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8
1078회. 글라체스 요새
개떼처럼 몰려오는 케르베로스를 향해 엘리오가 검을 휘둘렀다.
오라 블레이드라고 불리는 진검강이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케르베로스들을 직격했다.
케르베로스들의 기괴한 울음소리 사이로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다.
케케케케―.
끄끄끄끄―.
콰자자작―!
마물은 확실히 마수보다 강했다.
오라 블레이드에 직격당해 몸통이 양단된 케르베로스도 있지만, 많은 케르베로스들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그를 지나쳐 갔다.
엘리오는 루퍼스 중대와 베르나르도 후작군이 고전할 걸 알면서도 그들을 도우러 갈 수 없었다.
그를 지나쳐 간 마물보다 훨씬 더 많은 마물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개의 머리를 가진 이족 보행 마물 코발로스, 시체를 먹는 거인 구울, 광염의 히드라, 블러디 카리브 등의 마물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엘리오가 선두에서 마물의 주력을 분쇄하지 않았다면 베르나르도 후작군은 이미 쓸려 나갔을 것이다.
거의 무아지경에서 마물들에게 칼을 휘두르던 엘리오가 서서히 깨어났다.
마수와 마물의 사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광염의 히드라가 뿜어 댄 용암으로 석화된 사체들은 보기만 해도 기괴했다.
좋은 점도 있었다.
석화된 사체들로 울타리가 만들어졌고, 베르나르도 후작군은 그만큼 안전해졌다.
엘리오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염의 히드라가 내뿜는 용암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고, 그때마다 더 많은 마물들이 베르나르도 후작군에게 몰려갔었다.
그래서일까?
베르나르도 후작군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루퍼스 중대는 언제 후퇴를 했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본진과 함께 있었다.
보다 자세한 전황 파악을 위해 엘리오는 석화된 구울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다른 영지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생존한 병사들이 삼 할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큰일 났군.’
마족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칠 할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니 기가 막혔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에스카토스 공작군 본진에서 집결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병력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니 한 곳으로 불러 모으려는 모양이다.
하기야 삼사백 명만 남은 소규모 인원으로 마족과 싸우는 건 무리였다.
베르나르도 후작군은 마물을 뚫고 에스카토스 왕국군 본진에 합류했다.
마침내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대귀족들의 긴급 작전 회의 자리에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불렀다.
일개 중대장이 장군들 회의에 참석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왕국군 생존자가 천 명 정도에 불과하오.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오. 마족의 침공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소. 아직 마족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소. 지금 이대로라면 마족과의 싸움은……. 승산이 없소. 그것에 대한 경들의 생각을 듣고 싶소.”
묵묵히 듣고 있던 대장군 베르나르도 후작이 확인하듯 물었다.
“원수님은 혹시 퇴각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메이지 칼로스 경의 탐지 마법에 의하면 마족군 일만이 접근하고 있소. 지금 마물의 공세가 약해졌지만 그 세력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소. 마족군과 만날 때까지 왕국군이 몇이나 살아 있을지 모르겠소.”
콕 찍어 말하지 않았지만 퇴각하자는 소리였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힐끔 보았다.
“엘리오 남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 부장군인 코드란테스 백작과 콜린 스트롱 백작, 궁정 마법사 칼로스,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 일제히 그를 주목했다.
“저는 아는 것과 보는 것[識見]이 부족해서 여러분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통역 아티팩트가 조금 이상하게 표현했지만 뜻이 통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베르나르도 후작이 운을 뗐다.
“내키지 않지만 지금의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보존하려면 퇴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마족에 맞섰다가는 몰살당할 위험이 큽니다.”
그러자 코드란테스 백작이 한마디 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히르헤라에서 퇴각하면……. 북부는 마족 손에 넘어가게 될 겁니다. 마족들이 북부에 만족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마족이 빙벽을 넘어오면 대륙도 곧 멸망할 테지요.”
그것도 맞는 말인지라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귀족 회의를 찍어 눌렀다.
전방의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에스카토스 공작이 서둘러 말했다.
“히르헤라를 내어 주자는 게 아니오. 히르헤라 남부로 후퇴를 하는 것은 어떻소? 비공정에서 남쪽에 오래된 요새 하나를 본 기억이 있는데. 임시로 그곳에서 시간을 버는 것은 어떻소? 마족 역시 우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을 게요.”
그러자 코드란테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체스 요새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코드란테스 백작은 헤르헤라의 주인답게 바로 요새 이름까지 말했다.
대귀족들의 의견이 ‘글라체스 요새로 이동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들은 히르헤라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만족했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군으로 전령을 보냈다.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군도 반대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 왕국군은 주둔지를 버리고 후퇴했다.
기다렸다는 듯 왕국 연합군이 사용하던 주둔지로 마족들이 밀고 들어갔다.
히르헤라 주둔지.
모쿠바스의 군주인 몰록이 마수, 마물, 인간의 시체로 가득한 주둔지를 둘러보며 말했다.
“드라고드. 인간들을 살려서 보내다니 어찌 된 일이냐?”
타락한 용족의 우두머리인 드라고드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인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희 드라고니안들이 아나킨과 함께 인간들의 뒤를 쫓고 있으니 곧 정리가 될 것입니다.”
“내 뒤에 인간을 남겨 둘 수는 없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사흘 안에 끝내겠습니다.”
드라고드의 장담에 몰록은 더는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드라고드는 물론 몰록도 그 정도 시간이면 인간 군대를 끝장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마수와 마물만으로 인간 군대의 대부분을 쓸어 버렸기 때문이다.
상위 마물은 아직 본격적으로 풀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 결과를 냈다.
거기에 드라고니안과 아나킨까지 투입되면 인간 군대의 끝이 어떨지 뻔하지 않은가.
***
히르헤라 남쪽 글라체스 성형요새(星形要塞, Star Fort).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 왕국군 생존자들은 ―집요한 마물의 추격을 뿌리치고― 해거름 무렵에야 겨우 글라체스 요새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밤 에스카토스 공작,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은 글라체스 요새 중앙에 세워진 석조궁에 모였다.
세 사람 모두 소드마스터였지만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드마스터들이 지칠 정도로 고된 하루였던 것이다.
베일럼 왕국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씁쓰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요새가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할 뻔했습니다. 나는 주둔지에서 죽든지, 달아나든지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었습니다.”
그러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국과의 전쟁 당시에 최후의 보루로 지어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히르헤라 북부와 남부의 길목에 세워진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국이 좋은 일을 했군요. 그나저나 앞으로가 문제 아닙니까? 우리 병력으로 마족의 군단에 맞설 수는 없다고 보는데……. 우리가 다른 북부 왕국과 제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한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의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마족군에게 쫓기는 와중에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강함을 목격한 때문이다.
생존한 병력만 봐도 에스카토스가 일천, 라미노프와 베일럼 왕국에서 각각 오백여 명씩 살아남았다.
아무리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사나운 사람이라 해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그의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북부 왕국과 제국의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은 그야말로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당장 마물이 요새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 왕국과 제국에서 지원군을 논의하기도 전에 요새가 먼저 사라질 게 분명했다.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의 말은 오히려 절망적인 글라체스 요새의 상황을 더욱 부각시켰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원군은 둘째치고 내일 마족군의 공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삼국 연합군의 운명이 히르헤라에서 이미 결정됐다고 생각했다.
사실 글라체스 요새의 삼국 연합군에게 희망은 없었다.
오랫동안 방치 상태였던 글라체스 요새에는 음식이나 파이어 스톤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삼국 연합군은 마물과 싸우다 죽든지, 굶어 죽든지, 얼어 죽을 상황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에스카토스 공작이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왕국의 음식과 파이어 스톤 보유량은 어떻습니까?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보름치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일럼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말했다.
“용케 보급부대가 따라왔으니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급부대를 많이 잃었지만 일반 부대의 손실이 더 컸기에 오히려 음식과 파이어 스톤은 여유가 있었다.
에스카토스 공작과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시선이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을 향했다.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계면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급부대를 잃어서……. 병사들이 개별적으로 소지한 게 전부입니다. 오늘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요. 에스카토스와 베일럼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 와중에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은 에스카토스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도움을 빌미로 비취호수를 포기하라고 할까 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에스카토스 공작은 비취호수를 거론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베일럼 왕국은 일주일치가 있다고 하니 우리가 일주일치를 라미노프 왕국에 지원하겠습니다. 일주일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어딘지 공허한 에스카토스 공작의 웃음이 석조궁에 울려 퍼졌다.
루퍼스 중대.
엘리오가 파이어 스톤에 불을 붙이자 중대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엘리오는 가급적 중대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멍청한 사람들. 떠나라니까…….’
사실 그는 루퍼스 중대원들이 모두 달아나기를 바랐다.
주둔지에 남아 있어 봐야 죽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을 자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많은 중대원들이 남았다.
심지어 절반 가까이 전사했는데 중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농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동료의 죽음에 무덤덤한 얼굴들이다.
누군가 전투 식량인 에너지 볼을 꺼내 먹었다.
그러자 하나 둘 품에서 에너지 볼을 꺼내 뜯어 먹기 시작했다.
뒤늦게 허기를 느낀 엘리오도 품에서 에너지 볼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에너지 볼을 먹으며 애써 외면하던 중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래 생활한 오봉산채의 도적들보다 루퍼스 중대원들이 더 안쓰러웠다.
녹림의 도적들과 달리 저들은 강제로 징집당한 백성들인 까닭이다.
그런 사람들이 북부를 지키겠다고 제 발로 사지에 남았다.
에너지 볼에 꿀도 섞였다는데 왜 이렇게 쓴맛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때 빨빨거리며 요새를 돌아다니던 파비안이 돌아와 엘리오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중대장님. 베일럼의 두 여기사들은 무사합니다. 그런데 애나 로건 경이 중대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누가 물어봤냐?”
“궁금해 하시는 거 다 압니다. 애나 로건 경 말입니다. 전투 중에 스왈로우 플라잉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자신도 살고, 여러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답니다.”
엘리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쓰기만 하던 에너지 볼에서 희미하게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