 안 받아?”
파비안이 멍한 얼굴로 엘리오 남작을 보았다.
평소 중대장의 생각이 남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중대장님은 그 핏덩어리가 그랬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습니까?”
“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잖아. 네가 찾아갔는데 작위를 안 주면 화가 나겠지만.”
“아, 예.”
파비안이 건성으로 답했다.
한편으로 어쩌면 통역 아티팩트의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역으로 말에 담긴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감정이 들끓지 않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엘리오는 밀봉을 뜯고 서류를 꺼내 더듬더듬 읽었다.
그동안의 공부가 헛되지는 않았는지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파비안. 이제 내가 알바 누베스 산맥의 주인이 된 거냐?”
“그렇습니다.”
“알바 누베스 산맥 초입에 파이어 스톤 광산이 있단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내 거인 거지?”
“푸토코아에서 개발했다면 채굴권을 요구하든지, 설비비를 달라고 할 겁니다.”
“안 줘. 나에게 넘긴다고 할 때는 그 모두가 포함이 된 거야.”
“제가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파비안의 말에 엘리오는 들고 있던 서류를 파비안에게 넘겼다.
서류를 읽던 파비안이 말했다.
“역시 토지에 대한 기록뿐입니다. 파이어 스톤 광산을 푸토코아가 개발했다면…….”
“안 줘. 나는 모두를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니까.”
“하지만 법이…….”
“응, 푸토코아 백작가에서 광산 어쩌고 하면 백작에게 다시 결투를 신청할 거야. 나를 기만한 죄는 크니까.”
“와아. 중대장님 진짜 상남자시네요?”
“파비안. 잔머리는 결코 칼을 당해 낼 수 없어. 내가 이 세계에서 마음에 드는 건 딱 하나야. 그게 뭔지 알아?”
“뭔데요?”
“결투.”
“…….”
파비안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엘리오 남작과 같은 검사가 말하니 예사롭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칼 하나로 작위와 봉토를 얻음은 물론, 푸토코아 백작가까지 발아래에 두었다.
그의 생각과 하는 짓을 보면 저 칼이 어디까지 겨눌지 모르겠다.
“중대장님.”
“왜?”
“혹시 말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인데 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빨리 말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왕좌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제가 먼저 말을 하고도 겁이 나는지 파비안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없어. 그런 골치 아픈 자리에 왜 앉아? 그보다 전에 말했을 텐데. 일을 끝내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 일이 높은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 건 확실한 거죠?”
“네 눈에는 내가 그런 속물로 보이냐?”
“속물로 보이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중대장님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걱정입니다. 계속 모시고 다녀야 하나 내가 따로 독립해야 하나…….”
“네 꼴리는 대로 해. 그런데 이것만 알아 둬.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슬래시 랜드와 알바 누베스 산맥을 들고 가지 않는다는 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왜 독립한다며?”
“걱정이라고 했지 독립하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았어. 가 봐.”
엘리오가 손을 까딱이자 파비안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린 후 돌아 나갔다.
홀로 남은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나도 들고 가지 않는다고 했지 너 준다고는 안 했다.”
이윽고 서류를 마하담(공간 창고)에 휙 던져 넣은 엘리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무 받침대에 걸쳐진 히르헤라의 지도가 있었다.
장성(長城)처럼 길게 늘어선 빙벽 뒤 타메이온에는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혼돈이라.”
균열은 분명히 혼돈의 시작이다.
히르헤라에 있는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군이 그것을 막아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