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7
1097회. 느낌이 좋지가 않아요
히르헤라 탈린 왕국 주둔지.
지휘 통제 막사.
결투가 끝난 직후 탈린 왕국 대귀족들은 원수가 소집하지도 않았는데 지휘 통제 막사로 모였다.
대장군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이대로 끝내실 생각이십니까?”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무덤덤한 어조로 되물었다.
“끝내지 않으면?”
“결투 결과가 알려지면 탈린 왕국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겁니다.”
“대안은 있고?”
“…….”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대안은 소드마스터들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들의 체면을 생각해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은 소드마스터를 이긴 소드마스터로 유명하지. 그런데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이 소드마스터를 꺾을 때 걸린 시간을 알고 있나? 가장 빨랐다고 알려진 게 30분이야. 아란치움 협곡에서 필리스 테사바움 공작의 결사단과 싸울 때 세운 기록이지. 오늘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용병왕을 꺾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넘지 않았네. 라고아 자작을 꺾기 위해서 몇 명의 소드마스터를 동원해야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아. 그런 앞이 보이지 않는 짓에 왕국의 힘을 쏟아부어야겠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소드마스터인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의 입에서 저렇게 자신 없는 소리가 나왔으면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그의 나이와 출신지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경지야. 뭔가 놀랄 만한 비밀이 있을 걸세. 설사 그런 게 없다 해도, 그만한 인물에 대해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돼.”
“알겠습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관한 것은 먼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참모장 로랜드 베넌트 자작에게 물었다.
“라고아 자작이 이전보다 더 큰 어둠의 에테르가 몰려온다고 했다. 그것에 대해 들어온 소식이 있나?”
“연합군에서 타메이온에 3개 정찰 부대를 투입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이상 현상에 대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라고아 자작은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다. 연합군 참모들에게 전파하고, 수색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도록.”
“예.”
울리크 론드그렌 공작이 대장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큰 어둠의 에테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몰록의 군단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겠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몰록의 군단을 우리 여덟 개 왕국군과 한 개 제국군 사단 병력으로 상대할 수 있었을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개, 혹은 세 개 군단이 몰려오고 있다면? 그것도 우리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두 개 군단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족 군주들은 협력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두 개 세 개 군단이 몰려올지 의문입니다.”
“그야 모를 일이지. 빙벽의 균열도, 마족의 침공도 모두 처음 있는 일이니.”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의 말에 대귀족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타메이온 서북쪽 고성(古城).
시커먼 빛깔의 고성 중앙 홀에 삼 남 일 녀가 마주 앉았다.
각각 발람, 마몬, 랍바, 샤모스라 불리는 마족의 군주들이다.
거인족인 랍바를 제외하고 발람, 마몬, 샤모스는 인간보다 조금 커 보일 뿐 흡사 인간을 보는 듯했다.
회의는 마족들을 초대한 발람이 이끌고 있었다.
“……몰록이 사망함으로 모쿠바스에 새로운 군주가 필요하게 됐다. 모쿠바스의 마족들은 몰록의 복수를 해 준 마족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상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실은 당분간 구경만 하겠다는 속셈이지.”
그러자 마몬이 냉소를 날렸다.
“흥! 겁을 집어먹은 게로군. 주군의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기다니, 마족의 자격이 없는 것들이다.”
유일한 여성형 마족인 샤모스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겁을 먹은 건 발람도 마찬가지 같은데? 혼자서 인간 세계로 쳐들어가지 않고 우리 군주들을 불러 모았잖아. 몰록을 죽인 자를 혼자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거지. 안 그런가?”
순간 마몬, 랍바의 시선이 일제히 발람에게로 향했다.
발람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입을 열었다.
“뭐, 부인하진 않겠다. 생존한 드라고니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혼자서는 자신이 없더라고. 그대들도 알다시피 몰록과 나의 능력은 엇비슷하잖나. 그러는 샤모스, 너는 이 몸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발람이 스산한 눈으로 샤모스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살기 가득한 눈동자 앞에서도 샤모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왜 마음에도 없는 그대를 감당해야 하지? 나와 잠자리를 하고 싶으면 조금 더 체급을 올려야 할 거야. 나는 비슷한 상대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거든.”
샤모스는 상대를 비꼬면서도 둘의 능력이 비슷함을 인정했다.
그제야 발람은 살기를 풀었다.
사실 최상위 마족 군주들은 타메이온의 중심부를 다스렸다.
타메이온의 중심에서 멀수록 군주의 능력 또한 낮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외곽을 다스리는― 넷의 수준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키가 5미터나 되는 거인 랍바가 주의를 끌려는 듯 발을 ‘쿵!’ 하고 굴렀다.
그리고 세 마족이 자신을 쳐다보자 히죽 웃으며 말했다.
“몰록을 죽인 인간이 설사 그랜드마스터라고 해도, 우리 넷에게는 안 된다. 인간의 땅을 어떻게 나눌지를 논의하자. 하나가 대표로 그 일을 맡았으면 하는데, 어떤가?”
“하나가? 우리 중에 누가 가장 강한지 뽑자는 건가?”
발람이 눈을 찌푸렸다.
인간과의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족들끼리 먼저 싸우게 생긴 때문이다.
그러자 랍바가 고개를 저었다.
“강적을 앞에 두고 우리끼리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몰록의 원수를 죽인 자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은 어떤가?”
나름 합리적인 제안이라 생각한 발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찬성한다.”
마몬과 샤모스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야 마족 군주들이 그 인간 기사와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임할 테니까.
***
히르헤라 균열 앞.
오늘날 히르헤라 균열 근처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균열을 감시하는 왕국 연합군 병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석벽을 쌓는 민간인들이다.
과거와 달리 균열 감시 부대는 각 왕국의 예비 부대가 맡았다.
그들의 뒤에서 석공과 일꾼 들이 부지런히 석벽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각 왕국의 정예 부대들은 균열 너머 타메이온으로 진출했다.
타메이온을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석벽 공사에 동원된 민간인의 보호를 위해 하루 종일 균열로 통하는 설원, 얼음숲, 협곡의 세 갈래 길을 감시했다.
인간의 적응력은 뛰어나다.
처음에 병사들은 타메이온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더니, 한 달이 지나자 주둔지에서 지내듯 풀어졌다.
루퍼스 중대가 배치된 곳은 얼음숲이었다.
기수인 레이 모건이 망루 위에서 얼음숲을 응시하는 파비안에게 다가갔다.
“중대장님. 쉬엄쉬엄하십쇼. 그러다가 눈 빠지겠습니다.”
레이 모건은 파비안이 중대장에 취임한 뒤로 공석에서건 사석에서건 존댓말을 했다.
“어둠의 에테르가 몰려오고 있다지 않습니까. 어물어물하다가 골로 갑니다. 다들 정신 차리라고 하세요.”
“사흘 내내 그러고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감시하고 있으니 숨 좀 쉬면서 하십쇼.”
그러나 파비안은 얼음숲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처럼 눈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얼음숲을 보고 있으면 왠지 오싹오싹한 한기가 자꾸만 들어서다.
“느낌이 좋지가 않아요. 느낌이.”
“내일이면 교댑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잠깐만요.”
파비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레이 모건이 파비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드득. 우득.
얼어붙은 나무를 짓밟으며 아이스 오우거 한 마리가 나타났다.
‘휴우!’
긴장하고 있던 레이 모건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이스 오우거는 외부의 도움 없이 루퍼스 중대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1소대 소위와 백인장, 십인장들이 달려 나갔다.
망루 위에 있던 파비안이 스왈로우 플라잉의 수법으로 날아갔다.
곧이어 기사와 병사들에게 한눈을 팔고 있던 아이스 오우거의 정수리로 마나를 휘감은 파비안의 롱소드가 떨어져 내렸다.
콰직!
그러나 롱소드는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를 절단하지 못했다.
“캬아아아!”
아이스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완전히 잘리지는 앉았지만 잘린 거죽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기회만 엿보던 소위와 백인장이 몸부림치는 아이스 오우거의 뒤꿈치를 베었다.
머리의 치명상으로 몸을 보호하던 마력이 흩어졌는지 쇠줄처럼 단단하던 뒤꿈치가 성둥 썰려 나갔다.
아이스 오우거가 주저앉자 파비안은 다시 한번 도약했다.
파비안의 롱소드가 같은 자리에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머리통을 잡고 있던 아이스 오우거의 양쪽 손가락 끝과 함께 머리통이 ‘쩍!’ 하고 갈라졌다.
아이스 오우거가 풀썩 쓰러지자 기대 어린 눈으로 응시하던 루퍼스 중대원들이 ‘와아아!’ 함성을 질러 댔다.
그때 파비안이 굳은 얼굴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열광하던 루퍼스 중대원들이 숨을 죽였다.
파비안은 서북쪽으로 귀를 돌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오싹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쯧! 여기까지인가. 엘리오 라고아 부단장님이라면 좀 더 많은 걸 알았을 텐데.’
뭔가 오싹한 기운은 느껴지는데 그게 전부다.
아무리 집중해도 ‘적이 얼마인지?’ 그리고 ‘어디쯤 왔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숨죽이고 있던 중대원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하자, 파비안도 망루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솜씨 좋은 부대원이 아이스 오우거에게 달라붙어 값비싼 부위를 잘라 냈다.
고기를 떼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토막 낸 아이스 오우거를 부대원들이 쓰레기장에 버리고 왔다.
파비안은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움직이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 자신도 저들과 똑같았는데, 지금 보니 묘하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제3자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고작 소드 비기너의 눈에 보이는 세상도 이런데…….’
소드마스터가 보는 세상은 또 다르리라.
문득 소드마스터조차 뛰어넘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떠올랐다.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삶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까?
아니면 임박한 종말의 칙칙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을까?
어둠이 내려앉았다.
파비안이 망루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얼음숲을 응시할 때다.
누군가 그의 옆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흠칫 놀란 파비안이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며 고개를 돌렸다.
“부단장님?”
그는 주둔지에서 쉬고 있어야 할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깜짝이야! 오실 때는 말씀을 좀 하십쇼.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스 오우거를 잡았다면서?”
“예, 이제 슬슬 마수들이 출몰하는 걸 보니……. 원래대로 돌아가려나 봅니다.”
“그 밖에 다른 이상한 건 없고?”
“눈에 보이는 건 없는데, 저쪽을 보면 자꾸 소름이 오싹오싹 돋는 게 영 불쾌합니다.”
파비안이 서북쪽을 가리켜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좋은 현상이야. 육감이 발달해서 그래.”
“육감요?”
“마나를 혈관에 녹여 넣고 전신으로 돌리다 보면…… 오감이 발달하는데, 육감도 부수적으로 따라붙어.”
“육감은 뭘 느끼는 겁니까?”
“오감으로 느낄 수 없지만 실재하는 감각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소름이 돋고 오싹오싹한다면서? 어둠의 에테르를 네 육감이 느껴서 그러는 거야.”